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이나 에쓰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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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나 에쓰사부로의 역임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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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87·88대 외무대신
일본국 제27-34대 중의원 의원
시이나 에쓰사부로
椎名 悦三郎 | Shiina Etsusaburo


파일:시이나 에쓰사부로.jpg

출생
1898년 1월 16일
이와테현 이사와군 미즈사와정
사망
1979년 9월 30일 (향년 81세)
학력
킨조 중학교 (졸업)
제2고등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법학과 / 학사)
가족
차남 시이나 모토오[1], 삼촌 고토 신페이[2]
정당


의원 선수
8 (중)
의원 대수
27, 28, 29, 30, 31, 32, 33, 34
지역구
舊 이와테 2구
악력
자유민주당 부총재, 총무회장, 정무조사회장
중의원 의원 (제27-34대 / 舊 이와테현 제2구)
내각관방장관 (제2차 기시 개조 내각)
통상산업 대신 (제2차 이케다 내각), (제2차 사토 1차 개조 내각)
제87-88대 외무대신
(제3차 이케다 개조 내각) - (제2차 사토 제2차 개조 내각)

1. 개요
2. 생애
2.1. 정계 입문 이전
2.2. 정치 경력
2.3. 외무대신 시절
2.4. 자민당 부총재 시절과 시이나 재정
2.5. 사망
3. 소속 정당
4. 선거 이력



1. 개요[편집]


일본의 정치인. 시이나가에 양자로 입적하기 전 이름은 고토 에츠사부로 (後藤 悦三郎)였으며, 대한민국에서는 일본국 외무대신으로서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2. 생애[편집]



2.1. 정계 입문 이전[편집]


1898년 이와테현 이사와군에서 고토(後藤)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고토 히로시는 고토가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초등학교 교사, 미즈사와군 촌장직을 역임했고 이와테현 현의원을 10년간 맡았다. 시이나의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했기 때문에 유년시절을 꽤 빈곤하게 보내야했고, 당초 에츠사부로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할 계획이였고, 고등소학교 4년차에 상경해 골동품점에 거주하고 일하면서 야학을 다녔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두고 같은 이와테 출신의 선배의 하숙처에서 생활했다.

이후 아버지의 소개로 이웃마을 가네가사키정의 대의사 시가 와타리(志賀和多利, 1874~1945)의 서생[3]으로 일하게 되었고, 이후 도쿄 치요다구의 킨죠중학교 편입시험에 합격해 3년간 재적하였고, 졸업 이후 경제 사정이 나아진 이와테현의 본가로 돌아왔다. 그뒤 제2고등학교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법학과에 입학하게 되었고, 동시에 만철 초대 총재를 지낸 고토 신페이의 누나의 본가인 시이나가에 양자로 들어가며 이름도 고토 에츠사부로에서 시이나 에츠사부로로 바꾸게 된다.

도쿄 제국대학 재학 중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였으며, 졸업 이후인 1923년 농상무성(현 농림수산성)에 들어갔고, 농상무성이 농림성과 상공성으로 분리된 뒤에는 상공성(현 경제산업성)으로 자리를 옮겨 기시 노부스케 아래에서 만주국 통제 과장, 산업부 광공사장을 지냈다.

1939년 일본으로 귀국한 에츠사부로는 상공성 총무국장 신분으로 당시 군부가 장악하고 있던 기획원에서 기시 노부스케와 함께 전시경제통제를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43년 군수성이 신설되자 군수성 총동원 국장과 육군 사정장관, 총동원국장을 역임했고 1945년 종전과 함께 직위에서 물러났다. 1947년 그의 상관이었던 기시 노부스케가 A급 전범 용의자로써 수감되었고, 그 밑에서 일을 했던 에츠사부로는 공직추방 명령을 받게된다. 그 뒤로 고향으로 내려와 모리오카시에 섬유공업 회사의 대표이사로 취임하지만, 극심한 경영난으로 인해 1952년 회사가 도산하고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2.2. 정치 경력[편집]


1951년 공직추방이 해제된 시이나는 종전 직후 부터 생각하고 있던 정계 진출 시도를 하게 되고, 1953년 치러진 제26회 중의원 선거에서 이와테현 2구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나 전체 6위로 낙선했다. 당초 그는 자유당의 간사장을 지내고 있던 기시 노부스케의 동생 사토 에이사쿠를 찾아가 입당 및 지역구 공천을 논의했으나 승낙되지 않자 자유당 선거 대책 위원장이었던 오자와 사에키[4]를 찾아갔으나, 공교롭게도 오자와는 시이나가 출마하려 했던 이와테 2구의 중진 의원이었고, 결국 공천이 거절되자 무소속으로 도전했지만 참패했다.

