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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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준석(1896).jpg

이명
이태원
출생
1896년 5월 7일
안동부 청하군 북면 화전동
(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송라면 화전리)[1]
사망
1955년 3월 16일 (향년 58세)
경상북도 영일군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3. 후손



1. 개요[편집]


나라 있음에 내가 있고, 내가 없음에 나라 있다면 이 한 몸 던져서 나라 어이 아니 건지리.

- 故 이준석 義士 묘비 글 중에서 -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국회의원 이인선그의 손녀이다.

2. 생애[편집]


1896년 5월 7일 안동부 청하군 북면 화전동(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송라면 화전리)에서 이익호(李翼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영일군 송라면 대전리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아버지 이익호는 일찍이 상경하여 배재학당에서 수학했으며, 민영환 휘하에 있으면서 궁내부 주사(主事)로 일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고 조약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민영환이 자결하자 낙향하였고, 고향에 대전리 교회, 유계리 교회, 청하교회 등을 세우는 한편, 청하향교 장의 및 청하면장 등을 역임했다. 그러다가 1918년 호열자로 추정되는 병에 걸려 45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한편, 이준석은 1919년 3월 윤영복(尹永福)으로부터 자신과 윤영만(尹永滿)·오용간 등이 먼저 만나서 3월 22일 청하면 덕성리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다는 것을 듣고, 자택에서 대형 태극기 1개와 소형 태극기 20여 개를 만들고 마을 주민들에게 시위계획을 알렸다.

그리고 거사 당일인 3월 22일 오후 1시경, 그는 덕성리 장터에서 손수 제작한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위대에 소형 태극기를 배부했다. 또 시위대에 앞장서서 군중들을 이끌었는데, 이 시위에는 둘째 남동생인 이준업(李俊業)을 비롯해 윤영복·오용간·김만수·윤도치(尹道致)·안천종(安千鍾)·안상종(安尙鍾)·이영섭(李泳燮)·안덕환(安德煥)·김유곤(金有坤)·정백용(鄭伯用) 등이 참여했다.

그러나 곧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같은 해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송라청년회 덕업부장 등을 맡으며 고향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이어 나가려고 했으나, 일제의 감시와 견제가 심해지자 1922년부터 1923년 사이에 달성군 가창면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이발행상 및 엿장수를 가장하여 주민들에게 항일사상을 고취하였으며, 이후 신간회에도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1955년 3월 16일 별세했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3. 후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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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9년 수형인명부에는 영일군 송라면 화전리가 출생지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