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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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카바분.png

1. 개요
2. 원인
3. 전개
3.1. 캘배재르 전선
3.2. 아그담 전선
3.3. 이란 국경 전선
4. 결과
5. 관련글


1. 개요[편집]


제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은 1988년 2월 20일부터 1994년 5월 12일까지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영유권을 놓고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소련 붕괴 이전에는 소련군이 아르메니아와 교전했다.


2. 원인[편집]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영유권은 소련 수립 이전부터 아르메니아인들과 아제르바이잔인 사이에서 첨예하게 대립해온 문제였다. 1918년부터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국경 문제를 이유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백군을 격파하고 캅카스 대부분을 장악한 볼셰비키 붉은 군대의 개입으로 종결되었으며 최종적으로 1923년 7월 7일에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결정으로 아제르바이잔 SSR 공화국에 귀속되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 SSR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특히 아르메니아 공산당 초대 제1비서인 아가시 한잔(Աղասի Խանջյան)은 스탈린에게 나고르노카라바흐와 나흐츠반의 영유권을 아르메니아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가 대숙청 기간에 찍혀 라브렌티 베리야에 의해 숙청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로도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해 아르메니아 SSR는 꾸준히 이의를 제기해 왔다.

1980년대 말 소련의 최고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민주화 정책인 페레스트로이카로 인해 소련의 공화국들은 자체적으로 다당제 선거를 실시하면서 지방자치권 역시 크게 강해졌다. 발트 3국우크라이나 등지에서 반체제 시위와 독립 요구가 대두되면서 소련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해체 노선을 밟게 됐다.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들은 1988년 2월 초부터 다시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르메니아 SSR로 귀속시킬 것을 요구하는 파업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1988년 2월 19일, 바쿠에서 이에 대응하는 반 아르메니아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때 시인 배흐티야르 바하브자대(Bəxtiyar Vahabzadə)와 역사가 쉴레이만 앨리야로프(Süleyman Əliyarov)는 신문에 공개서한을 게재해 나고르노카라바흐가 역사적으로 아제르바이잔 영토라는 근거를 제시하고 주장했다. 그러자 그 다음날인 1988년 2월 20일,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최고 소비에트의 아르메니아인 대표들이 아르메니아로의 귀속 동의를 천명했다. 곧이어 2월 22일에는 아제르바이잔 충성파였던 보리스 케보르코프(Բորիս Կևորկով, Борис Кеворков)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공산당 제1서기를 해임했다. 3월 10일에는 고르바초프가 소련 헌법 제78조에 근거해 "공화국 간의 경계선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하며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그 동안 나고르노카라바흐는 두 민족의 전쟁터로 변해버린 상태였다. 2월 20일에는 스테파나케르트 / 한캔디의 병원의 견습의인 아제르바이잔 여학생 2명이 강간당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2월 22일에는 아스케란(Ասկերան) / 애스개란(Əsgəran)에서 아르메니아인에 의해 두 명의 아제르바이잔인 청소년이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소련 부검찰관인 알렉산드르 카투세프(Александр Катусев)가 이 사건을 바쿠의 TV방송에서 발표하자 바쿠를 중심으로 아제르바이잔 SSR에서 반아르메니아 감정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제르바이잔 SSR은 나고르노카라바흐 내 아르메니아 통합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자치주를 없애고 카라바흐 지역을 공화국의 직할 통치 하에 두었다. 불과 일주일 뒤 수도 바쿠와 인접한 대도시 숨가이트(Sumqayıt)에서는 아르메니아인을 대상으로 한 아제르바이잔인 주도의 숨가이트 학살사건(Սումգայիթի ջարդեր / Sumqayıt hadisələri)이 일어난다. 두 나라의 사건에 대한 평은 판이하게 다르다. 아르메니아 쪽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이 자행한 잔악한 학살이라 비난하였으며,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계의 폭동으로 아제르바이잔인들의 인명 피해가 생겨 진압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해 3월에는 아르메니아 SSR 북부에서 구가르크 폭동(Quqark poqromu)이 벌어져 현지 아제르바이잔인을 집단린치하고 대략 18명(아르메니아 주장)-187명(아제르바이잔 주장)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1988년 3월 23일, 최고 소비에트는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르메니아 SSR에 귀속시키는 안을 거부했으며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예레반에 소련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소련군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혼란은 가라앉지 않고 나흐츠반과 나고르노카라바흐를 포함한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양측에서 민간인간 교전이 발생해 피해가 발생했다. 아제르바이잔 정부보고에 따르면 1987년부터 1989년 사이 216명의 아제르바이잔인이 학살당했다. 결국 1989년 12월 1일, 아르메니아의 최고 소비에트는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르메니아에 합병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같은 해, 아르메니아에서는 17만 명의 아제르바이잔인이, 아제르바이잔에서는 35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추방당했다. 여기까지는 보면 알겠지만 두 나라가 아직 독립하기 전에 벌어진 사건들이다. 이미 소련 해체 이전부터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격하게 대립하고 있었으며 양국민 간의 무력충돌도 벌어지고 있었다.