2년 뒤인 1955년, 일본민주당의 간사장이 된 기시 노부스케의 초청으로 일본민주당 후보로 다시 입후보하였고, 기시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당선되었다.

기시 내각에선 경리국장과 내각관방장관을 지냈으며, 이케다 내각에선 자민당 정무 조사회장, 통상산업대신을 거쳐 1964년 외무대신에 올랐다.

2.3. 외무대신 시절[편집]


사토 내각에서도 외무대신을 지내면서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일본측 대표로서 대한민국과 교섭하였고, 1965년 2월 18일, 방한하였다. 한일 협상 자체는 시이나가 정계에 입문 하기 전인 1951년부터 논의되어 왔던 것이고 독도 영유권 문제, 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나 청구권 문제, 어업 문제는 양국에서 별 문제삼지 않는 조건으로 합의하고 있었다. 시이나는 한일기본조약 협상을 위해 한국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였을때 일본의 과거에 대해 깊이 반성한다고 발언하며 매스미디어를 통해 한국 여론의 진정에 기여했으나, 사회당 등 야당의 반대와 한국에서의 산발적인 시위가 잇따랐고,[5] 양국의 야당, 신문, 학생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에 앞서 시이나에 대해 정확한 목적을 설명하지 않고 방한한것에 대해 일본 헌법 73조 위반에 해당한다는 불신임 결의안이 일본사회당일본공산당을 중심으로 제출되었으나, 귀국 이후 해당 결의안은 부결되었다.

1966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외무대신으로는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하여 5년 무역 협정과 민간 항공 협정을 협상하였다.

외무대신에서 물러난 1974년, 김대중 납치 사건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으로 한일관계가 다시 험악해지자 그해 9월 시이나는 다나카 총리의 요청에 따라 방한하여 이 문제를 진정시키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시이나는 박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에 대해 사과하고 사건 재발 방지책, 한국 수사 협력, 조총련의 반한 활동 단속 등을 약속하는 다나카의 서한을 박정희와 대한민국 정부에게 전달했다. 이 회담으로 한일 관계의 악화는 수습되어 한국 내 반일 시위는 종식되었다.

이 외에도 자민당 부총재 시절인 1973년 중일 국교정상화를 위해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는 시이나를 정부 특사로 임명해 대만에 대한 이해를 구하기 위해 파견시켰다.

시이나는 중화민국 민의대표와의 좌담회에서 대만과의 외교관계를 포함한 모든 관계를 유지한 뒤 중일 정상화 협상을 진행해야 한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밝혔으나, 당시 일본 외무대신인 오히라 마사요시는 대만과의 관계가 그대로 유지돼야 한다는 시이나의 뜻과 상관 없이 일본-중화민국 조약 파기와 대만-일본 국교 단절을 선언했다.

2.4. 자민당 부총재 시절과 시이나 재정[편집]


1966년 자민당 총무회장에 오른 시이나는 사토 개조 내각에서 통상상에 취임했고, 1970년 가와시마 쇼지로 부총재가 급사하자 가와시마 휘하의 의원들의 추천을 받아 기존 가와시마파(교우클럽)를 흡수해, 가와시마파가 시이나파로 확장 되면서 세를 불려 나갔다.

1972년 4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다나카 가쿠에이후쿠다 다케오를 누르고 자민당 총재에 선출되었고, 이듬해 8월, 시이나는 다나카에 의해 자민당 부총재로 기용되었다.

그러나 다나카 내각은 경제 정책의 실패와 록히드 사건 스캔들 문제의 책임을 지고 1974년 사퇴를 표명하였으며, 다나카 가쿠에이의 후계를 둘러싸고 시이나는 대파벌의 우두머리인 오히라 마사요시와 후쿠다 다케오를 배제하고, 당내 중도 파벌에 속한 미키 다케오를 새총재로 선출하였는데, 이를 시이나 재정(椎名裁定) 이라고 한다.

