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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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제인 일라
1.1. 개요
1.2. 일본서기 기록
1.3. 기타
2. 신라인 일라
2.1. 개요
2.2. 기록


1. 백제인 일라[편집]


이름
일라(日羅)
생몰년도
? ~ 583년
관직
달솔(達率)
국적
임나국백제

가야 임나의 마지막 왕 아리사등 = 기능말다의 아들. 임나국이 멸망한 후 백제로 가서 벼슬을 받아 달솔로 있었다.
선산인 위북국에 묻혔다. 위북국은 일본에 있다.


1.1. 개요[편집]


한국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고 《일본서기》에서만 등장한다. 일본서기의 서술이 대체로 그렇지만 일종의 신화적인 내용이 가미되어 있으며 일본 측 중심적으로 조금씩 고쳐 썼기 때문에 실제 아들인지, 그리고 상세한 행적이 모두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탁순국 멸망 후 백제에서 벼슬을 받아서 달솔이라는 직책에 있는 것으로 나온다. 정작 아버지 아리사등은 일본서기 기록상 결국 나라를 신라에 바쳐서 백제와 왜국에게 비난을 받고 있기 때문에 모순적인데, 훗날 마의태자처럼 아버지와 뜻이 맞지 않았던 듯하다.

그의 생애를 요약하면 신라에게 멸망한 임나(가야)를 일본 측이 부활시키기 위해[1] 임나의 일원이었던 탁순국 왕자인 일라를 찾아 데려오려 했으나, 일라가 일하고 있던 시기 백제의 위덕왕은 일본서기 기록상 일본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해 보내주지 않다가 일본 사신이 천황의 어명을 전하자 쫄아서 내주었다는 황당한 기사. 이후 천황에게 조언했다가 이를 본 백제 신하들이 죽이려 하자 몸에서 스스로 불을 내서 겁을 준 후 죽었다가 살아났다 다시 죽었다고 한다.

프로파간다 등을 빼고 정황을 분석해본다면 결국 백제인들이 백제에 붙었던 멸망한 가야 소국의 왕자를 호송해서 일본에 파견했다가 그가 다시 일본 측에 붙으려 하자 죽여버렸다는 내용인데 성왕 대에 백제가 신라에 무참히 깨지고 난 후 위상이 크게 실추되어 가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가고 동맹이었던 일본과도 갈등이 생겼다고도 볼 수 있다.


1.2. 일본서기 기록[편집]


아래 내용은 일본서기 권20 비다츠 덴노 中.

  • 가을 7월 1일: "우리 선고 덴노의 치세에 신라는 내관가(內官家)[2]인 나라를 멸망시켰다. 아메쿠니오시하라키히로니하노스메라미코토(天國排開廣庭天皇) 23년에 임나는 신라에게 멸망하였다. 그러므로 신라는 우리 내관가를 멸망시켰다고 말한 것이다.], 선고덴노는 임나를 회복하고자 꾀하였다. 그러나 이루지 못하고 죽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로써 짐은 신령스러운 계책을 받들어 다시 임나를 일으키고자 한다. 지금 백제에 있는 히노아시키타노쿠니노미야쓰코 아리사등(火韋北國造 阿利斯登)의 아들 달솔(達率) 일라(日羅)는 어질고 용맹하다. 그러므로 짐은 그와 함께 도모하고자 한다." 라고 말하였다. 곧 기노쿠니노미야쓰코 오시카쓰(紀國造 押勝)와 기비노아마노아타이 하시마(吉備海部直 羽嶋)를 보내어 백제에 불러들였다.

