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 L.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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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해군 전투비행사
제시 르로이 브라운
Jesse LeRoy Brown


파일:제시 L. 브라운 이미지 1.jpg

별명
제시(Jesse)
이로쿼이 13(Iroquois 13)
출생
1926년 10월 13일
미국 미시시피 해티즈버그
사망
1950년 12월 4일 (향년 24세)
북한 장진호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복무
미합중국 해군(1946~1950)
최종 계급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px-US_Navy_O1_insignia.svg.png 해군 소위
주요 이력
미합중국 해군
주요 참전
6.25 전쟁
장진호 전투
주요 서훈
수훈 비행 십자장 1회
퍼플 하트 훈장 1회
에어 메달 1회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1.1. 궁핍함
2.1.2. 비행에 대한 동경
2.1.3. 인종 분리 정책 반대
2.2. 전투비행사가 된 제시
2.3. 6.25 전쟁, 그리고 최후
3. 평가
4. 매체에서



1. 개요[편집]


}}}
제시 L. 브라운의 생애를 요약한 영상

미국해군 전투비행사. 미군 내 인종 차별 정책이 철폐된 이후 처음으로 해군 전투비행사가 된 흑인이었으며, 6.25 전쟁에서 최초로 전사한 미국 흑인 해군 장교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치카소족, 그리고 촉토족의 혼혈이지만 버락 오바마의 경우처럼 미국 흑인으로 분류된다.


2. 생애[편집]


제시 L. 브라운은 존 더들리 브라운(John Dudley Brown, 1892 ~ 1959)과 줄리아 애나 (린지) 브라운(Julia Anna (Lindsey) Brown, 1896 ~ 1951) 부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친형으로 마빈 허셸 브라운(Marvin Herschel Brown, 1919 ~ 1978), 윌리엄 더들리 브라운(William Dudley Brown, 1922 ~ 2000)이 있으며, 다른 형제 플레처, 루라, 누나 조니 등이 있었다. #

조상에 대해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치카소족, 그리고 촉토족 등 다양한 혈통의 조상이 있어서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볼 수도 있지만 1926년 미시시피주 해티즈버그에서 태어났을 때 즈음 혈통 빼고는 미국 남부 출신 흑인들[1]과 마찬가지로 대우받았고, 이는 이후 제시의 일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제시의 유년기 일생을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궁핍함, 비행에 대한 동경, 그리고 인종 분리 정책 반대였다.


2.1. 유년기[편집]



2.1.1. 궁핍함[편집]


유년기부터 제시의 일생은 "궁핍함"으로 점철되었다.

미시시피주 해티즈버그에서 태어났을 때 즈음 아버지 존 브라운은 식료품 창고에서 일하는 근로자였고 어머니 줄리아 린지 브라운은 학교 교사였지만 제시, 마빈, 윌리엄, 플레처, 루라 등 4명의 형제, 누나 조니 등을 부양해야 하는 등 부담감이 만만치 않았고, 1929년 대공황이 터진 이후 이사를 여러번 갔다.

첫번째 이사는 1929년 식료품 창고 직장을 아버지가 잃은 후 있었던 일이다. 아버지 존은 제시의 가족을 해티즈버그에서 16km 떨어진 도시 파머스 크로싱(Palmer's Crossing)으로 데리고 갔고, 1938년 정리해고 당하기 전까지 테레빈유 공장에서 일했다. 이 와중에 집의 상태는 좋지 않았는지 보일러나 옥내 화장실이 안되었고, 벽난로에만 의존하면서 추운 겨울을 보내려 하다 형제 윌리엄이 넘어져서 심한 화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

두번째 이사는 1938년 공장 직장을 아버지가 잃은 후 있었던 일이다. 가족은 파머스 크로싱에서 거리가 차를 타면 28km 떨어진 럭스(Lux)로 또 데리고 갔고, 이번엔 아버지가 농장에서 소작인으로 일했다. 이 시점 어머니도 직장을 잃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사를 자주 가면서 교사 일을 오래 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집은 난방 문제는 없었지만 집이 이전보다 훨씬 작아서 형제들과 침대를 같이 썼으며[2], 집안 형편 상 자동차가 대중교통을 쓸 수 없었는지[3] 집에서 4.8km 떨어진 원룸 학교까지 매일 걸어서 수업에 출석을 했다. 하지만 학업에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는데, 독실한 침례교도인 가족을 따라서 형제 윌리엄, 어머니 줄리아와 함께 주말에 교회에서 합창단을 했고[4] 아버지를 따라가서 농장에서 옥수수와 목화 수확하는 것을 도왔다.


2.1.2. 비행에 대한 동경[편집]


이 2번의 이사 과정에서 제시가 흥미를 가진 분야가 있었는데, 바로 비행기 비행이었다.

