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육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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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진
丁陸鎭


파일:정육진준장.png

본관
나주 정씨 (羅州 丁氏)[1]
학력
한성중학교 (졸업)
단국대학교 (법학 / 학사)
군사경력
복무
대한민국 육군
기간
1951년 1월 ~ 1993년 8월[2]
임관
갑종 57기
최종계급
준장
최종보직
육군3사관학교 대학차장
주요보직
1군단 정훈참모
주월한국군사령부 대변인
주요수훈
화랑무공훈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육군의 前군인. 현역시절 최종계급은 준장, 최종보직은 육군3사관학교 대학부 차장이다. 3사관학교 교수사관으로서 정년으로 인한 전역당시 국군 최장근속기록 보유자이자 6.25 전쟁에 참전한 마지막 현역 군인이었다. 전역을 하루 앞두고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특명으로 준장 진급 후 전역했다.


2. 생애[편집]


1933년 7월 20일 충남 천안군에서 태어났다. 서울 한성중학교 재학중 터진 6.25 전쟁으로 인하여 피난을 갔다가, 1951년 1.4 후퇴 이후 18세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했다.

간단한 군사교육을 받은 후 육군 제8사단에 배치되어 군번도 없이 복무하다 군번을 받았으며, 이후 횡성 전투, 김일성고지 탈환 전투 등에 참전했다. 김일성고지 탈환 전투중 지휘관이던 중대장의 지휘관상에 감명 받아 1953년 4월 갑종간부후보생에 지원하였고 최종적으로 합격하여 군사훈련을 받은 후 9월 갑종 57기로 소위 임관했다.

11사단 9연대에서 소대장으로 복무 후 1962년 단국대학교에 위탁 교육을 받아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1963년 3월엔 미국으로 유학하여 포트 브랙의 특수전학교 심리전과정을 이수했다. 당시 그와 함께 미국으로 유학한 장교 명단에는 최세창[3]과 천용택[4] 등이 있었다.

1966년 5월에는 주월 맹호사단 공보장교로서 월남전에 참전했고, 이후 육군 정훈공보학교 과정을 수료한 후 1971년 다시 월남으로 파병되어 주월한국군사령부 대변인으로서 복무했다. 공보장교로서 한국군의 위상을 크게 알렸다고 채명신 장군의 칭찬을 받았으며, 파병기간 중 화랑무공훈장을 두번 수여받았다.

월남에서 돌아온 후 육군 제1군단 정훈참모를 지냈으며, 육군3사관학교 교수부 일반학처장으로 생도 양성에 힘을 썼고, 경북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3사관학교에서 대학부차장으로 근무했다. ‘국민윤리’와 ‘현대 이데올로기론’ ‘공산주의 전략전술론’ 등을 생도생들에게 강의했다.

60세 정년으로[5] 인한 전역을 하루 앞두고 있던 1993년 8월 30일,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청와대에 초청되어 다과회를 갖고 준장으로 진급했다. 다음날인 1993년 8월 31일 42년 8개월의 군생활을 마치고 준장으로 전역했다. 준장 진급은 당시 국군 최장근속기록 보유자이자 6.25 전쟁에 참전한 마지막 현역 군인이라는 점과, 40년이 넘는 성실한 복무에 대한 예우였다. 게다가 당시 하나회등 군 사조직을 척결하고, 그 대신 국가방위에 헌신하는 진짜 군인들을 확실히 우대하겠다는 문민정부의 상징적 결정이기도 했다.

전역 이후 안보강연등을 나가며 활발한 활동을 했으나 간암 선고 이후 갑작스래 건강이 악화되어 1994년 1월 27일 국군통합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6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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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첨공파(典籤公派)-별제공계(別提公系) 28세 ○진(鎭) 항렬. [2] 1951년 1.4후퇴 직후 학도병으로 입대하여 참전했고, 1953년 9월 갑종57기 소위 임관.[3] 육사13기·대장예편·12.12 군사반란 당시 3공수여단장·합참의장·국방장관[4] 육사16기·중장예편·합참전략기획본부장·국회의원·국정원장[5] 사관학교 교수는 다른 장교들과 다르게 60세까지 정년을 보장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