1991년에 소련8월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간 이후부터 모스크바 중앙정부의 연방 구성 공화국들에 대한 장악력은 약해졌다. 이에 나고르노카라바흐는 9월 2일 독립을 선언하였고, 11월 4일,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카라바흐에 경제 봉쇄로 대응했다. 아르메니아에서는 이미 카라바흐 지역의 아르메니아 귀속을 요구하는 시위가 수도 예레반에서 수 차례 터진 터라 소련 소속의 두 공화국의 분위기는 더욱 나빠졌고, 결국 소련이 무너진 뒤 1992년에 독립한 두 나라의 전쟁이 터지고야 말았다. 1991년 11월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 독립 세력이 대다수인 스테파나케르트를 포위하고 무차별적인 포격을 퍼부었다. 그 결과 최소 169명에서 최대 2천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하였지만 아르메니아는 방어에 성공하였다.

1992년 2월, 아르메니아는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유일한 공항이 위치한데다 스테파나케르트를 포격하는 아제르바이잔군 포병이 위치한 호잘르(Xocalı·Khojaly)[1]를 점령했다. 아르메니아측은 아제르바이잔계 주민이 대다수인 이 마을에서 민간인 200여 명을 학살했다. 이 사건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호잘르 학살사건(Xocalı soyqırımı / Խոջալուի արյունահեղություն)으로 칭하며 아르메니아의 대표적인 전쟁범죄로서 규탄하고 있다.


3. 전개[편집]



일자별로 본 전쟁 경과. 아제르바이잔이 얼마나 많은 땅을 뜯겼는지 알 수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zerbaijan_districts_azeri.png
[2]
과거 아제르바이잔의 구(분홍색)와 나고르노카라바흐(초록색)
1990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양쪽은 소련군의 진압을 겪으며 독자적인 민병대의 필요성을 체감한다. 아르메니아는 1990년 1월 경부터 민병대를 조직하여 바쿠 계엄령으로 무력화된 아제르바이잔의 국토를 휘젓고 다녔고, 고르바초프는 6월경 무허가 민병대의 해산을 명령하지만 아르메니아는 이를 듣지 않았다. 소련군의 계엄이 풀린 아제르바이잔은 자체 민병대를 결성해 카라바흐 지역에서의 무력 충돌을 개시한다. 다만 어디까지나 아르메니아의 군대가 아제르바이잔의 영토 경계를 부정하고 이를 유린하는 상황이었기에 소련군은 아제르바이잔 민병대 활동을 묵인하고 연합작전으로 아르메니아 민병대를 진압한다.

1991년 3월 아르메니아는 소련의 지배를 거부하고 신연방조약을 부인한다. 그리고 1991년 4월 30일 개시된 아제르바이잔 민병대와 소련군의 연합작전인 고리 작전(Operation Ring)은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의 국지적 갈등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신호탄이 되었다. 연합군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북쪽의 아제르바이잔 영토에 대한 반군 토벌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 주거지구인 게타셴(Գետաշեն, 현 차이캔드·Çaykənd), 마르투나셴(Մարտունաշեն, 현 가라불라그·Qarabulaq) 등 몇몇 마을에서 게릴라 색출 작전에 휩쓸린 민간인들이 인종청소를 당해 스테파나케르트로 이주하며, 그들이 떠난 자리는 아르메니아에서 추방당한 아제르바이잔 피난민들의 정착지가 되었다. 작전은 5월까지 이어졌다. 소련은 아제르바이잔과의 연합 작전으로 아르메니아를 고립시키고 이들에게 소련으로의 귀속을 이끌어내려 하였을 것이나, 1991년 8월 모스크바에서 쿠데타가 발생해 공산당 활동이 정지되고 1991년 12월까지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로 연방이 급격히 와해되면서 이 작전은 아르메니아의 굴복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실패한다.