  • 겨울 10월: 기노쿠니노미야쓰코 오시카쓰 등이 백제에서 돌아왔다. 조정에 "백제국의 왕은 일라를 아까워 (일본으로) 보내려 하지 않습니다." 라고 보고하였다.
    • 이 해에 또 기비노아마노아타이 하시마를 보내어 일라를 백제에서 불렀다. 하시마(羽嶋)는 이미 백제에 가서 먼저 따로 일라를 만나고자 혼자 집의 문 앞으로 갔다. 잠시 후 집 안에서 나온 한(韓)의 부인이 한어(韓語)로 '너의 뿌리를 내 뿌리 속에 넣어라'.라고 말하고, 곧바로 집 안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하시마는 곧 뜻을 알아듣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에 일라가 맞이하여 손을 잡고 자리에 앉게 하였다. 몰래 "제가 은밀히 들으니, 백제국주는 천조(天朝)를 의심하여 신을 보낸다면 머무르게 하고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아까워하면서 보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칙을 알릴 때 엄하고 무서운 안색을 드러내면서 재촉하여 급히 부르십시오."라고 고하였다. 하시마는 곧 그 계책에 따라 일라를 불렀다. 이에 백제국주는 천조를 두려워하여 감히 칙을 어기지 못하였다. 백제국주는 일라, 은솔(恩率) 덕이(德爾)[3]‧여노(余怒)[4]‧기노지(奇奴知)[5], 참관(參官) 및 다사(柁師) 덕솔 차간덕(德率 次干德)[6]‧수부(水夫)[7] 등 약간의 사람을 보냈다.
일라 등이 기비(吉備)의 고지마(兒嶋)의 둔창(屯倉)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오토모노 아라테코노무라지(大伴 糠手子連)를 보내어 위로하고, 다시 대부(大夫) 등을 나니와관(難波館)[8]에 보내어 일라를 찾아보게 했다. 이때 일라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문 앞에 이르러서 곧 건물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절도 있게 무릎을 꿇고 절하며 한탄하기를 “히노쿠마노미야니아메노시타시라시메스스메라미코토(檜隈宮御寓天皇)때에 우리 주군(君) 오토모노 가나무라노오무라지(大伴金村大連)가 국가를 위하여 바다 밖에 사신으로 갔던 히노아시키타노쿠니노미야쓰코 오사카베노유게이 아리사등(火葦北國造 刑部靫部 阿利斯登)의 아들 신(臣) 달솔 일라는 천황의 부름을 받고 두려워하며 내조(來朝)했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갑옷을 벗어 천황에게 바쳤다. 천황은 아토(阿斗)의 구와노이치(桑市)에 관사(館舍)를 지어 일라를 머물게 하고 바라는대로 공급해 주었다. 또 아베노 메노오미(阿倍目臣)와 모노노베노 니에코노무라지(物部 贄子連)‧오토모노 아라테코노무라지를 보내어 일라에게 국정을 물었다. 일라가 대답하기를 “천황이 천하를 다스리는 바의 정치는 반드시 백성들을 보호하고 기르는데 있습니다. 어찌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도리어 멸망에 이르려하십니까. 그러므로 지금 논의하는 자들로서 조정에 있는 오미(臣)‧무라지(連)의 두 미야쓰코(造)에서【두 미야쓰코(造)란 구니노미야쓰코(國造)와 도모노미야쓰코(伴造)이다.】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유하게 하고 부족함이 없게 하십시요. 이렇게 3년을 하면 양식과 병사가 풍족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즐겁게 하여 물불을 꺼리지 않고 나라의 어려움을 함께 근심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선박을 많이 만들어 진(津)마다 줄지어 두고 객인[9]들이 보게 하여 두려운 마음을 일으키게 하십시요. 그리고 유능한 사신을 백제에 보내어 그 국왕을 부르되 만일 오지 않으면 태좌평(太佐平)‧왕자(王子) 등을 부르십시요. 그러면 저절로 복종할 마음이 우러나올 것이니, 그런 뒤에 죄를 물어십시요”라 하였다. 또 “백제인이 꾀하여 ‘배 3백 척으로 쓰쿠시(筑紫)를 달라고 하자'라고 했습니다. 만약 그것이 진실로 청하는 것이라면 겉으로는 (쓰쿠시를) 내려주십시요. 그러면 백제는 새로 나라를 세우려고 반드시 먼저 여자들과 아이들을 배에 싣고 올 것입니다. 국가에서는 이 때를 대비하여 이키(壹伎)‧쓰시마(對馬)에 복병(伏兵)을 많이 두었다가 이르는 것을 기다려 죽이십시요. 오히려 속임을 당하지 말고 중요한 곳마다 튼튼한 요새를 쌓으십시요”라 아뢰었다.
이에 은솔(恩率)‧참관(參官)이 나라로 되돌아 갈 때에【옛 책에 의하면 은솔 한 명, 참관 한 명이라 하였다.】 몰래 덕이(德爾) 등에게 “내가 쓰쿠시(筑紫)를 지나갈 때 쯤을 헤아려 너희들이 몰래 일라를 죽인다면 내가 왕에게 모두 아뢰어 높은 벼슬을 내리도록 하고 자신과 처자식들에게도 후에 영예를 내리도록 하겠다”라 하였다. 덕이(德爾)‧여노(余奴)가 모두 수락했다. 참관 등은 드디어 지카(血鹿)에서 출발하였다. 이때 일라는 구와이치 마을(桑市村)에서 나니와관(難波館)으로 옮겼다. 덕이 등은 밤낮으로 서로 모의하여 죽이고자 하였는데 이때에 일라의 몸에서 빛이 나 불꽃 같았으므로 덕이 등은 두려워서 죽이지 못하였다. 드디어 12월 그믐에 빛을 잃기를 기다려 죽였다. 일라가 다시 살아나서 “이는 내가 부리던 노비(奴) 등이 저지른 짓이지 신라가 한 일이 아니다”라는 말을 마치고 죽었다.【 마침 이때에 신라 사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천황이 니에코노오무라지(贄子大連)와 아라테코노무라지(糠手子連)에게 명하여 오고오리(小郡)의 서쪽 부근 언덕 앞에 거두어서 장사 지내게 하고, 그 처자식과 수부 등은 이시카와(石川)에 살게 했다. 이에 오토모노 아라테코노무라지가 논의하여 “한 곳에 모여서 살면 변고가 생길까 두렵다”라 하였으므로 처자식들은 이시카와의 구다라 마을(百濟村)에 살게 하고 수부들은 이시카와의 오토모 마을(大伴村)에 살게 했다. 덕이 등을 붙잡아 시모쓰쿠다라(下百濟)의 가와타 마을(河田村)에 두고 몇몇 대부(大夫)를 보내어 그 일을 따져 물었다. 덕이 등이 죄를 자백하여 “진실로 이는 은솔‧참관이 시켜서 한 짓입니다. 우리들은 그 밑에 있기 때문에 감히 거스릴 수 없었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대부들은 덕이 등을 옥에 가두고 조정에 보고했다. 조정은 아시키타(葦北)에 사신을 보내어 일라의 권속(眷屬)들과 덕이 등을 모두 모이게 한 후 뜻대로 죄를 판결하게 했다. 이때 이시키타노키미(葦北君) 등이 (덕이 등을) 받아서 모두 죽여 미메시마(彌賣嶋)에 던져버리고【미메시마는 아마 히메시마(姬嶋)일것이다.】 일라를 이시키타(葦北)에 이장(移葬)시켰다. 그 후 바닷가에 있는 사람들이 “은솔의 배는 바람을 만나 바다에 빠졌고, 참관의 배는 쓰시마(津嶋)에서 떠돌아 다니다가 비로소 돌아갈 수 있었다”라 하였다.


