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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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전기의 문신. 는 개지(漑之). 는 이요정(二樂亭)·송계(松溪)·수옹(睡翁). 시호는 문경(文景). 본관은 고령(高靈).


2. 생애[편집]


신용개(申用漑)는 1463년(세조 9) 9월 24일에 태어났으며, 영의정을 지낸 보한재 신숙주의 손자이다. 신용개의 아버지는 함길도관찰사를 지낸 신면, 어머니는 정호(丁湖)의 딸이다. 예조참판을 지낸 신종호, 좌찬성을 지낸 신광한은 사촌이다.

신용개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83년(성종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1488년(성종 19) 문과에 급제하였다. 처음에는 승문원권지에 등용되었다가 홍문관 정자, 수찬, 이조좌랑, 사헌부 지평, 이조정랑, 의정부 검상(檢詳)을 거쳐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다.

항상 신용개는 부친인 신면이 이시애의 난으로 전사한 것을 원통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신용개는 일찍이 본인을 북방으로 보내주면 선친을 죽게 한 원수를 갚겠다고 몇 번이나 상소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끝내 이 상소를 들어 주지 않았다. 그런데 1497년(연산 3) 마침 그 원수가 장안에 들어와 어디에 있다는 것을 염탐꾼을 통해 알아낸 신용개는 밤에 그 원수를 길에서 활로 쏘아 죽이고 모친에게 고한 다음 관에 자수했는데, 조정에서는 불문에 부쳤다.

이듬해 무오사화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한때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어 홍문관 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다. 연산군이 평소 신용개의 강직한 뜻을 심히 마땅치 않게 여겨 1502년(연산 8) 가을에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형조참판에 제수되고 이내 예조참판이 되어 1504년(연산 10)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되고 전라도 영광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 후 형조참판으로 서용되었으며, 이어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가을에 성희안(成希顔)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고명(誥命)을 받아온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그 뒤 우참찬과 대사헌을 거쳐서 이조·병조·예조·공조의 판서를 역임,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우찬성이 되었다.

1516년(중종 11) 여름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으로 승진하고, 1518년(중종 13) 좌의정에 이르렀다. 기품이 높고 총명하여 문명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활쏘기 등 무예에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하였다. 인품 또한 꿋꿋하여 범하지 못할 점이 있어 당시 선비들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519년(중종 14) 10월 3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저서로는 이요정집(二樂亭集)이 있고, 편서로 속동문선(續東文選),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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