소련이 해체된 이후 아제르바이잔군나고르노카라바흐 민병대는 소련 내무군이 떠나며 유기한 막대한 양의 군사 물자와 기지들을 각각 접수한다. 1월 18일 나고르노카라바흐의 공화국 수립 선언은 아제르바이잔군의 전면적인 군사작전으로 이어졌다. 1992년 1월 31일 아제르바이잔군은 건국을 선포한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진압하기 위해 인접 도시인 아그담에 병력을 집결시킨다. 아제르바이잔군은 그라드 로켓과 다양한 재래식 포병 화력을 동원할 수 있었으나 인적 자원인 장교단의 훈련 상태가 엉망진창이었고, 이들은 통합작전을 제대로 구사할 능력이 없었다. 아제르바이잔군은 1992년 2월 첫주동안 스테파나케르트를 포격하지만 나고르노카라바흐 민병대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였고, 민병대는 방어선을 밀고 나오며 오히려 아제르바이잔의 영토 방향으로 점차 진군한다. 2월 11일 나고르노카라바흐 민병대는 수도 북부에 있는 마을로 당시 아제르바이잔군의 감제고지 역할을 하던 호잘르에 진출하고, 25일까지 현지의 아제르바이잔계 주민들을 학살한다.[3] 이 곳에는 고정익기를 띄울 수 있는 유일한 공항이 있었으며, 호잘르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내부의 몇 안되는 아제르바이잔계 대규모 정착지 중 하나였다. 또한 그때까지 스테파나케르트를 향해 포격을 벌이던 아제르바이잔군 포병이 위치한 곳이었다. 정치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아제르바이잔에 큰 의미를 갖는 마을을 지옥으로 방치하고 대패하여 패주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터키와 러시아가 모두 빠져나간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었던 이란은 1992년 2월 양측의 휴전을 중재하겠다며 끼어든다. 이란은 예레반과 바쿠의 정부요인들을 초청해 여러 차례 휴전을 중재하였지만 실제로 총성이 멎은 기간은 일주일 남짓이었다. 3월 29일 쌍방간에 휴전위반을 들어 교전이 재개되었는데, 이 때 아제르바이잔은 수도부 포격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를 굴복시키려 하였다. 나고르노카라바흐 민병대는 포위를 풀기 위해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권역 내 아제르바이잔의 유일한 거점인 슈샤를 공격한다. 5월 15일,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의 마지막 아제르바이잔인 정착지인 슈샤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민병대에 의해 함락되고 아제르바이잔인들은 추방된다. 아제르바이잔군과 민간인들은 라츤 회랑 근처의 라츤 마을로 퇴각하였고 이 또한 3일 뒤인 5월 18일 나고르노카라바흐 민병대에게 함락된다. 이로써 스테파나케르트 포위가 풀리고 아르메니아와 나고르노카라바흐가 연결된다. 연이은 패전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초대 대통령인 아야즈 뮈탤리보프가 사임하고 6월 7일 선거에 의해 애뷜패즈 엘치배이가 2대 대통령에 오른다.

1992년 하반기는 라츤 회랑 확보를 위한 양측의 교전, 나고르노카라바흐 북부와 동부 지역에 대한 아제르바이잔의 진출, 제삼자의 중재 시도가 이어진다. 9월 19일 아제르바이잔군은 라츤 회랑을 차단할 수 있는 주변 고지들을 일시적으로 수복하였으나 10월 11일 다시금 패주한다. 한편 북부와 동부 지역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이 우위를 점하며 스테파나케르트 방향으로 서서히 전진하고 있었다. 아제르바이잔은 라츤 회랑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지는 못하였으나 스테파나케르트로 향하는 물류에 간섭할 무력은 가지고 있었고, 나고르노카라바흐는 물자난에 시달린다.

