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문제/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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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미리 알아두어야 할 점
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악이 존재한다
3. 신은 사랑이며 악은 사랑의 부재다. 그리고 사랑은 후계자를 원해서 시공간을 창조했다.
3.1. 이레네오(이레나이우스)의 신정론에 대한 비판의 해소
3.2. 기독교 신학의 난제들에 대한 해소
3.2.1. 구원 :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
3.2.2. 예정 : 칼빈웨슬리 논쟁(예지예정과 이중예정)
3.2.3. 천국 : 하나님 나라 논쟁
3.2.4. 삼위일체 : 아타나시우스아리우스 논쟁
3.2.5. 칭의 : 베자피스카토르 논쟁 (수동순종과 능동순종, 현재진행 이슈)



1. 개요[편집]


개신교의 교리에 근하여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들을 나열한다.


1.1. 미리 알아두어야 할 점[편집]


이 항목은 악의 문제를 바라보는 개신교의 신학적 관점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호신론적인 내용들은 태생적으로 해당 교리에서 요구하는 신앙에 의해 뒷받침되는 비합리적인 믿음들을 포함할 수 밖에 없다.


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악이 존재한다[편집]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


이 백성은, 나를 위하라고 내가 지은 백성이다. 그들이 나를 찬양할 것이다.

이사야 43장 21절


그런데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으로 내가 말해 본 것입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습니까? 다음과 같이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나의 거짓됨 때문에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면, 왜 나도 역시 여전히 죄인으로 판정을 받습니까?" 더욱이 "좋은 일이 생기게 하기 위하여, 악한 일을 하자"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그런 말을 한다고 비방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로마서 3장 5-8절


성경에 따르면 모든 천지 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그리고 인간과 천사는 타락할 가능성을 가지고 창조되었는데, 이것은 절대로 타락할 수 없는 기계 같은 존재에게 찬양을 받는 것보다 타락할 자유의지가 있는 존재에게 찬양을 받는 것이 더욱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1] 성경에 따르면 그 결과로 타락한 천사는 마귀가 되었고, 인간은 타락하여 대대로 죄의 본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서에 따르면 인간이 죄로 더럽혀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 수는 없는데,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으나) 죄인인 인간과 하나님이 대비되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나기 때문이고, 또한 하나님이 죄에 대한 심판을 내리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욥기 34장 12절


주님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주님의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의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에게서 얼굴을 돌리셔서, 너희의 말을 듣지 않으실 뿐이다. 너희의 손이 피로 더러워졌으며, 너희의 손가락이 죄악으로 더러워졌고, 너희의 입술이 거짓말을 하며, 너희의 혀가 악독한 말을 하기 때문이다.

이사야 59장 1-3절


만약 하나님이 죄에 대해 공의롭게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더럽혀지기에 하나님은 결코 공의를 굽히지 않으신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인간들의 각종 악행들을 그냥 지켜만 보는 것 역시, 그저 공의를 따라 죄인들이 죄로 인해 고통받도록 내버려 두는 것일 뿐이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3장 25절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하여,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모든 인간에게 억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지 않고, 오히려 각종 미혹과 죄의 유혹 등 구원에 방해가 되는 각종 악조건들을 허락하였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걸 감수하더라도[2] 악조건 속에서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영광을 받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억지로 믿어서 구원 받는 것보다 하나님에게 더 영광이 되기 때문이다. 당장 인간적인 관점으로만 봐도 다 큰 어른이 개미들 상대로 힘자랑 하는 것을 보면 한심해 보이는데, 하나님이 나약하기가 짝이 없는 인간들을 상대로 힘자랑 해서 억지로 자신을 찬양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영광이 될리가 없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간들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영광이 가장 잘 드러나는 방식으로 세상에 개입하고 계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죄를 짓고 지옥에 가는 것을 기뻐하시지는 않으나, 그것을 막는 것보다 더욱 상위에 있는 원칙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신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하나님의 영광이 잘 드러난다는 것은 인간의 관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천사들의 관점을 말한다.

다만 이 관점은 자기 과시를 위해 타인의 희생을 용인한다는 점에서 '신은 지선하다.'라는 두 번째 명제에 부합하지 않을 소지가 크다.


