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트반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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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왕국 아르파드 왕조 제16대 국왕
이슈트반 4세
IV. István

파일:이슈트반 4세.jpg

출생
1133년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
사망
1165년 4월 11일
헝가리 왕국 지모니(오늘날 세르비아 제문)
재위
헝가리 왕국크로아트 왕국의 왕
1163년 1월 14일 ~ 1163년 6월 19일
배우자
마리아 콤니니
(1158년 결혼)
아버지
벨러 2세
어머니
세르비아의 엘레니
형제
게저 2세, 라슬로 2세, 알모스, 소피아, 엘리자베트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헝가리 왕국 제16대 국왕. 형제 라슬로 2세와 함께 동로마 제국의 지원에 힘입어 조카 이슈트반 3세를 몰아낸 후, 라슬로 2세가 일찍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얼마 후 이슈트반 3세의 반격으로 폐위되었고, 왕위를 되찾고자 동로마 제국 및 신성 로마 제국의 후원을 받아 여러 번 도전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2. 생애[편집]


1133년경 헝가리 국왕 벨러 2세와 세르비아 공작 슈테판 우로슈 1세의 딸인 엘레니의 삼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게저 2세, 라슬로 2세, 알모스, 소피아, 엘리자베트가 있었다. 1152년 형 게저 2세가 5살된 아들 이슈트반 3세를 공동 통치자로 지명하자, 그는 이에 불만을 품고 형제 라슬로와 함께 게저 2세에게 대항하기로 했다. 1157년, 그가 먼저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뒤 신성 로마 제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1158년 1월 13일 레겐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 의회는 그를 돕지 않기로 결의했다. 이에 그는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했고,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의 동로마 공주와 결혼하라는 제안을 받아들여 요안니스 2세의 3남인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의 딸 마리아 콤니니와 결혼했다. 1160년 라슬로도 게저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역시 실패한 뒤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했다. 마누일 1세는 라슬로에게도 동로마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제안했지만, 그는 헝가리 귀족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우려해 제안을 거절했다.

1162년 5월 31일 게저 2세가 사망하고 아들 이슈트반이 이슈트반 3세로 헝가리 왕위에 오르자, 마누일 1세는 두 형제에게 군대를 맡겨 헝가리로 파견했다. 동로마 제국의 위세를 두려워한 데다 사전에 막대한 뇌물을 받았던 귀족들은 두 형제 중 하나를 왕으로 세우기로 했다. 그들은 논의 끝에 동로마 여자를 아내로 삼은 그보다는 라슬로를 새로운 왕 라슬로 2세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이슈트반은 그 대신에 헝가리 왕국의 1/3을 영지로 다스렸고, 마누일 1세는 헝가리를 봉신으로 삼았다. 한편 이슈트반 3세는 동로마 제국군을 피해 지지자들과 함께 포조니로 도주했다.

1163년 1월 14일, 라슬로 2세가 돌연사했다. 이에 추종자들이 그를 새 왕으로 옹립했다.그러나 이슈트반 4세는 동로마 제국에 편향적인 정책을 추진했기에 헝가리 귀족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이슈트반 3세는 이 때를 틈타 영주들을 회유해 자신에게 가담시키고 신성 로마 제국 출신 용병들을 모집했다. 1163년 6월 19일, 이슈트반 3세는 세케스페헤르바르에서 숙부 이슈트반 4세를 격파하고 사로잡았다. 이로써 왕위에 복귀한 이슈트반 3세는 감옥에서 풀려난 에스테르곰 대주교 루카스의 조언에 따라 이슈트반 4세를 석방했다.

이슈트반 4세는 처음에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도주했다가 다시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했고, 마누일 1세는 그를 왕으로 복위시키기 위해 헝가리에 군대를 파견했다. 이슈트반 3세는 보헤미아 공작 블라디슬라프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블라디슬라프 2세는 동로마 제국의 위세를 두려워했기에 거부했다. 이슈트반 3세는 마누일 1세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자고 간청했다. 이후의 협상 끝에, 그는 황제로부터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받는 대가로 동생 벨러 3세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인질로 보내기로 했고, 동생 벨러가 아버지 게저 2세로부터 부여받은 아파치 공국(달마티아, 크로아티아 등 헝가리 왕국의 일부 영역)을 동로마 제국이 장악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했다.

마누일 1세는 이 정도면 헝가리를 약화시키고 제국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목표를 충분히 달성했다고 여기고 이슈트반 4세에게 등을 돌렸다. 이에 이슈트반 4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접근했고, 헝가리의 여러 성직자와 귀족들이 신성 로마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 그의 종주권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이슈트반 3세는 낌새를 읽고 프리드리히 1세에게 사절을 보내 공물을 바칠 테니 개입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일단 헝가리의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고, 그의 신하들인 보헤미아 공작 블라디슬라프 1세, 오스트리아 공작 하인리히 2세에게 헝가리를 예의주시하라고 지시했다.

1164년, 이슈트반 3세는 동로마 제국이 가져갔던 벨러 3세의 영지인 중앙 달마티아를 탈환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이슈트반 4세가 용병대를 규합해 시르미움을 공략하고 주민들의 환대를 받았다. 이슈트반 3세는 이에 맞서 보헤미아-오스트리아-할리치나의 지원군을 받고 이슈트반 4세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마누일 1세가 곧 헝가리로 진군하여 바치까지 진군하면서, 보헤미아 공작 블라디슬라프 1세에게 이슈트반 3세에게 평화 협약을 맺을 것을 설득하라고 권고했다. 이슈트반 3세는 보헤미아가 전쟁에서 발을 빼려 하자 어쩔 수 없이 시르미움을 포기하기로 하고, 그 대신 황제가 이슈트반 4세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 후 이슈트반 3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던 달마티아 해안지대를 침공해 자다르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그 일대를 순조롭게 공략한 뒤, 1165년 봄에 시르미움으로 쳐들어가 이슈트반 4세를 포위했다. 마누일 1세는 협약을 위반한 이슈트반 3세를 응징하려 했지만, 때마침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가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헝가리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 대신, 이전에 이슈트반 3세를 지지했던 군주들에게 사절을 보내 헝가리 내전에서 중립을 지키도록 설득했다. 그 후 이슈트반 3세는 이슈트반 4세를 지모니 요새에 몰아넣고 포위 공격했고, 이슈트반 4세는 1165년 4월 11일 농성하던 중 독살당했다. 요새는 곧 함락되었고, 그의 유해는 장례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도시 성문 밖에 버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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