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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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개요
2. 가곡
3. 기타



1. 개요[편집]


이난향 (李蘭香)

일제강점기의 기생. 당대의 이름난 예인이자 기생이었다. 당시 활동하는 예인 중 유명한 가객(歌客)[1]이기도 했다.

본명은 이선비(李仙妃)로, 1900년에 평양에서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좌수였기에 집 형편은 넉넉했지만, 물산 객주업을 하다 실패하여 가세가 기울었다. 나이가 찬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킨 그녀의 어머니는 12살인 막내를 기생 양성소라 불리는 이름난 노래 서재로 보냈다.

이후 13살에 상경하여 다동기생조합의 기생이 되었고, 궁중 진연에 참가하여 순종 앞에서 춤을 선보였다. 그 후 대정권번에 소속되어 가곡의 거장인 하규일(1867~1937)에게 정악 일체를 배웠다. 정가가곡, 가사, 시조 뿐 아니라 서도잡가도 불렀으며, 국악기인 양금과 일본 악기인 샤미센을 연주할 줄 알았고, 정재48종무, 승무, 검무, 서양무도 등 춤에도 능했다. 춤추는 태가 빼어났다. 스승인 하규일 역시 자신의 모든 제자 중 그녀가 가장 빼어나다고 하였으며, 한번에 연달아 노래 네 바탕을 배울 정도로 열의 넘치는 제자였다고 한다.

모든 노래를 잘 했으며, 춤도 잘 췄고, 양금도 잘 연주한데다 외모까지 빼어났고, 목소리도 곱고, 하나를 물으면 열을 대답할 정도로 만능 재주꾼이었으며, 소문이 금세 퍼져 많은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이후 십수 년을 인기있는 기생으로 살았지만, 31세에 결혼하여 살림에 전념했다.

처음으로 가곡 레코드판을 녹음했다.

인터넷에서는 설리의 닮은꼴로 알려졌다. 그런데 보정한 사진이라는 설도 있다.


2. 가곡[편집]





3. 기타[편집]



이난향 얼굴에 대한 생생한 얼굴을 아래 영상 6:47부터 볼수있다. 이난향 나이 든 사진은 이난향이 아닌 손병희 부인 주옥경이다.

이 영상에서는 명월관을 대표하는 기생 12명도 함께 볼수있다.

[1] 전통음악인 정가(正歌)가곡을 부르는 사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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