3. 신은 사랑이며 악은 사랑의 부재다. 그리고 사랑은 후계자를 원해서 시공간을 창조했다.[편집]


이것 역시 신의 존재를 상수로 두고 악의 문제를 해결하고자하는 호신론(護神論)적 해결책이다. 이 대답은, 일원적 개념의 부재로 악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이 설명은 '악은 선의 결핍일 뿐이다'와 일맥상통한다. 또한 '신은 악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처하지 않는다', '악도 필요하다'자유의지를 전제하고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악이 존재한다', '신도 악을 지녔지만 행하지 않는다' 까지도 포함시킬 수 있다. 이레네오의 신정론을 뒷받침하며 이에 대하여 기독교 신학과 철학에서 제기한 비판을 해소하고, 그동안 신학 건축자들의 버린돌이었던 예수가 전파한 이웃사랑을 이용하여, 반석인 야훼[3]의 말씀이 아닌 마치 모래와도 같은 인간의 사변적 논리에 기초한 아우구스티누스신정론과 신학자들이 지금까지 그 위에서 지어온 신학의 집을 무너뜨린다.

인간이 사랑이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추상적 개념의 실체적 실존적 그리고 인격적 존재로서의 야훼를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자. 이때 야훼의 관점에서 악은 실체가 아니고 사랑의 부재이다. 그리고 사랑의 부재는 죄 곧 야훼에 대한 반역과 동치이다.[4] 그런데, 야훼는 자신의 신적 영광을 상속할 후계자를 원하고 있다.

정경으로 인정된 성경[5]의 기록에 의하면, 삼위의 야훼 가운데 성자인 예수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1. 야훼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과 생각으로 말씀을 듣는/성경을 읽는) 자의 것이다.
  2. 절대자 야훼는 사랑이다.
  3. 사랑 가운데 최고의 사랑은 이웃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것이다.
  4. 절대자 야훼의 나라는 인간의 내부에 존재한다.
  5. 성자가 야훼의 계명을 지킴으로 야훼(사랑)의 내부에 거주하게 되었다
  6. 성자가 인간에게 전해주는 새 계명은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7. 인간은 성자의 계명을 지킴으로 성자의 사랑(야훼)의 내부에 거주할 수 있게 된다
  8. 삼위의 야훼 가운데 성령이 이 세상에 도착하는 날에는 성자가 야훼(사랑)속에, 너희가 성자속에 성자가 너희 속에 거주하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9. 야훼의 나라는 이미 너희의 내부에서 이루어졌다.
  10. 이웃을 미워하는 것은 이웃을 이미 살인한 것이다.
  11. 그리고 앞으로 인간은, 야훼의 양자가 된 자신의 이웃을 잡아 죽이면서[6] 이것이 야훼를 섬기는 법도[7]라고 주장할 것이다.
  12. 성자를 믿는 인간은 성자가 한 일(최고의 사랑인 이웃된 인간의 죄를 위한 자기 생명의 희생)을 자신도 할 것이며 이보다 더 큰 일(사랑)도 할 것이다.
(사도요한의 편지들에 기록된 동일한 진술들은 생략)

그리고 가장 많은 정경을 기록한 사도 바울의 정경 속 진술에 의하면,
  1. 삼위의 야훼 가운데 성령이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성부 야훼의 자녀인 것을 증거한다.
  2. 자녀이면 후계자이다.
  3. 고로 우리는 야훼의 후계자이며 성자 예수와 함께한 후계자이다.
  4. 우리가 성자 예수와 함께 자녀의 영광인 야훼의 상속을 얻기 위해서는 성자 예수와 함께 그의 고난(이웃을 위한 자기 희생)을 함께 받아야 한다.
  5. 이웃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희생하는 고난은 장차 올 야훼의 자녀로서 야훼의 영광을 상속하는 영광과 절대 비교할 수 없다.