1932년 파머스 크로싱에 살던 시절 아버지 존은 에어쇼에 제시를 데리고 갔다. 제시는 에어쇼에서 비행기를 본 이후 비행에 관심을 가졌고, 집 근처의 먼지가 쌓인 이착륙장에 자주 방문했으며, 이착륙장 정비사에게 쫓긴 적이 있었다. #

어렸을 때 제시는 "진지하고, 위트있고, 잘난 체하지 않고, 매우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집에서 멀리 있는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1]

1939년 제시는 흑인 신문사 Pittsburgh Courier의 신문 배달원으로 일하면서 전투비행에 대한 신문들을 접했으며, Popular Aviation와 Chicago Defender 등 비행 관련 잡지를 읽으면서 해군 전투비행에 큰 관심을 보였다.


2.1.3. 인종 분리 정책 반대[편집]


제시는 당대 미국에 만연한 인종 분리 정책에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했는데, 1937년 11살 때 미국 대통령 FDR에게 미국 흑인 전투비행사들이 미국 육군 항공대에서 일할 수 없는 현실을 비판했으며, 백악관에서 다른 관점을 이해한다는 형식적인 답장을 받았다.

1939년 13살 때 고모의 도움을 받아서 다닌 해티즈버그에 위치한 학교 유레카 고등학교는 인종이 분리된 학교 중 하나였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시는 농구, 미식 축구, 그리고 육상 경기에서 우수한 선수로 뛰었으며, 성적도 매우 우수해서 1944년 졸업식 개회사를 한 학생이 되었다.

여기서 아내가 될 데이지 펄 닉스(Daisy Pearl Nix)를 만났다. 제시 사후 데이지의 인터뷰에 의하면 고등학교 학년말에 열리는 무도회인 "프롬에서 같이 춤을 추었고 데이트를 자주 하고, 선물을 주고받는 등"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랑하는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

고등학교 졸업 이후 브라운은 콜럼버스에 가는 인종 분리된 기차를 타고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에 입학했다. 미국 육군 전용 술집 Holmes Club에서 일하면서 600달러를 벌었고, 600달러로 대학비를 냈다. 그러나, 술집 사람들은 제시에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고, 술집에서 일하는 제시를 온갖 인종차별적인 언어로 괴롭혔다. 제시는 이에 신경쓰지 않고 건축공학을 전공, Lazarus 백화점에서 수위로 일하고, 펜실베이니아 철도 철도회사에서 유개 화차를 옮기는 일을 하고, 여름방학 동안 해티즈버그에 돌아와서 Barnes Cleaners 세탁소에서 일하는 등 혼자서 수업비를 내기 위해 고생했다. 그러나 여전히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2.2. 전투비행사가 된 제시[편집]


대학교에 있을 때 제시는 전투비행에 대한 관심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고, 많은 신병 모집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 해군이 해군 전투비행 조종사를 임관하는 V-5 해군항공 장교후보생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여기서 제시는 미합중군 해군 예비대에 입대했으며, 1947년 8월까지 아이오와 주의 Ottumwa 해군항공기지에서 체력과 기술 관련 프로그램을 이수한 이후 플로리다 주의 펜사콜라 해군항공기지에서 비행기 조종 교육을 이수했다. 해군 사관 후보생은 프로그램이 끝나기 전까지 결혼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펜사콜라에서 제시와 데이지 펄 닉스는 비밀리에 결혼했다. 프로그램을 이수할 때 교관과 생도에게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지만 성공적으로 프로그램을 마쳤다.

1949년 1월 USS Leyte 소속 전투비행대대 32의 비행중대 일원이 되어서 18개월 동안 미국 동부 대서양 연안 지역에서 비행 훈련 연습에 여러번 참여했다. 6.25 전쟁이 터졌을 즈음 제시는 비행중대 동료들 사이에서 "경험이 풍부한 조종사이자 유능한 반장"으로 평가받았다. 다른 대원과 잘 어울리진 못했지만 대신 아내와 시간을 많이 보냈다.[출처2]

1949년 4월 26일 미국 해군 소위로 진급한 이후 로드아일랜드 주의 Quonset Point 해군항공기지에서 미국 함대전력사령부의 일원이 되었다. 제시는 소위로 진급 한 이후 이전과는 달리 동료들에게 호의적으로 대우받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버지니아 주의 Norfolk 해군항공기지에서 근무를 시작했으며, 1949년 12월 외동딸 파멜라 앨리스 브라운(Pamela Elise Brown)이 태어났다.

이후 윙맨이 되는 비행중대 동료 톰 허드너와 절친한 관계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허드너의 전기를 쓴 아담 마코스의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Tom Hudner’s Catholic faith) It influenced Tom in a very quiet way, more from a social justice perspective. I’m a Catholic, Tom is a Catholic, and we’re taught to love everyone equally…Tom grew up with that principle. His father told him, ‘A man will reveal himself through his character, not his skin color.’ That set up his friendship with Jesse.

