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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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경주 손씨[1]
출생
1869년 12월 14일
경상도 경주부 강동면 오금리
(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오금리)
사망
1935년 12월 28일[2]
경상남도 울산군 범서면 입암리
(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입암리)
상훈
건국포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손진형은 그의 첫째 남동생이며, 손후익·손학익 형제는 각각 그의 장남과 셋째 아들이다.

2. 생애[편집]


1869년 12월 14일 경상도 경주부 강동면 오금리(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오금리)에서 아버지 손최수(孫最秀, 1851 ~ 1918. 2. 1)와 어머니 순천 박씨 박한현(朴漢鉉)[3]의 딸 사이의 5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5년 경상남도 울산군 범서면 입암리(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입암리)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그의 장남 손후익은 차녀 손응교를 김창숙의 차남 김찬기(金燦基)에 시집보내 사돈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1926년 김창숙이 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비밀리에 조선으로 와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김창숙은 내몽고 지역의 미개간지와 황무지 6억 평을 매입하여 이상촌을 건설한 뒤, 만주 지역의 조선인들을 집결시켜 개간사업을 진행하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10년 간의 실력양성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때 손진인은 김창숙에게 군자금을 비롯한 물심양면으로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김창숙이 교통사고로 부상당했을 때에는 보호하면서 정성껏 간호하는 한편, 경주군 지방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의 책임을 맡아 활동했다.

그러나 이 일이 1927년 발각됨으로써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고초를 겪다가 그해 1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의 예심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정치에 관한 죄 처벌에 관한 건, 치안유지법 위반,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해 면소 판결을 받고 출옥하였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다가 1935년 12월 28일 별세하였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그런데 일가가 살던 울산 울주군 입암마을은 독립운동가 8명을 배출해 ‘독립운동가 마을’로 알려졌지만 입암리 일원 183만4000㎡가 국토교통부 공공택지지구로 공식 지정돼 마을이 없어지게 됐다. 그의 아들 손후익, 같은 한주학파 이우락, 옆집 이관술 등 독립운동가의 생가는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었지만 이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됐다.이보람&조희연, “독립운동가 8명 배출했는데… 개발에 밀려 흔적 사라질 판”

울산MBC 울트라에서 개발에 밀려 입암마을의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이 사라질 위기라는 문제의식에서 이관술, 손후익을 중심으로 입암마을 독립운동가들을 다루었다. 손진인은 스쳐지나가지만 아들 손후익이 꽤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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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낙선당파 20세 진(晋) 항렬. 족보명은 손진수(孫晋洙).[2] 음력 12월 3일.[3]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