사랑(신)이 인간에게 사랑의 부재(세상의 악/인간의 죄)를 허용했다. 만약 신이 사랑의 부재를 용납하지 않는다면, 곧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고 즉각적으로 모조리 심판해 버린다면, 인간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가? 창세기 3장에서 모든 인류는 멸망했을 것이다. 정말로 신이 완전한 사랑의 실체 그 자체라면, 신이 인간에게도 인간이 인간에게도 항상, 언제나,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사랑속에 충만해야만 신의 완벽한 기준을 충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세상에서는 신이 원하는 대로 악도 죄도 없을 것이다. 창세기가 묘사한 최초 에덴동산의 모습처럼. 그래서 마음속으로만 이웃을 미워한 사람이 신 앞에서는 이미 살인을 실행한 것과 동일하다. 신은 사랑 그 자체이다. 미움은 사랑의 부재, 곧 신에 대한 부정으로써 절대자에 대한 반역이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이웃을 미워하기만 하더라도 죽음이라는 신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티끌같이 작은 죄라고 할지도 완전하게 공의로운 야훼의 앞에서는 그 반역의 대가를 완전히 지불하지 않으면 그 죄는 야훼 앞에서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완전한 공의의 야훼는 이 세상을 불사르고 새로 만들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후계자 곧 이웃의 죄를 덮어주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최고의 사랑을 선택하는 존재를 얻기 위해서 무한히 참고있는 것이다. 신이 원하는 최고의 사랑이란 이웃의 죄를 덮어주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인데, 악과 죄가 없는 세상 곧 사랑으로 충만한 세상에서는 죄인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웃의 죄를 덮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세기에 기록된 노아의 방주 사건을 통해 신은 그것을 이미 한 번 실행해 보았다. 사도요한을 통하여 마지막 정경인 묵시록의 기록을 마치면서 야훼는 인간의 악과 죄에 대한 모든 심판을 역사의 종말 이후로 연기할 것을 선언한다.


3.1. 이레네오(이레나이우스)의 신정론에 대한 비판의 해소[편집]


이레네오는 최후까지 생존하여 마지막 정경인 묵시록을 기록한 사도요한의 손제자이다. 악의 문제에 대한 본 단락의 주장 또한 사도요한의 복음서에 주로 근거하고 있다. 이레네오의 신정론이 사도요한의 관점을 계승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레네오의 신정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비판이 제기된다.

  1. 성경이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는 인간의 타락과 영원한 지옥형벌의 교리를 부인한다.
  2. 목적으로 수단을 정당화 하기 때문에 정의롭지 못하다.

1)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다.

인간과 세상은 완전하게 창조된 것이 맞다. 그리고 아담의 선택에 의하여 전적으로 타락한 것도 맞다. 그러나 야훼는 여기서 인간에 의하여 어그러져 버린 세상을 청소하고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염되어버린 그 상태에서 완전했던 처음보다 오히려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보다 더 선한 방향, 곧 인간의 과오까지도 협력하여 더 큰 선을 이루는 방향인, 심판 후 재창조 대신 성자 예수의 피값으로써 이미 창조된 피조물들에게 심판을 면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와 여유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요,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을 자신의 양자로 받아들여서 성자 예수와 동등한 야훼의 영원한 신적 영광에 초대한 것이다. 그래서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며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모든 소유를 팔아서 알거지가 되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그 밭을 구입하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야훼의 선한 의도를 끝까지 거부한 자들은, 성경에서 언급하는 임금의 고귀한 혼인잔치를 거부한 귀인들과 동일하게, 야훼의 영광을 피조물에게 상속하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자신을 초대한 야훼를 모독하는 것이다. 따라서 야훼의 계획이 완성된 후에 이들은 종결이 없는 영원한 형벌에 처해진다. 이는 사도바울의 서신들에 명시되어 있다.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는 죄, 곧 예수가 말한 성령을 모독하는 죄 이다.

2)에 대한 답변은 이미 완결되었다

성경에는 이와 동일한 불만을 품고 대담하게 야훼에게 직접 항의한 선지자가 있다. 바로 하박국. 이에 대하여 야훼는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 지니라!

그리고 결론에서 진술하는 하박국의 기록을 보면, 자유의지로써 극한의 고통을 따르는 야훼의 길을 선택하는 그의 후계자들에게는 궁핍과 배고픔도, 살점을 도려내는 잔인한 육체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모두 완전히 뒤집고서 야훼를 찬송하며 춤추게 만드는 기쁨이 그 안에 가득넘칠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신약의 성자 예수는 이에대하여 나를 따라 이웃의 죄를 덮어주기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좁은길을 따라오면 반대로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야훼가 택한 하나님의 아들들만이 믿을 수 있게 된다. 예수를 따라 죽으면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단 하나 성자의 약속을 믿고, 오직 하나뿐인 생명을 가지고서 그 명령을 실행해야 하므로.

그래도 야훼의 처분에 불만을 품은 자들에 대한 예수의 설명이 신약에 등장한다. 바로 달란트 비유의 악하고 게으른 종. 종들을 향한 임금의 선하고 큰 뜻을 자기 마음대로 엄하고 무서운 것으로 단정하고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이 종은 영원한 형별에 처해진다.


