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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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 육군의 군인. 최종 계급은 육군 소장이며 제21보병사단장과 육군제2훈련소장을 역임했다.
2. 생애[편집]
광주동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3년 갑종 182기로 임관했다.
대령 시절 제39보병사단 참모장, 육군제2훈련소 29교육연대 연대장, 육군교육사령부 전투교리처장을 역임했다. 준장 진급 후에는 제32보병사단 작전 부사단장과 육군교육사령부 교육훈련부장을 역임했으며, 1993년 소장으로 진급 후 제21보병사단장, 육군교육사령부 전력개발부장, 건군기념사업단 군외사업부장, 육군제2훈련소장을 역임했다.
3. 여담[편집]
- 21사단장 재임시 교육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사단 전부대원들의 전투요원화를 지향했다. 그 일환으로 사단 직할대 소속 장병들의 전투능력 향상을 위한 병공통과제 훈련을 집중적으로 실행하고 이를 사후측정하여 관리하였다. 또한 사단 직할대 소속 장병들에게 혹한기의 GOP 환경을 체험하고 백두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동료애, 자부심을 함양할 수 있도록, 매년 1월과 2월에 65연대와 66연대가 담당하고 있던 GOP 전선에 교대로 투입하여[1] GOP에 투입된 소초원들과 함께 생활하고 경계근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 21사단장 재임시 평소 엄정한 군기를 유지할 것을 간부들과 병사들에게 지속적으로 강조하였으며, 전임자인 서충일 소장의 갑작스런 보직해임[2] 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했던 21사단을 정상화시키고 모든 장병들이 임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성공적인 지휘활동을 수행했다는 평을 받았다.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1994년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 21사단장 재임 중인1994년 12월 3일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격전지였던 양구지구 전투(도솔산 전투, 펀치볼 전투, 가칠봉 전투, 피의 능선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백석산 전투 등)에서 전사한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고자 강원 양구군 방산면 건솔리에 양구전투위령비를 건립하였다.
- 육군훈련소장 재임시 훈련병의 아버지 200여 명을 초청하여 2박3일 동안 훈련병인 아들과 함께 내무생활도 하고 똑같이 훈련도 받게하는 병영체험 프로그램을 도입했었다. 당시 언론보도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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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직할대 별로 날짜를 조정하여 소규모 분대급 인원을 편성한 후 완전군장 행군으로 GOP 소초에 도착한 후 열흘정도 공동임무 수행 후 다시 완전군장 행군으로 자대 복귀하는 형식이었다. [2] 사생활과 관련된 투서가 청와대에 접수되었다는 것이 표면적 이유였으나 최전방의 전투사단장을 투서 하나 때문에 보직해임시킨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 보다는 서충일 장군이 하나회의 핵심 멤버라는 점에서 김영삼 정부의 군내 사조직 해체를 목적으로 하는 군개혁의 일환으로 보는 관점이 보다 설득력있다. 당시 언론보도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