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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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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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 추존 황제
太祖 | 태조


서하 추존 황제
太祖 神武帝 | 태조 신무제

묘호
무종(武宗) → 태조(太祖)
시호
신무황제(神武皇帝)
성씨
이(李)

계천(繼遷)
부친
이광엄(李光儼)
모후
불명
황후
신무황후(神武皇后)[1]
생몰기간
963년 ~ 1004년 1월 26일
재위기간
983년 ~ 1004년(하국왕)
992년 ~ 1004년(서평왕)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서하의 추존 황제. 티베트 계열의 탕구트족이 세운 서하의 실질적인 초대 황제였으며, 경종 이원호의 조부였다. 아버지는 이광엄(李光儼)이었다.[2]


2. 생애[편집]


이계천의 5대조인 탁발건중(拓跋建重)은 당나라로부터 안무평하번락사(安撫平下番落使)에 임명되었으며, 종고조부 탁발사공(李思恭)이 정난군 절도사, 하국공(夏國公)에 임명된 뒤 그 작위를 세습했다.[3] 이때 탁발사공이 당 황실의 국성인 이씨 성을 하사받게 되어 후손들은 이씨가 되었다.

탕구트족 평하(平夏)부의 수령이며 족장이자 이계천의 8촌 족형이었던 이계봉(李繼捧)이 북송에 귀순했다(982년). 그러자 이계천은 983년 친동생 이계충(李繼沖) 및 측근 장포(張浦)와 함께 여기에 반발하여, 북송으로부터 독립하고 거란족의 요나라에 귀부했으며, 거란으로부터 하국왕에 봉작되었다. 또한 요나라 역사상 최고의 명군이었던 성종의 딸 의성공주(義成公主)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다. 985년 북송의 장군 조광실(曹光實)을 유인하여 살해하고, 은주(銀州)[4]를 공략했으며, 996년 포락하(浦洛河)에서 북송의 군대를 격파한 후 영주(靈州)[5]를 포위하고 공격했다. 북송은 군대를 다섯 갈래로 나누어서 공격했으나 패배했다.

영주를 점거한 이계천은 그곳을 서평부(西平府)로 개칭하여 종묘와 궁궐을 세워 서하의 전신을 건국하였다.[6] 이후 서량부(西涼府)를 공격하여 토번의 수령인 반라지(潘羅支)를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곧 죽었다. 이계천의 자리는 아들 이덕명(李德明)이 계승했으며, 이덕명이 무종(武宗) 응운법천신지인성지도광덕효광황제(應運法天神智仁聖至道廣德孝光皇帝)로 추존했다가, 이덕명의 아들이자 이계천의 손자인 이원호서하를 건국한 후에 조부 이계천의 묘호를 태조(太祖), 시호를 신무황제(神武皇帝)로 재추존했다.

후에 명나라를 무너뜨린 이자성은 이계천을 자신의 조상으로 모시고 태조로 재추존하였다.[7]

3. 대중매체에서 [편집]


2020년 드라마 《연운대》에서 요나라의 의성공주와 혼인한다.

[1] 이자성 추존.[2] 이광엄(李光儼)은 5대 10국시대, 후주로부터 은주방어사에 임명되었다[3] 이계천은 이사공의 동생이기도 한 이사충의 4대손이었다.[4] 현재의 산시성 위린 남쪽.[5] 현재의 닝샤 후이족 자치구 링우 서남쪽.[6] <<동북아역사넷>> 이계천은 靈州를 西平府로 개명하고 궁궐과 종묘 등을 건설하여 수도로 삼았다..[7] 《爝火录》:追尊其曾祖以下加谥号,以李继迁为太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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