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적(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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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재하 || 왕회종 || 왕재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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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績
? ~ 1540년(중종 35)

1. 개요
2. 생애
3. 후사


1. 개요[편집]


조선 중종 시기의 인물. 왕순례의 서손자이고 왕천계(王千繼)의 아들이다. 숭의전감으로 마전(麻田)에서 고려 왕조의 제사를 받들었다.


2. 생애[편집]


왕적은 선조들의 뒤를 이어 경기도 마전군의 숭의전에서 봉사했다. 박수문(朴守紋)이 경기도사(京畿道使)를 지내던 시기[1] 마전을 찾았는데 마을이 쇠잔하고 인구가 줄어있었다. 왕적은 박수문에게 원래 30명이던 노비가 대부분 죽었으니 제사에 심부름할 사람이 부족하다고 토로했다.

1540년(중종 35)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3. 후사[편집]


왕적이 자손을 남기지 않고 죽자 많은 왕씨들이 왕적의 뒤를 이어 봉사하려고 했다. 봉사자가 되겠다고 자처한 왕씨 모두가 천얼이었는데, 숭의전감은 문관직을 겸했기 때문에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천첩 소생인 얼자를 뽑을 수는 없었다. 그 와중에 충렬왕의 13대손이라는 유생 왕인위(王仁偉)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세파(世派)의 근거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봉사자로 정하기에는 애매했다.

예조판서 정옥형은 제사를 주관할 왕씨의 적파를 따로 정해 뽑을 것을 중종에게 아뢰었고, 이듬해까지 봉사자 후보는 다섯 명으로 좁혀졌다. 중종은 최종 후보를 가리기 위해 ① 한양 거주자, ② 아들 있음을 부가 조건으로 세웠다. 근거는 먼 지방에 살면서 경기도 마전군으로 왕래하게 되면 제사에만 힘쓰기가 힘들고, 아들이 없으면 왕적의 경우가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 갑사(甲士) 왕순(王順)

  • 정로위(定虜衛) 왕희(王希)
선비 집안으로 충청도 신창현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일찍이 신창현의 유향소에 소속된 적 있을 정도로 그 지역에선 유력 인사였다. 아들이 많다.[2]

  • 교생(校生) 왕징(王澄)

  • 한량(閑良) 왕인위(王仁偉)
한양에는 거주하나 장가들지 않았고, 의원의 아들로 중인 신분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앞에서 밝힌 것과 같이 충렬왕의 13대손이라고 주장하지만 자칭일 뿐 근거는 미약하다.

  • 유학(幼學) 왕긍중(王兢中)
한양에 거주하는 유생. 아들이 있고 친족 중에는 관직에 나아간 사람이 있다. 이 인물 또한 충렬왕의 후손이라고 하지만 대수를 알지 못했다.

예조에서는 숭의전 봉사자는 마전에 거주해야 하고 지방이든 한양이든 왕래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왕희로 후사를 삼는 것이 합당하다는 글이 특별히 중종에게 올라간 바 있었다. 따라서 비록 거주지가 한양은 아니지만 조건 ②에 가장 알맞는 왕희가 왕적의 뒤를 잇는 봉사자에 낙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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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수문이 급제한 것이 중종 2년이고 마전의 실상을 중종에게 아뢴 것은 중종 11년이다. 박수문은 중종 6년부터 삼사에서 관직을 지내므로 경기도사 부임 시기는 중종 초일 것이다.[2] 슬하에 장남 왕원보(王元輔), 차남 왕원필(王元弼), 3남 왕원익(王元翊), 4남 왕원우(王元佑), 5남 왕원(王元) 등 5형제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