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히크 드 보르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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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백작
엔히크 드 보르고냐
Henrique de Borgon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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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066년
부르고뉴 공국 디종
사망
1112년 5월 12일 (46세)
재위
포르투갈 백국의 백작
1096년 ~ 1112년
아내
테레사 데 레온
자녀
우라카, 산차, 테레사, 엔히크, 아폰수 1세
아버지
부르고뉴의 앙리
어머니
부르고뉴의 시빌
형제
위그 1세, 오도 1세, 로베르, 헬라, 베아트리스, 레이날도

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



1. 개요[편집]


포르투갈 백국의 백작. 프랑스어로는 '앙리 드 부르고뉴'이다.


2. 생애[편집]


1066년경 부르고뉴 공국디종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1세[1]의 아들 앙리이고, 어머니는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1세 또는 부르고뉴 공작 레이날도 1세의 딸로 전해지는 시빌이다. 형제로 로베르 1세의 뒤를 이어 1076년부터 1079년까지 부르고뉴 공국을 다스리다가 수도원에 은거한 위그 1세, 위그 1세의 뒤를 이어 부르고뉴 공작이 된 뒤 1079년부터 1103년까지 통치한 오도 1세, 랑그르의 주교를 역임한 로베르, 수녀가 된 헬라, 빈호리아 백작 가이 1세와 결혼한 베아트리스, 그리고 플라비니의 생 피에르 수도원장 레이날도가 있었다. 아버지는 로베르 1세가 사망하기 전에 숨을 거뒀기 때문에 부르고뉴 공작이 되지 못했다.

그가 속한 부르고뉴 가문은 프랑스 카페 왕조로베르 2세의 막내아들 로베르의 후손인 카페 왕조의 방계 왕족으로, 샬롱, 오세르, 오툰, 느베르, 디종, 마콩, 세무르 등 프랑스 왕국의 여러 도시를 지배했다. 또한 그의 아버지 쪽 이모 중 한 명은 레온 왕국의 국왕 알폰소 6세의 두번째 왕비인 콩스탕스[2]였고, 1049년부터 1109년까지 클뤼니 대수도원장을 맡으며 클뤼니 운동을 진두지휘하고 성인으로 시성된 위그가 그의 큰 삼촌이었다. 또한 교황 갈리스토 2세는 그의 먼 사촌이었다.[3]

1086년 10월 23일 사그라하스 또는 잘라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무라비트 왕조의 에미르 유수프 이븐 타슈핀에게 완패한 레온 왕국의 국왕 알폰소 6세는 유럽 각국과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이베리아 반도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해달라고 호소했다. 십자군 선포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는 이에 응해 부르고뉴의 레이몽[4]과 함께 프랑스 기사와 병사들을 이끌고 레온 왕국으로 이동해 무슬림과의 전쟁에서 활약했다.

알폰소 6세는 1093년 정처 콩스탕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외동딸 우라카를 레이몽과 결혼시켰고, 정부 히메나 무뇨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 테레사 데 레온을 엔히크와 결혼시켰다. 이후 1096년 레이몽과 우라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레온 왕위를 물려받는다는 합의가 맺어졌으며, 엔히크는 아내 테레사와 함께 포르투갈 백작이 되었다. 여기에 갈리시아가 둘로 나뉘어져서 하나는 우라카가 그대로 가지고 두에로 강과 미뇨 강 사이의 갈리시아 서부는 지참금으로서 엔히크와 테레사에게 전달되었다.

