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산 와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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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코트디부아르의 현 대통령.
2. 집권 전의 생애[편집]
1942년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딤보크로[1] 에서 태어났다.
미국에서 유학하여 1972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IMF에서 근무하다 1990년부터 1993년까지 코트디부아르의 재정부 장관을 맡게 된다.
펠릭스 우푸에부아니가 사망하고 치러진 1995년 공화연합(RDR)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받았으나 앙리 코낭 베디에의 독재 때문에 선거를 보이콧하고 다시 IMF로 돌아가게 된다.
1998년 말 그는 다시 정계에 복귀하게 되고, 1999년에 차기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지만 새 헌법에서 부모가 모두 코트디부아르인이 아니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도록 개정되었는데, 알라산 와타라는 아버지가 부르키나파소 혈통이라는 이유로 2000년에 치러진 대선에 출마자격을 박탈당하게 된다. 이 문제는 이후 코트디부아르 내전의 씨앗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결국 블레즈 콩파오레 부르키나파소 대통령까지 나서서 알라산 와타라가 부르키나파소 국적이 아님을 증명해야 했고, 이후 2007년 대선 출마 자격을 확인받게 된다.
2005년에 시행될 예정이었던 대선이 2010년까지 미뤄지고, 어찌저찌해서 2010년 11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로랑 그바그보 전 대통령을 꺾고 득표율 54%를 얻어 코트디부아르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으나, 그바그보 측에서 북부 주에서 부정투표가 실시되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2] 정국이 한동안 시끌시끌했다.
3. 대통령 집권 후[편집]
코트디부아르의 GDP 성장 그래프 (세로축 단위: 십억 달러)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내전으로 후퇴한 코트디부아르의 경제를 안정시키고 고도성장을 이룩했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고, 그 결과로 2015년 치러진 대선에서는 83.7%의 득표율로 압승했다.
그러나 3선 출마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고 2020년 10월에 치러진 대선에 출마했으며[3] , 이 때문에 아비장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더군다나 헌법위원회에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44명의 후보중 알라산 와타라를 제외한 무려 40명의 후보를 거부했기 때문에 반발이 더 심했다. 아프리카 인권재판소에서는 야권 후보들의 출마를 허용하는 판결을 내렸지만, 코트디부아르 정부는 이것을 무시하였다.
결국 로랑 그바그보를 비롯한 야권에서는 대선을 보이콧했고, 제대로 된 경쟁자 없는 대선에서 알라산 와타라는 95.3%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3선 고지에 올랐다. 그러나 미국의 기관 프리덤 하우스는 선거 과정이 불투명했다고 지적했다.
4. 평가[편집]
집권 기간 동안 코트디부아르의 경제는 안정되고 민주주의도 조금씩 발전해 국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었지만, 본인의 약속을 깨트리고 헌법을 무시하면서까지 장기 집권의 야욕을 보이고 2020년 대선 기간에 모든 공개 시위를 금지하는 등 독재자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한계도 있다.
2020년 대선에서는 헌법의 자의적 해석으로 어찌어찌해서 출마했지만, 다음 2025년 대선에서는 어떻게 해도 출마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헌법을 개정해 연임제한을 폐지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4선 출마를 위해 헌법을 개정하면 대놓고 독재를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귀추가 주목된다. 앞으로 코트디부아르가 옆나라 가나처럼 안정된 민주주의가 정착할지, 다시 독재 국가로 회귀할지가 그의 선택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5. 주요 경력[편집]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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