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불 하산 알리 빈 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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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어 أبو الحسن علي
영어 Abu'l-Hasan Ali

재위 1464년 3월 ~ 1482년, 1483년 ~ 1485년
생애 1436년 ~ 1485년 10월

1. 개요[편집]


그라나다 나스르 왕조의 21대 군주로, 본명은 아불 하산 알리이나 당대에는 '물라이 아부 하산' (물레이 하센)으로 더 알려져 있었다. 나스르 왕조 말엽의 대표적인 군주로, 그의 치세에 그라나다의 멸망의 단초가 되는 마지막 전쟁과 내전이 시작되었다. 비록 첫 치세에는 그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었지만, 1482년부터 부인 및 장남 무함마드 12세와 내전을 벌이며 방어선은 조금씩 무너지게 되었다. 1485년 건강이 악화된 알리가 은퇴하자 동생 무함마드 13세가 계승했으나, 얼마 안가 무함마드 12세가 복위하여 그라나다 최후의 술탄이 되었다.

2. 즉위 전[편집]


아부 나스르 사드의 아들로, 비록 장남은 아니었지만 총애를 받았다. 사드는 재종손 무함마드 10세와의 내전에 있어 군사적 지원을 받기 위해 카스티야 국왕 엔히크 4세에 복속하였고, 그 징표로 알리를 인질로 보내었다. 따라서 알리는 청년기를 카스티야 궁정에서 보내며 스페인어를 습득하였고, 엔히크 4세가 카스티야 군과 함께 개입하자 그와 술탄 간의 통역을 맡으며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1454년에는 패퇴한 무함마드 10세를 사로잡아 처형하였고, 그 대가로 1458년 알메리아 총독으로 봉해졌다. 1462년 사드는 아벤세라즈 일족과 대립하며 그들이 추대한 유수프 5세와 내전을 벌였고, 그 틈에 카스티야 군이 침공하여 지브롤터와 아르히도나를 장악하였다. 부왕이 무능하다 여긴 알리는 1464년 봄, 정변을 일으켜 사드를 말라가에 유폐하고 자신이 술탄이 되었다.

3. 즉위 후[편집]


부왕의 휘하에서 군사령관 및 통역관으로 활약하던 알리는 1464년 봄, 부왕과 대립하던 아벤세라즈 (바누 사라즈)와 동맹하여 그를 폐위한 후 즉위하였다. 정권 교체를 틈타 엔히크 4세는 사드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재차 그라나다를 침공하였으나, 곧 카스티야 내부의 문제로 회군하며 휴전이 성사되었다. 1465년 8월 사드가 사망하였으나 알리에 대한 반발은 여전하였다. 1468년 엔히크 4세의 사주를 받아 말라가와 알퀴르조테 등지에서 반란이 벌어졌고, 1473년에야 진압되었다. 그 후에야 알리는 새 주화를 발행하는 등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본래 7촌인 아이샤와 결혼하여 아들 무함마드(미래의 무함마드 12세)를 얻은 알리는 기독교도 귀족 가문의 노예 이사벨라 데 솔리스에 반하여 그녀가 개종하자 소라야 (조라이다 / ثريا)란 이름을 주고 총애하였다. 그녀가 두 아들을 낳자 알리는 결혼식까지 올리고 본처와 장남 무함마드를 멀리 하였다. (1474년) 이는 후일 분쟁의 단초가 되었다. 한편 1474년 엔히크 4세가 사망한 후 그의 여동생 이사벨라 1세는 포르투갈 왕비인 조카 후아나와 카스티야 계승 전쟁을 벌였다. 따라서 카스티야와 그라나다 간의 휴전은 1477년 알리가 카스티야에 대한 조공을 중단했음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3.1. 그라나다 멸망전의 시작[편집]


파일:그라나다국.png
자하라 수복과 알하마 상실, 수복 시도, 로하 방어, 루세나 전투

하지만 1479년 내전이 끝나자, 곧 카스티야와 침공할 것이라 여긴 알리는 선제 공격을 통해 기선을 잡기로 결정하였다. 1481년 12월, 알리는 (1407년에 빼앗긴) 서부의 요충지 자하라 델라 시에라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삼았다. 반격에 나선 이사벨라는 1482년 2월, 그라나다 서남쪽의 알하마[1]를 점령하여 그라나다 국을 사실상 양분하였다. 이듬달 알리는 그곳을 수복하려 했으나 페르난도 2세에 격퇴되었다. 5월, 카스티야-아라곤 (스페인 왕국)의 군사령관이 된 페르난도가 같은해 여름 그라나다 서쪽의 로하를 공격하자 알리는 친히 나아가 격퇴하였다. 다만 로하 전투 도중 아이샤와 무함마드 모자가 정변을 일으켜 수도를 장악하였고, 알리는 동생 무함마드 (알 자갈)와 함께 말라가로 은퇴하였다.

말라가를 근거지로 삼아 알리는 론다, 타리파 방면을 습격하며 세력을 규합하였고 1483년 마침내 엘무녜카르에서 무함마드 12세를 격파하였다. 여론이 악화되자, 그해 4월 무함마드 12세는 명성 회복을 위해 코르도바 방면의 루세나를 공격했으나 카스티야 군에 패하여 로자 성주인 장인 이브라힘 알리아타르가 전사하고 자신은 철수 도중 낙마하여 포로가 되었다.[2] 이에 그라나다 귀족들은 재차 알리를 술탄에 추대하였는데,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역으로 무함마드 12세를 석방하여 재차 그라나다 내전을 일으켰다. 그에 맞서기 위해 알리는 같은해 10월 무함마드 12세가 불신자들과 결탁했다는 파트와 (종교 칙령)를 내렸다. 알리의 동생 알 자갈은 말라가 동쪽의 악사르퀴아에서 스페인 군을 격파하였다.

3.2. 퇴위와 죽음[편집]


양측의 내전이 벌어지는 동안 카스티야 군은 1484년 알로라, 알로자이나, 세테닐 등을 점령하였다. 한편 지속적인 스트레스의 결과 뇌전증을 얻은 알리는 점차 시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동생 무함마드 '엘자갈'에 군정을 맡겼다. 후자는 1485년 2월, 무함마드 12세의 동생에게서 알메리아를 회복하였다. 하지만 내전의 격화를 틈타 그해 봄 카스티야 군은 론다, 카르타마, 마르베야, 푸엔기롤라 등을 점령하며 사실상 말라가를 제외한 왕국 서부를 모두 정복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병석에 있던 알리를 대신하여 무함마드가 술탄으로 추대되었다. (무함마드 13세) 퇴위 후 알리는 소라야 및 그녀 소생의 두 아들과 함께 자신이 승전했던 알무녜카르로 은퇴했다가 같은해 10월 사망하여 알함브라 기슭의 왕실 묘원에 안장되었다.[3]

4. 기타[편집]


1492년 그라나다 멸망 후 소라야와 두 아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4]

여담으로 스페인의 최고봉인 물하센이 그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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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론다 및 말라가와 그라나다를 잇는 요충지[2] 이후 무함마드 12세는 포르쿠나의 한 성탑에 감금되었다. 당시 그가 입었던 옷은 현재까지 톨레도 군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3] 다만 1492년 그라나다 항복 후 그의 유해는 문드하르로 이장되었다[4] 두 아들들은 각각 사이르와 나이르에서 후안 데 그라다나와 페르난도 데 그라나다로 개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