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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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Marcus Porcius C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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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Marcus Porcius Cato [1]
출생
기원전 95년
로마 공화국 이탈리아 로마
사망
기원전 46년
카르타고 튀니지 우티카
배우자
아틸리아 (기원전 73년 / 기원전 63년 이혼)
마르키아 (?/ ?)
자녀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2], 포르키아
아버지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3]
어머니
리비아 드루사
친척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이부누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조카)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매체



1. 개요[편집]


로마 공화국의 군인이자 정치인. 이름이 같은 포에니 전쟁 때의 정치가 대 카토의 증손자로, 키케로와 함께 옵티마테스의 거두로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맞선 인물이다.


2. 생애[편집]


카토는 젊은 시절 당시 전형적인 귀족 젊은이처럼 대대장으로 경력을 시작하였는데 스파르타쿠스, 마케도니아 전쟁 등에서 휘하 대대를 지휘하면서 유능한 군인으로 병사들의 인기를 얻었다. 그 경력으로 재무관에 당선한 뒤 대담하게도 독재관 술라 치하의 밀고자들을[4] 탄핵하였다. 하지만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빽으로 인해 이러한 고발이 소용없게 되자 실망한 카토는 재무관을 사임하였다. 이러한 태도로 민중 사이에 유명해진 카토는 그 유명세 때문인지 호민관이 되기도 전에 원로원 의원으로 발탁되었고 그 뒤 얼마 안있어 호민관에 당선된다.[5]

호민관이자 원로원 의원이었던 카토는 카틸리나의 음모 때 집정관 키케로를 지지하여 카틸리나를 재판없이 처형하는데 일조하였고 그 와중에 카이사르가 그 음모에 연루되어있음을 주장하기도 하였다.[6][7] 그 뒤에는 옵티마테스의 일원이 되어 기존 체제를 흔드는 움직임을 여러차례 보여왔던 폼페이우스를 정치적으로 공격하였다. 훗날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동방에서 귀국한 뒤 개선식과 집정관 선거를 치르게 해줄 것을 요청하자 원로원을 움직여 양자택일을 강요하게 만들었다. 그 뒤 법무관을 지낸 뒤 총독으로 부임하여 지금의 포르투갈 지역을 제패한 성과를 거두고 귀국한 카이사르에게도 이러한 양자택일을 강요하였으며 그 결과 폼페이우스는 집정관직을 포기하고 개선식을, 카이사르는 개선식을 포기하고 집정관 출마를 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 이후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에 의한 삼두연합이 결성되고 카이사르가 집정관에 당선되는 일이 생긴다. 그 해에 법무관에 당선된 카토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퇴역병들을 위한 농지법을 내놓자 그걸 회의 때 장광설로 방해하는 등의 일을 벌였고, 훗날 폼페이우스가 원로원에 넘어온 이후 로마에 민중의 큰 지지를 받는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정적에게 죽임을 당하는 큰 소동이 벌어져 폼페이우스를 독재관으로 선출해야하는 상황이 되자 독재관을 주는 대신 단독 집정관을 주어야한다고 주장하여 관철시키는 등의 깐깐한 모습을 보였다.[8][9]

이러한 옵티마테스 쪽에서의 활약과 본인이 반대한 정책들 때문에 호민관 이후로 카토는 민중의 인기를 얻지 못하였고 집정관 선거에서 번번이 낙선하였다. 하지만 카토는 원로원 의원들의 신임을 받은데다 혼인으로 인맥을 쌓아두었으므로 정치적인 영향력은 여전히 발휘하였다.

스토아 철학을 신봉한 인물로 항상 검소하게 살았다.[10] 심지어는 부부관계에도 스토아 철학의 신조를 적용하여, 두번째 부인 마르키아와 금슬이 나쁘지 않았음에도 고령의 전직 집정관이자 유명한 연설가였던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가 혼인동맹을 요청하자 아내 마르키아와 이혼하고 호르텐시우스에게 후처로 보내는 일을 저질렀다. 6년 후 호르텐시우스가 사망하자 카토는 과부가 된 마르키아와 다시 재혼하여 아무 일도 없었다는 태도로 함께 살았다.