1.3. 기타[편집]


이 때 일본서기 기록을 그대로 본다면 위덕왕규슈 진출을 노린것처럼 묘사되지만 별다른 군사 활동이 기록된 바가 없는 점을 보면 시도로만 끝났거나, 일라의 과장으로 추정된다.


2. 신라인 일라[편집]


난중잡록》, 《간양록》, 《성호사설》 등에서 나타나는 신라의 인물.


2.1. 개요[편집]


문헌마다 조금씩 기록이 다르지만 신라에서 왜국으로 건너가 죽은 후에 애탕산(愛宕山)의 권현수신(權現守神)이 되었다는 것은 같다. 1번 항목의 일라와 한자가 똑같으며 권현(權現)이 불교 용어라는 점에서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2.2. 기록[편집]


有天照皇大神宮者。其始祖女神也。有熊野山權現守神者。徐福之神也。愛宕山權現守神者。新羅人日羅之神也。又有春日大明神八幡大菩薩大朗房小郞房等神。其麗不億。其約盟禁戒。必引此等神以爲誓。間有燃臂斷筯 而不忍破盟者。必曰畏天道畏雷霆云。

천조황대신(天照皇大神)은 그이들의 시조가 여신(女神)이요, 웅야산권현수신(熊野山權現守神)[10]

서복(徐福)의 신이며, 애탕산권현수신(愛宕山權現守神)[11]은 신라 사람 일라(日羅)의 신이요, 또 ‘춘일대명신(春日大明神)’[12] · ‘팔번대보살(八幡大菩薩)’[13] · ‘대랑방(大郞房)’[14] · ‘소랑방(小郞房)’[15] 등의 신이 있는데 그 수효는 한없이 많습니다. 그이들이 맹세를 하거나 금계(禁戒)를 할 때에는 반드시 이런 신들을 끌어대어 맹세를 하는데 이따금 팔을 지지고 힘줄이 잘려도 차마 맹세를 깨뜨리지 않는 것은 반드시 천도(天道)와 천둥을 무서워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난중잡록


