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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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
Ignacy Jan Paderewski


파일:L20090902.22019195548i1.jpg

출생
1860년 11월 18일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display: none; display: 러시아 제국"
행정구
]]
쿠리를루카
(現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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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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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리를루카)
사망
1941년 6월 29일 (향년 80세)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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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뉴욕주 뉴욕
직업
피아니스트, 정치인

1. 소개
2. 생애
3. 허버트 후버와의 관계


1. 소개[편집]


폴란드피아니스트, 작곡가이자 정치가이다.


2. 생애[편집]


1872년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배우고, 졸업 후 5년간은 모교의 피아노과 교수로 활동했다.

1881년 이후 베를린에서 수년간 작곡법 등을 배웠으며 이때 피아니스트가 될 것을 결심하고 곧바로 빈으로 가서 테오도르 레셰티츠키에게 배웠다.

1887년, 빈에서 독주회를 열면서 명성을 점차 높였고 1909년에바르샤바 음악원 원장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국으로 가서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폴란드의 자유를 권유하였고, 전쟁이 끝나고 폴란드가 독립하자 귀국하여 폴란드 공화국 최초의 수상과 외무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단 1년만에 사임하고 다시 피아니스트로서 활동을 재개하였다.

만년에는 스위스에서 지내다 다시 미국으로 가 뉴욕에서 객사하였다. 처음엔 알링턴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1년 폴란드로 유해가 옮겨져 바르샤바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라흐마니노프와 동시대를 살면서 당시 최고의 피아니스트 및 작곡가로 명성을 펼쳤으며, 옥스퍼드 대학교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다.


3. 허버트 후버와의 관계[편집]


1892년 스탠퍼드의 학생이었던 후버는 당시 미국에서 연주회를 순회중이었던 파데레프스키의 다음 행선지가 자신이 거주중이던 캘리포니아라는 사실을 알고 그를 음악회에 초대했다.

후버는 파데레프스키에게 2000달러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었으나 막상 티켓이 잘 팔리지 않아 최종적으로 400달러 부족한 1600달러만 지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파데레프스키는 후버에게 장학금 형식으로 1600달러를 그냥 돌려줬고, 이에 후버는 감사인사를 표하며 언젠가 갚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미국 식량 구호국의 초대 총장이 된 후버는 식량 지원국을 검토하던 도중 총리가 된 파데레프스키가 식량 문제로 위기에 처한 사실을 알고 그를 돕기 위해 폴란드에 식량을 지원해주었고[1], 덕분에 파데레프스키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 에피소드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27년 만에 지킨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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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다가 당시 파데레프스키는 미국에 원조 요청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