1차 삼두정치 당시 키케로와 함께 3두 정치가들에 대항하는 가장 큰 거물이었고, 공화정을 옹호하며 카이사르와 싸우는 선봉에 섰으며,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물밑 거래를 하지 못하도록 막아 결국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게 만든 원인이 된다. 내전 중에는 군단 지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곡창지대인 시칠리아를 지키는 후방임무를 맡았으나, 카이사르의 부하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에게 패배하고 시칠리아를 떠나 그리스에 있는 폼페이우스에게 합류했다. 그 후 로도스 섬으로 가서 로도스를 폼페이우스 편으로 포섭하는 임무를 수행한 후 폼페이우스군의 기지인 디라키움에서 대기하다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가 패배하고 이집트로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카토는 다른 옵티마테스 동료들과 함께 북아프리카를 거점으로 저항을 계속했으나[11]. 그 후 우티카 임시 총독으로 후방 지원을 맡았다가, 옵티마테스군이 탑수스 전투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남은 병사들도 저항을 거부하자 동료들과 함께 히스파니아로 후퇴하는 것을 거부하고 우티카 총독 관저에서 자살하였다. 당시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간청하던 장남과 친구들에게는 '카이사르가 분명히 관용을 베풀 것이니 카이사르에게 투항하라.'라고 권했지만 본인은 카이사르에게 관용을 입으면 카이사르가 나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게 된다.고 주장하며 투항을 거부하였고, 지인들을 초대해 만찬을 하며 지인들과 탑수스 전투에 대한 언급 한마디 없이 자유란 무엇인가에 대해 토론했다고 한다. 토론 당시 카토는 소크라테스를 예로 들며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은 죽어서도 자유롭다며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자살할 때 아무도 들이지 못하게 한 뒤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돈을 읽으면서 배를 스스로 찔렀다. 하지만 즉사하지 않았고 설마했던 가족들은 신음소리를 듣자마자 의사를 불렀다. 의사는 창자까지 찢어진 배를 어렵게 봉합했지만 카토는 치료를 거부한 뒤 배를 다시 절개하고 자신의 내장을 끄집어 내며 겨우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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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결하는 소 카토. 샤를 르 브룅 작, 1646년경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카이사르는 원로원파 결집의 신호탄이 될까봐 우려하여 자기 개선식에서 카토가 자신의 내장을 끄집어내는 모습을 그린 플래카드를 배포하여 카토의 죽음을 폄훼하였다.

키케로는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미안함 때문이었는지 생전 카토의 청렴함과 강직함을 찬양하는 '카토'라는 글을 써서 발표했고, 키케로의 문장력 덕분에 카토를 동정하는 여론이 늘어나게 되어 카이사르가 위협을 느낄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직접 안티 카토라는 제목으로 카토를 디스하는 글을 써서 발표해야 했을 정도였다.# 두 글 모두 현존하지 않으나 다른 문헌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카토를 '권력자에게 굴복해 자기 마누라도 내놓는 소인배 주제에 강직은 무슨!'이라고 매도했다고 한다.[12]

소 카토의 할복자살이 워낙 임팩트 있어서인지, 단테신곡에서 연옥의 섬을 지키는 수호자로 소 카토를 등장시킨다. 신곡에서는 자살자들이 모두 지옥에 가 있지만 소 카토만큼은 예외다.

당시 로마에 유행하던 그리스 문화 유행을 비꼬며 항상 라틴어를 쓴 것으로 유명하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와 함께 로마 문화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이다. 로마에서 '검소함'이 미덕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대체로 카토를 존경한 이들로 보면 된다. 또한 그리스식의 호화로운 요리에 로마인들이 빠지는 것을 싫어하여 로마 전통의 소박한 음식이었던 쐐기풀로 만든 수프를 즐겨 먹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벌해서 일약 로마의 대스타가 되자 어떻게든 카이사르를 축출하려고 발악했던 걸로도 유명하다. 이유는 증조할아버지와 같지만... 결국 실패했다. 아버지는 다르지만 같은 어머니를 둔 이부누이 세르빌리아는 카이사르의 애인이기도 해서 사적으로도 둘 사이는 별로 안 좋았던 듯하다.

이에 관련된 일화가 있는데 기원전 63년 카틸리나 반란 모의 사건당시 카토는 카이사르가 이 반란의 배후 중 하나라 주장하며 원로회에서 카이사르를 공격했다.[13] 한창 원로원들 앞에서 카이사르를 디스하던 와중에 카이사르의 전령이 들어와 그에게 밀서를 건넸는데 이 모습을 본 카토는 그 편지가 바로 내통의 증거라며 당장 편지의 내용을 공개하라 압박했고 카이사르는 개인적인 내용이 담긴 편지라며 이를 거부했다.

옳다꾸나 싶었던 카토는 더더욱 기세를 올려 당장 편지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으면 죄목을 인정하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열을 냈고, 이에 결국 카토의 말에 못 이긴 카이사르가 그 편지를 카토에게 건넸는데... 편지를 읽은 카토는 얼굴을 붉히며 "이 주정뱅이 같으니!"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편지를 카이사르에게 집어던졌다. 그 편지의 내용은 다름아닌 자신의 이부남매인 세르빌리아가 카이사르에게 보낸 연애편지였던 것.

