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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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송재홍(宋在洪)
성명
송석수(宋奭洙)
생몰
1905년 4월 21일 ~ 1976년 11월 29일
출생지
경상남도 하동군 횡천면 남산리
사망지
경상남도 하동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송재홍은 1905년 4월 21일 경상남도 하동군 횡천면 남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중퇴하였다. 이후 강습소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하동청년회(河東靑年會) 등 사회단체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수행했다. 1927년 3월 25일 하동청년회가 주최하는 ‘혁신기념 강연회’에서 ‘모순’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고, 또 그해 7월 31일 하동청년회관 낙성 기념 웅변대회에서 ‘전환기에 있는 청년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웅변을 하기도 하였다.

1927년 일본 도쿄로 유학간 그는 보통영어학교를 다녔고, 1928년 3월 재일본조선청년동맹 동경지부 상임위원, 정치문화부장에 선임되었다. 1928년 5월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일본부(日本部) 동경구(東京區) 목흑(目黑)야체이카에 소속되었고, 그해 6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일본총국(日本總局) 서남야체이카 책임자가 되었다.

1928년 8월 29일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병탄한 날을 앞두고 대대적인 선전운동을 벌이고자 하였다. 송재홍 등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회원들은 표면단체인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在日本朝鮮勞動總同盟)·신간회 동경지회,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 등을 지도하여 반일 시위운동에 참여시키기로 하였다. 경술국치일인 8월 29일 오후 9시경 도쿄 사곡구 신숙 소재 무장옥(武藏屋)백화점 옆에서 한국인 약 150명이 모여 도로로 나아가 혁명가를 고창하고 대중적 시위운동을 벌여 일제경찰에 검거되었다.

이후 그는 1928년 11월 초순 36명의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관계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검사국에 기소되었고, 이중 30명의 동지와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동경지반재판소에서 예심을 받았다. 이때 그는 1930년 12월 6일 공판 심리 중에 “그런 것은 듣고 싶지 않다”라고 큰 소리 내어 재판장으로부터 퇴정 명령을 받았다. 그 후 1932년 8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을 받고 공소했지만 기각되었고, 1933년 9월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하동군으로 돌아가 은거했고, 1976년 11월 2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송재홍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