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산군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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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全山郡夫人 李氏.

생몰기간: 1764년 12월 19일 - 1819년 6월 4일.

조선 후기의 왕족. 생전에는 왕족 신분이 아니었다.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첩. (본부인은 상산군부인 송 마리아[1]이다.) 본관은 전주.

1970년대에 경기도 김포군 통진면에 있던 그녀의 묘소가 발견되고 비석 비문을 판독하면서 알려졌다. 그 덕인지 1980년대의 교과서나 역사서에는 전계대원군은언군의 본처 상산군부인 송 마리아의 아들인 것으로 기록된 역사서, 논문 자료들도 몇 있다.


2. 생애[편집]


본관은 전주 이씨라는데, 당시 조선은 중종 이후로는 동성동본 금혼령이 거의 법처럼 적용되던 시대였다. 아버지는 전주 후인 유학 이덕희라고 김문근이 기록했는데, 계파는 불분명하다.

1779년 은언군의 첩이 되었으며, 은언군홍국영상계군 입양 사건으로 탄핵, 유배당하기 전이었다. 아들 2명을 얻었는데 첫 아들은 일찍 죽고, 둘째 아들이 이쾌득, 훗날의 전계대원군에 추증되는 이광이다.[2] 첫 아들이 승정원일기나 실록에 나오는 이철득인지, 아니면 이 아들과 이철득은 별개 인물이고 이철득은 은언군의 다른 첩이 낳은 인물로서 이성득(1775)의 친동생인지는 불분명하다.[3] 어찌 됐든 첫 아들은 일찍 죽었다. 이로서 전계대원군이 상계군 이담이나 풍계군 이당, 이성득의 이복 동생인 것은 확인된 셈.

1819년 6월 4일 강화도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승정원일기에 보면 1819년 6월 5일#과 6월 7일#에 쾌득 생모의 죽음을 보고한 기사가 있다. 이로써 쾌득이 전계대원군의 30대 중반까지 쓰던 이름임이 밝혀졌다. 이쯤 되면 초명이라 보기도 힘들다.


3. 기타[편집]


반면 1817년에 고문으로 죽은 이성득의 생모는 1821년 12월 16일에 강화도에서 사망했으므로#, 이성득과 전계대원군은 이복형제임을 알 수 있다. 또 전산군부인은 1801년에 사약을 받고 순교한 상산군부인 송 마리아와는 동일인물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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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로부터 세례성사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 며느리인 평산군부인 신 마리아와 함께 순교했다.[2] 이름을 이쾌득에서 해동으로 고쳤다가 광으로 고쳤다.[3] 이철득을 풍계군 이당으로 보자니 풍계군은 선원보략에 1783년생이고 철득은 전계대원군보다 5년 연상이라서 맞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