참고로 누나인 세르빌리아[14]는 카이사르 암살자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어머니이다. 브루투스는 아버지를 일찍 잃었기 때문에[15] 삼촌인 카토의 막강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카토의 카이사르에 대한 반감은 브루투스에게 이어졌고 결국 카토가 죽고 2년 뒤인 기원전 44년에 그는 카이사르를 암살한다. 그러나 브루투스 역시 시대의 흐름을 막아내지 못하여 그리스에서 카이사르의 후계자들에게 패하여 죽는다. 카토의 아들 역시 필리피 전투에서 전사했다.

카토는 타협할 줄 모르는 완고한 태도와 그 특유의 열혈 파이터적 기질로 인해 주위의 미움을 많이 사 자주 고발당했는데 무려 44(!)번이나 고발당했다. 물론 전부 무죄방면되긴 했지만 카토는 44번이나 법정에 서서 스스로를 변호해야만 했다고 한다.


3. 평가[편집]


후세의 평가를 보면 계몽주의, 낭만주의 시대에는 카이사르와 끝까지 맞서면서 공화정을 부르짖었다는 이유로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함께 독재자에 맞서 목숨을 버리며 공화주의를 지키려 한 투사로 여긴 유럽 지식인들에게 매우 높이 평가받았다.

하지만 19세기 이후 역사학이 발달하면서 소 카토가 그렇게 찬양받을 인물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의 공화정은 민중(평민)의 정부 즉 민주공화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귀족들을 위한 정부였기 때문이다. 즉 로마 공화국공화정이긴 하지만 민주정은 아닌 귀족공화정 내지는 과두정이었다.[16][17] 따라서 원로원 체제 이래 공화정의 정부가 해온 일은 '귀족 권익을 지키기 위한 민중 탄압'으로 요약된다. 이를 개혁하고 원로원과 귀족들이 독점하였던 대토지를 민간에게 나눠주려고 한 것이 그라쿠스 형제였으나[18], 이러한 시도를 원로원은 형인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대낮에 스키피오를 대표로 내세우고 의원들이 직접 달려들어 패싸움 끝에 살해하고,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원로원 최종권고[19]를 발동하여 그 지지자 3000명과 함께 처형시키는 걸로 답하였다.

이후에도 이러한 원로원의 초법적 조치와 기득권을 지키려는 폭력적인 술수는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그 중에서도 카토는 위의 언급된 필리버스터 등을 통하여 원로원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첫 호민관 당선 이후로 다시는 선거에서 당선될 수 없었던 것이며, 그런 그를 원로원 의원들이 지지하던 것도 이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귀족 중심의 원로원과 정면으로 대립하면서 민중과 퇴역병들을 위한 법을 제정하겠다고 몸소 나선 사람이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였으니, 당시 로마 시민들 입장에서는 카토키케로로 대표되는 원로원 세력이 구시대적 기득권층으로 비춰졌고, 그들에 맞선 카이사르를 영웅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4. 매체[편집]