新羅人日羅。入倭中。倭人尊事之。爲大郞房。及其死也。尊祠爲愛宕山權現守神。擲餞米求福者。至今輻輳。神門塡咽如市。淸正等。尤爲尙鬼。蓋其風俗。小黠大癡。衆所尊譽如是矣。

신라 사람 일라(日羅)가 왜국에 들어가니 왜인들이 존대하고 섬기어 대랑방(大郞房)로 삼았습니다. 일라가 죽자 그 사당을 높여 ‘애탕산권현수신(愛宕山權現守神)’이라 하였는데, 돈과 쌀을 놓고 복을 비는 사람이 지금도 폭주하여 신사의 문전이 막혀 시장과 같았습니다. 청정(淸正) 등이 더욱 귀신을 숭상하니 대개 그 풍속이 작은 것에는 영리하되 큰 것에는 어리석어 군중이 존대하고 영예로 여기는 것에는 그 시말(始末)을 살피지 않고 한결같이 추종하여 한번 빠지면 종신토록 헤어나오지 못하니 오랑캐의 고루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간양록


日本之俗尤甚熊野徐福最古如新羅人日羅為愛宕權現神求福者輻輳神門如市云

일본의 풍속에서는 더욱 심하니 웅야(熊野)의 서복(徐福)이 가장 오래된 것이고, 신라 사람 일라(日羅) 같은 이는 애탕(愛宕)의 권현신(權現神)이 되었는데 복을 구하는 자들이 몰려들어 그 신문(神門)이 저자와 같다고 한다.

성호사설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지으며 일라를 연오랑과 세오녀 전설에서 연오랑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고 하였으나 근거가 빈약하여 분명하지 않다고 하였다.

고려사》 지지(地志)에 따르면 고려 초기에 임정(臨汀)을 영일(迎日)이라 고쳤다 하였으니, 영일은 신라 때에 시작된 명칭이 아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말하기를 “이 고을이 해가 뜨는 양곡(陽谷)에 있기 때문에 영일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속담에 전하는 영오(迎烏)의 일이 어찌 그처럼 터무니없을 수 있으랴? 신라 사람들이 괴이함을 좋아하는 까닭이 이러하니 고증할 수 없다.” 하였으니, 그 말이 타당하다. 《동국통감》 및 《동사찬요》도 정사(正史)라 할 수 있는데 어찌하여 그 사실을 취하였을까. 강항(姜沆)의 《간양록》에 “신라 사람 일라(日羅)가 왜국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죽어 애탕산신(愛宕山神)이 되었는데, 왜인들은 그를 높이 받든다.” 하였는데, 지금 혹자는 이를 영오의 일이라 하나 이를 분명한 사실이라고 부회하여 근거로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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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백제나 왜국은 신라와는 사이가 나쁘고 백제-가야-왜 연합으로 신라에 대응하려 했기 때문에, 6세기 후반까지는 신라에 흡수합병당한 가야를 부활시키려고 했었다. 결국 다 실패하고 7세기쯤 되면 가야 지방민들이 신라 사회에 동화되어 이런 가야 부흥 시도도 끝나게 된다.[2] 일본의 속국이라는 뜻이다. 임나(금관 가야)를 자신의 속국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일본서기의 프로파간다가 담긴 단어이다.[3] '도쿠니'라는 음이 달려있다.[4] '요누'라는 음이 달려있다.[5] '가누치'라는 음이 달려있다.[6] '시칸토쿠'라는 음이 달려있다.[7] 원문에는 가코(水手)라고 되어있는데 이름이 아니라 딸려온 뱃사람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8] 현재의 오사카에 위치했던 사신 접대 장소.[9] 이웃나라 사신.[10] 구마노야마노곤겐노카미. 곤겐은 일본 신토에서 부처가 신의 모습을 빌려 나타난 것을 가리킨다.[11] 일본어로 읽으면 아타고야마노 곤겐노카미이다.[12] 가스가 대명신.[13] 하치만 다이보사쓰.[14] 타로보[15] 고로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