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키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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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평가


1. 개요[편집]


안도키데스(기원전 440년 - 기원전 390년)는 고대 아테네의 웅변가다. 아티카의 십대 웅변가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2. 생애[편집]


아테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로고그래프, 즉 전문 수사학자로 활동했던 이소크라테스, 리시아스같은 다른 웅변가들과는 달리 안도키데스는 아마추어였다. 그는 귀족 클럽인 헤타이레이아의 일원이었으며, 개인적인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웅변 그 자체를 예술이 아닌 실용적인 수단으로 사용했다.

반민주주의자였던 그는 젊은 헤타이레이아 멤버들과 함께 기원전 416년에 일어난 헤르메스 신상 훼손 사건에 가담했다. 그는 목숨은 살려주는 대가로 사건에 가담한 이들의 이름을 공개하고, 공범자들이 모두 사형에 처해졌을 때 자신은 몸 성히 유배 키프로스로 유배간다. 411년에 아테네로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비는 연설을 하지만 설득시키지 못한다. 30인의 과두정이 해체된 403년에 다시 시도해서 자신의 업적을 나열해고 용서를 빌어 재판관들을 설득시키는데 성공한다. 아테네로 돌아온 뒤부터 정치계에서 활발히 활동한다. 390년에 아테네, 코린토스, 아르고스, 테베 등이 스파르타를 상대로 싸운 코린토스 전쟁(395년부터 387년까지)때 아테네의 대표로 스파르타로 건너가서 평화 협정을 교섭하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다시 유배된다.

3. 평가[편집]


다른 10대 아티카 웅변가들에 비해 업적이 좀 초라한 것 같다. 후대 그리스 학자들은 안도키데스의 웅변 스타일이 세련되지 못하다고 했다. 간혹 연설의 운율을 대가로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 무리수를 던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전문 수사학자들이 난무하는 고대 아테네에서 아마추어 신분으로 양호한 자기 변호를 했다는 점에서 높이 쳐주기도 한다. 또 수사학자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구사했다는 점에서 안도키데스의 연설이 역사적 가치가 더 크다고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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