1093년 알폰소 6세의 정부 중 한 명인 자이다가 산초 알폰세스를 낳고 1107년 알폰소 6세가 산초 알폰세스를 합법적인 자식으로 삼고 후계자로 정하면서 입지가 약해진 레이몽은 엔히크와 비밀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양자는 서로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상호 협조하기로 했으며, 알폰소 6세가 사망한 후 레이몽이 레온 왕국을 물려받고 엔히크는 톨레도 일대와 레온 왕실 국고의 1/3을 물려받기로 했다. 만약 톨레도 일대를 무슬림의 공세로 잃어버린다면, 엔히크는 갈리시아를 보상으로 받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해 9월 레이몽이 죽으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 후 알폰소 6세는 딸 우라카를 갈리시아의 단독 영주로 삼고 알폰소 라이문데스를 갈리시아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알폰소 6세가 이 비밀계약을 사전에 눈치채고 레이몽 가족과 엔히크 가족이 서로를 견제하도록 조치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1108년 5월 30일, 레온 왕국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산초 알폰세스가 무라비트 왕조와 맞붙은 우클레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알폰소 6세는 남쪽 국경으로 가서 무슬림의 추가 공세에 대한 방비를 수행한 뒤 톨레도로 귀환한 후 귀족들을 소집한 뒤 우라카가 자신의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고 통보했다. 이후 우라카의 재혼 상대를 놓고 오랫동안 고심한 끝에 아라곤 왕국의 국왕 알폰소 1세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엔히크와 테레사는 자신들이 후계 구도에서 밀려나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알폰소 1세와 우라카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고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1109년 7월 1일, 알폰소 6세가 톨레도에서 사망한 뒤 알폰소 1세와 우라카가 공동으로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를 칭했다. 그러나 두 부부가 서로 심각한 갈등을 벌인 끝에 내전을 벌이자, 엔히크는 상황을 관전하다가 1111년 군대를 일으켜 레온으로 진군했다. 그는 처음에는 우라카를 도우려 했지만, 알폰소 1세가 사절을 보내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일대를 가지게 해줄 테니 자기 편을 들라고 설득했다. 엔히크는 이에 혹해 알폰소를 지지하기로 했다.

1111년 10월 15일, 엔히크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이 카데스피나 전투에서 카스티야 백작이자 우라카 여왕의 애인인 고메스 곤살레스를 처단했다. 우라카는 패전 소식을 듣자 부르고스에서 탈출한 뒤 또다른 지지자인 페드로 곤살레스 데 라라와 합류했다. 그 후 우라카 측은 엔히크에게 "우리 편을 들면 카스티야의 일부 영토와 레온의 사하군 북쪽에 있는 사모라, 케이아 등지를 추가로 갖게 해주겠다"고 제안했고, 엔히크는 이를 받아들여 우라카와 연합하여 알폰소를 공격했다. 알폰소는 엔히크의 갑작스러운 배신에 상당한 피해를 입고 페냐피엘로 후퇴한 뒤 엔히크와 우라카 연합군의 포위공격을 받았지만 끝까지 버텨냈다.

얼마 후, 우라카는 엔히크가 더 많은 영토를 달라고 요구한 것에 반감을 품고 알폰소 1세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엔히크가 자모라를 접수하기 위해 출진한 사이, 우라카는 알폰소 1세와 내통해 팔렌시아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알폰소는 즉시 팔렌키아로 진군하다가 사하군에서 우라카 및 엔히크의 아내 테레사와 마주쳤다. 사하군은 곧 함락되었고, 테레사는 알폰소 1세의 마수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했다. 한편 우라카는 남편과 잠시 합류했다가 그의 위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갈리시아 산맥으로 도피했다.

우라카가 갈리시아 산맥 깊숙히 숨은 뒤, 알폰소 1세는 레온, 카스티야 등지를 돌며 지지자들을 규합하려 했다. 그러나 1112년 5월 아스토르가로 찾아갔다가 엔히크의 갑작스런 급습을 받았다. 짧은 공성전 끝에 아스토르가가 함락되었고, 그는 케리온 강변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엔히크는 아스토르가 공성전 도중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아스토르가에서 사망했고, 포르투갈군은 본국으로 물러났다. 엔히크의 유해는 브라가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아내 테레사 데 레온이 막내아들 아폰수 1세를 포르투갈 백작으로 옹립하고 포르투갈 백국을 사실상 홀로 통치했다.


3. 가족 관계[편집]


  • 테레사 데 레온(1080 ~ 1130): 레온 왕국의 국왕 알폰소 6세의 딸. 포르투갈 여백작이자 자칭 포르투갈 여왕.
    • 우라카(1095 ~ 1169 이후): 트라스타마라의 영주 베르무두 페레스 데 트라바의 아내.
    • 산차(1097 ~ 1163): 포르투갈 귀족 산초 누녜스 데 첼라노바와 초혼, 페르난도 멘데스 데 브라간사와 재혼.
    • 테레사(1098): 요절
    • 엔히크(1106 ~ 1110): 요절
    • 아폰수 1세(1109 ~ 1185): 포르투갈 백작, 포르투갈 왕국 초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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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페 왕조 로베르 2세의 차남[2]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1세의 딸[3] 갈리스토 2세의 아버지 부르고뉴 백작 기욤 1세는 엔히크의 형이자 부르고뉴 공작을 맡은 오도 1세의 아내 시빌의 아버지이기도 했다.[4] 부르고뉴 백작 기욤 1세의 넷째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