3.2. 기독교 신학의 난제들에 대한 해소[편집]



3.2.1. 구원 :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편집]


펠라기우스는 복음화된 로마에서, 한 번 받은 구원은 불변이라는 기독교 구원관의 영향으로 도덕이 극도로 타락한 사회상을 목격한다. 이에 야훼는 인간에게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을 부여했으므로 인간의 구원은 지속적인 도덕적 실천과 노력으로써 획득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 기독교계의 치열했던 논쟁인 자유의지와 선택의 대립은 다음과 같이 해소된다.

신학자들은 구약에서 야훼가 유대인을 선택한 의도에 대하여, 구약시대에는 택함받은 유대인들이 택함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야훼에게 연결해주는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하기 원했다고 설명한다. 신약시대에도 이 구도가 동일하게 적용된다. 예수는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알곡들이 혼인잔치에 초대받지 못했던 가라지들을 야훼의 대제사장인 그리스도에게 연결해 주는 제사장의 역할을 기대한다. 그래서 신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왕같은 제사장[8]이라고 선언한다.

사도바울은 양자로 선택된 야훼의 택하신 자녀가 이웃의 죄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지불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도달하면, 상속자의 조건을 충족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야훼의 선택된 자녀가 야훼의 택함을 받지 못한 염소의 죄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지불하는 사랑을 실천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야훼의 율법을 충족하는 유일한 의인인 성자 예수에 의하여 모든 죄가 씼겨진 야훼의 선택받은 양자 곧 의인이 염소의 죄값을 대신하여 지불했으므로 모세의 율법에 근거하면 염소의 죄는 야훼 앞에서 사라져야 한다.[9] 아마도 이 경우는 다음과 같은 경우로 추정된다.

예수가 진짜 내 죄를 위해서 죽었는지는 아직 믿어지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인 너를 보니 너 때문에 내 삶을 죄에서 돌이키고 야훼를 믿겠어!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없는 것을 도우소서!

현실의 실제 사례를 살펴보면, 칼빈주의의 주장과 같이 예수의 복음을 듣자마자 곧바로 믿어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웨슬리안의 주장과 같이 처음에는 전혀 믿어지지 않았지만 믿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지가 강렬하여 계속해서 붙든 결과 나중에 믿어지게 되었다는 상반된 경우가 모두 존재한다.

그렇다면, 창세전의 예정이 뒤집힌다는 뜻인가? 시공간에 제한된 인간의 시각으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성경이 명시하지 않은 부분을 굳이 알아내려 할 필요도 없다. 야훼는 성령을 통해서 인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사사로이 성경을 풀다가는 멸망에 이를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에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예수가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시작하고서 세상에 보여준 첫 번째 표적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가나의 혼인잔치이다. 과학으로 밝혀진 것과 같이 전혀 다른 원소로 구성된 물[10]이 예수님의 사역으로 포도주로 변하는 것은, 택함받지 못한 이방인을 야훼의 택함받은 유대인으로 변화시키는 예수의 사역을 설명한다. 그리고 원수가 뿌린 가라지를 야훼의 씨인 알곡으로 변화시켜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석시킬 수 있는 예수의 보혈의 능력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가 보여준 유일한 표적(자신이 야훼의 아들이라는 주장의 근거)인 요나의 표적은 의인이 죄인된 이웃의 죄를 위하여 희생을 치루는 것인데 이 희생제사의 향유자는 택함을 받은 자녀들에게 한정하는 것으로써 멈추었다. 이는 원수가 뿌린 가라지요 사람의 딸들을 야훼의 알곡인 하나님의 아들들로 변화시키는, 예수의 표적보다 더 큰 이적을 자신의 창세전에 택한 자녀들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위의 인용에서 예수가 가리킨 내가 한 일 보다 더 큰 일 이다.


3.2.2. 예정 : 칼빈웨슬리 논쟁(예지예정과 이중예정)[편집]


성경은 인간의 구원에 대한 야훼의 예정을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다. 그런데 또 성경을 보면 모든 인간은 천국에 들어가는 자와 지옥에 들어가는 자 이렇게 둘로 나눠진다. 그래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예정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있어, 칼빈은 야훼께서 구원받을자와 지옥불에 던질 자를 둘 다 창세전에 이미 결정하셨다는 이중예정을 주장했으며 웨슬리는 지옥불에 던져넣을 자를 야훼가 결정한게 아니라 전지전능한 능력에 의하여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될 지 모두 알고 있으므로, 인간의 선택지를 미리 아는 지식에 근거해서 야훼는 인간이 행동하기 전에도 최종시점의 처분을 미리 결정할 수 있다는 예지예정을 주장한다.