시이나가 미키를 총재를 선임한 이유는 우선 시이나가 당내 개혁론자이기도 했으며, 당시 당내 요직으로 분류되는 간사장, 총무회장, 정조회장을 각각 다나카파의 니카이도 스스무, 오히라파의 스즈키 젠코, 나카소네파의 야마나카 사다노리 등 거대 파벌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던 와중에 부총재 자리만 소수 파벌인 시이나파의 영수인 시이나 본인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6]

당 내 쟁쟁한 인사들을 제치고 얼떨결에 자신이 총재로 선출된는 미키는 청천벽력이라고 중얼거렸으며, 언론들도 시이나가 총재직에 관심을 보이려는것 아니나는 것을 문제삼아 일제히 그를 비판했다.

사실 이에 관한 뒷이야기가 있는데, 다나카는 시이나에게 잠시 당권을 맡기고, 오히라를 바지사장으로 내세운뒤 자신의 스캔들 의혹을 풀고 총재직에 복귀할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시이나는 오히라를 설득하는데 총력을 다했는데 오히라가 뜻을 접지 않고 오히려 기자들에게 시이나가 총재직에 관심을 보인다고 폭로해버렸던 것이다.

그러자 시이나는 다나카에게 "지금 국민들이 뿔나있는데 자꾸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라고 다나카를 거의 반협박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결국 다나카가 한발 물러선뒤 자민당 총재인 미키 다케오가 예상대로 총리직에 선출되게 된다.

시이나는 미키 내각에서도 부총재로 있었으나 위 사건으로 인해 본인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고, 후쿠다 내각이 들어서면서 부총재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1979년 제35회 중원선에는 출마하지 않고 차남 모토오에게 지역구를 넘겨줌과 동시에 정계에서 은퇴했다.


2.5. 사망[편집]


자신의 마지막 국회의원 임기를 마친 시이나는 지병으로 인해 입원치료를 받았고 1979년 9월 30일, 향년 81세의 나이로 도쿄 신주쿠구 게이오기주쿠대학 부속병원에서 작고하였다.

3.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1955
입당
정계 입문


1955 - 1979
합당[7]
정계 은퇴
사망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3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와테 2구

[[무소속|
무소속
]]

12,823 (4.7%)
낙선 (6위)

1955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37,947 (13.5%)
당선 (4위)
초선
1958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40,531 (14.6%)
재선
1960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48,318 (17.2%)
3선
1963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8,568 (20.4%)
당선 (2위)
4선
1967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8,652 (19.7%)
5선
1969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2,268 (18.1%)
당선 (3위)
6선
1972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1,556 (202.6%)
당선 (1위)
7선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9,149 (18.2%)
당선 (4위)
8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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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30~2007, 중의원(4선), 참의원(재선) 역임[2] 1857~1929, 체신대신, 내무대신, 외무대신, 내각 철도원 총재직 역임[3] 다른 사람의 집에 하숙해 가사와 잡무를 도우면서 공부나 하적을 하는 젊은이. 주로 일본 근대시절에 성행했다.[4] 오자와 이치로의 부친이다.[5] 이 당시 반대시위를 이끌었던 사람 중 한명이 이명박 전 대통령이다.[6] 시이나는 11월 30일 파벌 회장들과의 간담회에서 시이나는 파벌을 초월한 각료 인사를 단행할 것, 총재를 배출한 파벌에서 간사장을 맡지 않을 것(총간분리), 당의 정책 입안 기능을 강화할 것 등의 합의를 이끌어냈고, 그 다음날 재정문을 발표하면서 "저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신께 기도드리는 마음으로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총재는 청렴할 것은 물론이고 당의 체질 개선과 근대화에 몰두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국민은 우리 당이 파벌 항쟁을 끝내기를 기대하고 근대 정당으로 탈피하기 위한 연찬과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열정을 가진 사람을 바라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와 같은 인식에서 저는 새로운 총재로 정계의 장로인 미키 다케오 군이 가장 적임자라고 확신하여 이에 천거합니다." 라며 사실상 미키를 지지하였다.[7] 자유당과의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