사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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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1. 개요[편집]


아랍어 صافيتا
영어 Safita

시리아 서부의 도시. 타르투스에서 동쪽으로 14km 떨어진 산지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2만명이고, 그리스 정교회 기독교도와 알라위파 무슬림이 반씩 혼재한다. 십자군 전쟁기 샤텔 블랑크라 불렸고, 템플기사단이 주둔했다. 오스만 제국기에는 19세기 타르투스가 성정하기 전까지 일대의 중심 도시였고, 근대화의 물결에서 소외되어 옛 건물들이 잘 남아있다. 십자군 성채와 시리아 전통 가옥들이 어우러진 전원적인 풍경으로 유명하며, 화가 파테 무다레스[1]의 작품에 투영되어 있다.

2. 역사[편집]


페니키아 도시 소푸테 (𐤎‬𐤐𐤕‬𐤄)에서 기원하였다. 인근 텔 카젤은 아마르나 서신에 언급된 페니키아 도시 수무르로 밝혀졌다.

2.1. 십자군 전쟁[편집]


파일:샤텔블랑크.jpg
파일:샤텔 블랑.jpg
샤텔 블랑크 성채
성채 내부의 성 미카엘 예배당

트리폴리 백국 설립기에 레몽 드 생질은 템플기사단에게 타르투스 배후 산지의 사피타를 하사하였다. 당 시 템플기사단이 세운 샤텔 블랑크 (부르즈 사피타) 성채는 현재도 도시의 랜드마크로써 잘 보존되어 있다. 십자군기 타르투스와 크락 데 슈발리에를 잇는 거점이던 사피타는 1271년 후자와 함께 바이바르스에게 점령되었다.

2.2. 오스만 제국[편집]


이후 맘루크 왕조를 거쳐 오스만 제국기에 사피타는 트리폴리 산작 휘하의 나히예 (군)였다. 사피타 나히예는 타르투스, 쿨리이아 등 40개 마을을 관장하였다. 16세기 말부터 일대는 튀르크계인 사이파 가문이 지배했고, 남쪽 드루즈계 마안 가문의 대립에 있어 거점으로 활용했다. 1621년 유수프 사이파는 조카이자 파크르 앗 딘 2세의 동맹인 술레이만 파샤가 세금을 내지 않자 그의 거점인 사피타를 공격했다. 다만 1625년 유수프 사이파가 사망하자 파크르 앗 딘 2세는 북상하여 술라이만 파샤를 축출하고 일대를 장악하였다.

1635년 파크르 앗 딘 2세가 오스만 조정의 토벌로 전사한 후에는 현지 알라위 부족들이 일티잠 (징세권)을 얻었다. 1660년대에는 샴신의 아들 무함마드와 자이단 형제가 물타짐 (징세관)이었다. 징세의 범위는 농경지, 과실수, 소, 매, 벌꿀, 비단, 제분소, 혼례, 축제, 항해, 베두인-튀르크멘 유목민들의 월동 등이었다. 이러한 샴신 가문은 18세기까지 누사이르 산지 남부의 호족으로 군림했다.

2.3. 현대[편집]


20세기 중반 무렵 사피타는 성채 주변에 형성된 흰색-검은색 돌이 교차된 아블라크 무늬의 집들이 모인 마을이었고 그리스 정교회 기독교도 4300명과 알라위파 무슬림 1900명이 거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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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에서 전시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