예지예정과 이중예정에 대한 혼란은 다음과 같이 일거에 정리된다.

신학자들의 접근을 따라서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은 논리의 전개가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인하여 모든 인간들은 야훼의 신적 영광을 상속하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대되었다. 택함받은 양과 알곡 뿐만 아니라 염소와 가라지들 까지도. 전지전능한 야훼 앞에서 이들의 구원과 신적영광의 상속은 어떤상태일까? 바로 양자역학에서 이야기하는 중첩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현존하는 시공간 전체인 우주의 기준이 되는 물질이라고 알려진 빛은, 누군가의 관측이 실행되는 그 순간에 그 속성이 입자와 파동이라는 서로 전혀 상반된 둘 가운데 하나로 확정된다. 관찰이 실행되는 그 순간 이전의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가 중첩상태이며 인간들은 이것이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아직까지 전혀 모른다. 이와 동일하게 야훼의 심판이 실행되는 그 순간 까지 양자들의 상속여부는 결정되지 않는다. 야훼 앞에서 이들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함을 유추할 수 있다.[11] 모르는 것이 아니다. 아직 상태가 확정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가라지에게도 구원과 상속의 기회를 제공하는 야훼의 이 선택은 창세전에 선택한 알곡들을 심판에 노출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데, 이것은 잃은 양 한 마리를 구하기 위해서 아흔아홉마리의 양을 들에 두고서 모험을 나선 성자 예수의 선한 목자 비유에 그대로 대입된다. 예수의 이 비유는 구약의 요나서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선지자 요나를 향한 야훼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3.2.3. 천국 : 하나님 나라 논쟁[편집]


이를 통해 현재 정통주의 신학계에서 몰두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실체도 명확해진다.

현재 정통주의 신학계의 주류는 <2000년전에 성자 예수가 회복한 현재의 멸망직전인 지구에서 기독교인들의 힘으로 만들어내는 정치적,문화적,사회적인 야훼의 통치>를 성경이 설명하는 궁극적인 천국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 나라>는 첫째로 야훼의 창조목적인, 역사의 종말과 함께 있을 희고 큰 보좌의 심판이 완료된 이후에 도래할 새하늘과 새땅에서, 야훼의 신적 주권을 상속받아 신적인 존재로 변화한 피조물인 양자들이 제사장을 겸직한 왕이 되어 영원히 통치할 신국을 가리킨다. 이에 곁들여 둘째로, 불살라 없어질 이 땅에서 성자 예수의 보혈로써 상속의 후보자격을 획득한 피조물들이 야훼의 약속을 바라며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함으로써 피조물의 마음속과 현재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야훼)의 주권을 가리킨다.


3.2.4. 삼위일체 : 아타나시우스아리우스 논쟁[편집]


예수님과 신약의 기록들에 의해 야훼는 세 분인 것이 확실했지만 이는 구약에서 줄기차게 주장해온 일신론과 모순된다. 그래서 아리우스는 이 모순의 해결을 위하여 성자 예수는 진짜 야훼인 성부에게서 파생된 보조적 존재(신적인 피조물)라고 설명해서 촉발된 문제이다. 그러나 아리우스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성자 예수를 로 고백하는 것은 유일신 성부 야훼를 거부하는 우상숭배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설명에 근거한 설득력으로써 사회에 널리 퍼져 큰 문제가 되었다.

영원한 신비인 삼위일체는, 여전히 이해는 되지 않지만 이레네오의 신정론 아래에서는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서술된다.

야훼는 사랑이라는 실존의 유일무이한 존재이시다. 또한 야훼는 아버지이신 성부, 아들이신 성자, 영이신 성령 완전히 독립된 세 분이다. 그런데 사랑의 성부 하나님도 사랑의 실존 그 자체이시고 은혜의 성자 예수님도 사랑의 실존 그 자체이시고 교제의 성령님도 사랑의 실존 그 자체이시다. 그래서 야훼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다.