톰 허드너의 가톨릭 신앙은 톰을 매우 조용한 방법으로 사회 정의의 관점에서 더욱 톰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톰도 가톨릭 신자이고요.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사랑하라고 교육받습니다... 톰은 그런 원칙과 함께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인간은 성격으로 자신을 보여주지, 피부색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란다.'라고 알려주었죠. 그 원칙은 그와 제시의 우정을 세웠습니다.

톰 허드너의 전기 작가 아담 마코스의 말. #



2.3. 6.25 전쟁, 그리고 최후[편집]


Just tell Daisy how much I love her.

데이지에게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주게.

1950년 12월 4일 제시의 유언 #


6.25 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에서 6대의 콜세어들[6]중국 인민지원군에게 포위된 미합중국 해병대를 지원할 때 윙맨이자 절친한 친구톰 허드너와 함께 보우트 F4U 콜세어를 타고 지원했다. 이때 제시의 콜사인은 "이로쿼이 13(Iroquois 13)"였다.

제시의 전투기는 1950년 12월 4일 중공군의 총탄에 연료관이 맞아서 눈이 쌓인 설산에 추락했으며, 윙맨 톰 허드너가 자신의 전투기를 일부러 추락하게 한 뒤 접근해서 도와주려고 시도했지만, 다리가 비행기 잔해에 박혀서 잔해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허드너는 구조 헬기의 구조대와 함께 비상용 도끼로 45분간 제시의 커세어를 내려쳤으나 제시의 다리를 빼낼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제시는 추운 날씨로 인한 동상, 그리고 잔해에 박힌 다리의 출혈로 인해 의식을 잃게 되었다. 의식을 잃기 직전 허드너에게 위의 유언을 남겼고, 허드너는 알겠다고 말하고 현장에서 구조 헬기와 함께 빠져나왔다. 제시의 유해는 미해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찾을 수 없게 되었으며, 현재도 유해가 발견되지 않았다.

이후 허드너는 자신의 전투기를 일부러 추락시켜가며 동료를 구하려 시도한 공로로 명예 훈장을 받았다.


3. 평가 [편집]


He died in the wreckage of his airplane with courage and unfathomable dignity. He willingly gave his life to tear down barriers to freedom of others.

브라운은 용기와 불가해한 위엄과 함께 비행기 잔해에서 전사했습니다. 그는 자진해서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막는 장벽을 허물면서 희생했습니다.

1973년 2월 17일, USS Jesse L. Brown의 취역 기념식 당시 브라운의 윙맨 톰 허드너의 헌정사 #


제시 L. 브라운은 사후 수훈 비행 십자장, 퍼플 하트 훈장, 에어 메달을 수훈받았다. 이후 1973년 2월 17일 브라운의 이름을 딴 미합중국 해군 녹스급 호위함 USS Jesse L. 브라운이 취역했다.[7] 기념식에는 제시의 아내였던 데이지 브라운 손(Daisy Brown Thorne)[8]와 제시의 외동딸 파멜라 브라운이 참석으며, 제시의 윙맨이었던 톰 허드너가 헌정사를 맡았다.

4. 매체에서[편집]


2015년 아담 마코스 작가가 쓰고 톰 허드너가 협력한 톰 허드너의 전기 《디보션: 영웅, 우정과 희생의 서사(Devotion: An Epic Story of Heroism, Friendship, and Sacrifice)》에서 등장한다. 이후 이 전기는 2022년 영화 디보션으로 영화화되었다.

J. D. 딜라드 감독이 연출한 2022년 영화 디보션에서 등장한다. 배우는 조너선 메이저스가 맡았다.
[1] 미시시피주는 남북전쟁 당시 두번째로 아메리카 연합국에 합류한 주였으며, 그런 만큼 인종 분리 정책이 다른 남부 주들과 마찬가지로 심각했다.[2] 4명이 한 침대를 같이 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3] 1930년대임을 감안하면 대중교통이 별로 발달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현재도 그렇지만 대중교통이 잘 안되어 있는 지역이 많이 있다. 특히 미국 남부 주들이 그렇다.[4] 이를 보면 가창력은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밑에 언급되는 비행에 대한 동경 때문에 합창단 참여 이상으로 노래를 부르거나 그런 적은 없었다.[출처1] Dwight, Margaret L.; Sewell, George A. (2009), Mississippi Black History Makers, Oxford, Mississippi: University Press of Mississippi, ISBN 978-1-60473-390-7, 395쪽[5] 13살 때 간 걸 보면 성적이 정말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출처2] Dwight, Margaret L.; Sewell, George A. (2009), Mississippi Black History Makers, Oxford, Mississippi: University Press of Mississippi, ISBN 978-1-60473-390-7, 396쪽[6] 보우트 F4U 콜세어.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사용한 전투기이다.[7] 1994년 이집트에 매각되어 현재 이집트 해군 호위함 '다미야트' 함으로 남아있음.[8] 제시 사후 재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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