드라마 로마에서도 타협을 모르는 깐깐한 성격으로 나와 배경지식 없이 드라마에 표현되는 모습만 보면 악역처럼 보이기도 한다. 검소한 복장을 입었다는게 반영된데다 색도 검은색이어서 흰 옷을 입은 다른 원로원 의원들보다 튀어보이며 키케로, 카이사르보다 어린 인물임에도 너무 늙게 묘사되었다. 그리스에서 카이사르와 대치하던 폼페이우스가 지구전을 펼치려 할 때 영광의 승리 운운하며 정면승부를 요구해 패전의 원인 제공을 했으며 이후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함께 북아프리카로 가서 카이사르와 대적하지만 끝내 패하고 이후의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뒷간에 간다는 핑계로 자리를 떠나 단검으로 자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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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같은 이름의 증조부와의 구별을 위해 소 카토(Cato Minor, Cato the younger)로 칭하는 일이 많다. 후대에 붙은 별명은 Cato Uticensis로, 우티카의 카토라는 뜻이다. 소 카토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곳이 당시 아프리카 속주의 주도였던 우티카였기 때문이다.[2] 아들과 같은 이름이다[3] 아버지와 같은 이름이다.[4] 당시 술라 치하에서는 살생부를 작성하여 유력 정치가들을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나눠가지는 상황이었다. 이때 이 정치가들의 약점을 찾아내 밀고하는 역할을 하는 자들을 밀고자라고 불렸는데 이런 자들을 카토가 탄핵한 것이었다.[5] 증조부가 대 카토고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원로원파의 거두인데 어떻게 호민관이 될 수 있지 싶은데, 영어 위키백과 Porcia Gens(포르키아 씨족)에 원래부터 귀족이 아니라 원래는 평민(plebeian) 출신이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래서 호민관도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6] 카이사르는 카틸리나를 재판없이 처형하는데 반대했다.[7] 만약 연관되었다는 증거가 있었다면 카이사르 역시 탄핵되었을 것이고 실제로 카토와 키케로도 벼르고 있었겠지만 증거가 전혀 없어서 결국 실현되지는 못했다.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게 카틸리나가 실제로 무슨 음모를 꾸몄다기보다는 그냥 홧김에 계획을 세운 것 뿐이고 그나마 뭔가 하기도 전에 키케로가 발한 원로원 최종권고를 통한 불법적인 진압으로 인해 뭔가 해보기도 전에 참살당했기 때문. 물론 카틸리나와 카이사르는 인맥이 있다는 말도 없었고 카이사르도 카틸리나 그 자체를 변호한 게 아니라 재판도 받지 않고 로마인을 죽여도 되냐고 항변한 것이기 때문.[8] 사실 이건 로마에서 불법이었다. 옵티무스들은 공화정을 지킨다고 했지만 정작 그 공화정을 지켜야 할 옵티무스들이 더 공화국의 법을 어기는 아이러니를 보였다.[9] 거기다 정작 독재자를 암살하고 공화정을 지키겠다던 브루투스도 일생 동안 돈을 빼돌려 횡령했던 일도 있었고, 오히려 독재자라고 비판받던 카이사르가 공화정의 주체인 시민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원로원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등 역사의 아이러니함과 공화정의 모순점을 보여주었다. 사실 카이사르는 뼛속까지 민중파였고 죽을 때까지 자기 신념에 따라 행동했으며 로마법을 어긴 적도 사실상 원로원의 핍박에 못 견디고 루비콘 강을 건넜을 때가 유일했다. 말과 행동이 모순되었던 쪽도 로마법을 어긴 쪽도 대부분 공화파 의원들이다.[10] 그런데 정작 카토 본인은 금욕주의를 주장했으면서 술을 매우 좋아하여 거의 입에 술을 달고 산 애주가였다. 그래서 미국의 역사소설 클레오파트라에서는 이를 두고 "금욕적인 술고래 카토라니, 웃기지 않는가?"라고 비아냥거리는 대목이 나온다...[11] 이 때 수송선의 부족으로 자기 휘하 병력들과 상륙 지점에서 수백 킬로미터를 행군하여 이동해야 했는데, 군사적 재능은 없었지만 솔선수범하는 모습에 병사들이 불만 없이 따라왔다고 한다.[12] 얼핏 졸렬하게 보이지만 당시에는 카이사르가 할 법한 이야기였는데, 카이사르는 젊었을 때 독재자 술라가 마누라를 쫒아내라고 명령했을 때 끝까지 불복하다 죽을 뻔한 적이 있다. 카이사르는 아무리 남의 마누라들을 넘보고 다녀도 자기 마누라는 칼같이 지키는 인간이었다.[13] 당시 마침 카틸리나를 카이사르가 변호하기도 했다. 키케로의 공박에 밀려 실패했지만. 덕분에 변호를 마치고 나오면서 엄청난 아유와 공격을 받아서 주변사람들이 그를 보호해야 했다고 한다.[14] 카토와는 아버지가 다른 누나였다. 세르빌리아는 카이피오와 리비아의 딸이다[15] 브루투스의 아버지는 집정관 레피두스(제2차 삼두일원의 아버지)와 함께 술라의 보수파에 반기를 들었으나 폼페이우스의 신속한 대처로 생포당하고 처형되었다.[16] 공화파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원로원파라는 게 더 정확한 명칭일 것이다.[17] 실권은 원로원이 가지고 있고 평민의 일부 권리를 로마법으로 보장해주는 합의를 본 것. 그들이 그렇게 칭송하는 로마법은 사실 원로원이 민회와 호민관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는 수단이었다. 이 관습을 어기다 살해된 인물이 그 유명한 그라쿠스 형제다.[18] 이 대토지는 어디까지나 로마의 공유지였고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이었다. 그리고 민간은 그냥 공짜로 땅을 얻게 된 것도 아니고 이들은 이 전리품을 얻기 위해, 그리고 로마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직접 창칼과 방패로 무장하고 나섰던 시민병이었다. 이들은 이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두고 나섰지만 정작 전쟁이 끝나고 나서 그들에게 남은 것은 황폐화한 농지와 파산 뿐이었다. 그렇다보니 그라쿠스 형제같은 자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들을 시작으로 민중파라 불리던 이들이 로마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계속 나오게 되었다.[19] 집정관이나 독재자에게 모든 권한을 양도하는 조치. 생사여탈권조차 포함되며 호민관의 신체침해불가권마저도 씹어버리는 말도 안 되는 권한이다. 현대의 계엄령과 비슷해 보이지만 계엄령은 엄연히 긴급한 사태가 벌어졌을 경우 법률을 근거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당연히 의회에서 나서서 계엄령 중 법률에 위반된 사항이 없는지 조사하게 되어 있다.) 초법적인 조치인 원로원 최종권고와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