역사의 종말 후에 어린양의 혼인잔치로써 야훼의 주권을 상속한 피조물들은, 그 존재가 사랑의 실존 그 자체인 성자와 동일하게 변화하는 일은 결코 없겠으나, 양자로써 야훼의 신적 주권을 상속하여 성자와 동등한 영화를 누리게 될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3.2.5. 칭의 : 베자피스카토르 논쟁 (수동순종과 능동순종, 현재진행 이슈)[편집]


어거스틴의 신정론 아래에 있는 기존의 신학에서는 능동순종(의로움의 전가)을 부정하면 구원파와 동일하게 회심 이후에는 마음대로 살아가도 되거나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와 동일하게 행위로 추가적인 구원(영생)을 얻어야 한다는 오직 두 가지의 답 없는 선택지만이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종교개혁시기 신학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리스도가 쌓아놓은 의로움(공덕)이 신자들에게 이동한다는 능동순종 이론을 사변적으로 개발하게 된 배경이다. 그러나 이레네오의 신정론 아래에서 능동순종은 말 그대로 전혀 불필요한 뱀의 다리에 불과하다.

이레네오의 신정론 아래에서는 야훼 앞에서 의롭다함(칭의)을 얻게 되는 원리인 전가의 실제는 다음과 같다.

성경이 가리키는 는 어떤 공덕이 아니라 단순한 죄 없음이다. 전가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 근거하여 희생제사의 원리를 따라서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는 것(수동순종)이며, 그 결과로써 야훼의 법정에서 피고는 의롭다 함을 얻게되는 것이다. 사변적 논리는 모두 제거하고 상식에 근거하여 단순하게 생각할 때, 모세의 율법인 희생제사에서 비둘기나 황소가 쌓아놓은 공덕이 인간에게 전가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극히 곤란하다. 희생제사에서 제물의 조건은 흠(죄) 없음 이지 공덕(의로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집행하신 희생제사도 모세의 율법에서 규정한 원리를 반드시 동일하게 따라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대속이 완료된 신약 이후에는 이 죄의 전가 조건이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믿음이며, 이 믿음의 발생은 야훼가 택한 자녀에게 한정하여 제공하는 선물이다. 이렇게 자신의 죄악을 그리스도에게 전가하고서 칭의를 얻은 피조물인 인간이, 이웃의 죄를 위하여 죄없는 자신이 그 대가를 대신해서 치뤄주는 십자가 이웃사랑의 의무를 망각한 채 그리스도의 좁은 길을 따르지 않고 끝까지 자기 욕심을 따라서 넓은 문으로 가면 이 사람은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이 사람의 죄를 속죄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사람이 야훼에게서 심판받는 죄는 다른 죄악과 성질이 다르다. 야훼에 대한 반역은 성자 예수의 화목제사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값이 야훼 앞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독생자의 피값으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이 사람은 역사의 종말 이후에는 예복이 없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석하게 될 것인데, 한낱 타락한 피조물에 불과한 자신을 위하여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삼아 야훼의 신적 영광을 상속하는 자리에 자신을 초대한 성부의 창세전부터 계획한 선한 뜻을 모욕한 죄는 성자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도 속죄할 수 없다. 이는 야훼의 선한 뜻을 모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자 예수가 선언한 속죄하는 제사가 없는 죄악, 야훼의 영을 모독하는 죄이다.

[1] 이 글은 예정론을 지지하지 않는 입장에서 서술되었다.[2]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것을 기뻐하시진 않으나,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간다고 해도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드러낼 뿐이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는 못한다.[3] 야훼 = 로고스 = 말씀 = 예수[4] 사랑의 부재와 죄를 동치하는 것에 대해 이론이 존재할 수 있지만 우선 그러한 것으로 받아들이자.[5] 교부 이레네오의 태사부(스승의 스승)인 사도요한의 복음서[6] 미워하면서[7] 인간의 창조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길[8] 원어로는 왕인 제사장, 제정일치 국가의 제사장을 겸직한 군주에 해당한다.[9] 요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4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10] 알콜에는 생명의 기초가 되는 원소인 탄소가 존재하는 반면, 물에는 탄소가 없다.[11] 이 관점에 근거하면, 양자역학의 실험에서 등장하는 관측이라는 행위는 의도를 가진 선택 이벤트에 해당한다. 의도를 가진 선택 이벤트를 거쳐야만 중첩으로 유지되던 존재의 상태가 결정되며 이벤트 이후 존재의 상태는 둘 가운데의 하나로 불변의 확정(비가역적 변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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