1993년 4월, 아르메니아군이 대대적으로[4] 아제르바이잔 본토를 침공하여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영토와 인접한 아그담(Ağdam), 퓌줄리(Füzuli), 재브라이을(Cəbrayıl)과 같은 아제르바이잔 남서부 구들을 잇달아 무력 장악하였다. 또한 아르메니아 국경 지역의 아제르바이잔 구였던 캘배재르(Kəlbəcər), 라츤(Laçın), 구바들르(Qubadlı), 쟁길란(Zəngilan)을 점령하였다. 나고르노카라바흐를 포함하여 이때 차지한 땅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20%에 이르렀다. 아르메니아가 이렇게 큰 면적의 영토에 대해 침략을 감행한 것은 재래식 소련 화포의 작전거리 바깥으로 전선을 밀어내기 위함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수도부인 스테파나케르트는 아제르바이잔의 포병 공세로부터 안전해진다.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인 분리주의자들이 장악한 스테파나케르트를 포위하는 한편, 뒤떨어지는 병력의 질을 보충하기 위해[5] 다른 이슬람 지역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1992년에는 인근의 이치케리야 체첸 반군으로부터 병력을 지원받기도 했다. 그러나 1992년 5월 요충지인 슈샤와 라츤이 함락되고 스테파나케르트에 대한 포위가 풀리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아제르바이잔은 전투에서 잇달아 패배했다. 아르메니아는 점령지의 아제르바이잔계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추방하였고, 이 때문에 초대 대통령이었던 아야즈 뮈탤리보프가 전쟁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임했다. 그 후임인 애뷜패즈 엘치배이 재임기 아제르바이잔은 대대적인 반격작전에 돌입하고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상당 부분을 수복했지만 곧 험악한 산지를 이용한 아르메니아측의 게릴라전에 휘말리며 작전은 용두사미로 끝났다. 작전실패의 책임을 둘러싼 아제르바이잔 지도부의 분열은 결국 1993년 6월 쿠데타로 엘치배이가 망명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아르메니아는 아제르바이잔의 내분을 기회삼아 원래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의 2.5배나 되는 넓은 지역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1993년 말 아제르바이잔은 아프가니스탄무자헤딘의 지원병력도 받는 한편,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란이 했던 것처럼 16세 이상이면 무조건 동원하는 인해전술까지 펴기 시작했다. 1993년 말부터 1994년 초까지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와 접경한 북부 전선과 이란과 접경한 남부 전선에서 대대적인 반격 작전을 벌였다. 북부 전선에서 일으킨 캘배재르 작전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가장 참담한 패배를 당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그래도 무자헤딘의 도움을 받은 남부 전선에서는 퓌줄리구와 본래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영토에 속했던 호자밴드(Xocavənd)구의 동부 지역을 되찾기는 했다.

이 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은 유효 병력이 아르메니아보다 훨씬 많았음에도 아르메니아에 크게 고전했다. 그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다. 첫째, 아르메니아군 장교단의 능력이 더 뛰어났다. 둘째, 아르메니아인의 동기부여가 더 잘 되었으며,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은 그러한 동기부여가 특히 강력했다.[6] 셋째,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대다수를 차지한 아르메니아인들로부터 아제르바이잔군이 민심을 얻지 못했다. 애초에 분리독립 열기가 강했던 아르메니아인들인데 아제르바이잔군이 민간인 거주지를 포격하거나 민간인을 학살하면서 민심을 완전히 잃었다. 넷째, 나고르노카라바흐가 험준한 산악지형이므로 공격하는 입장에서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일대는 해발고도 2,500-3,000m에 달하는 고산이 산맥을 이룬다. 마지막으로 미국과 러시아가 아르메니아를 적극 지원했으며, 이란은 자국 북부 아제르바이잔인들의 분리 움직임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아르메니아 편에 가까운 중립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아제르바이잔은 사실상 고립된 상태로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그나마 형제국이자 똑같이 아르메니아와 원수지간인 튀르키예가 고문단 파견이나 무기 지원 등 간접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을 도와주었다. 아주 잠깐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의 나흐츠반 자치공화국으로도 진격한 적이 있었는데, 튀르키예 국경과 맞닿아 있는 곳이다 보니 아제르바이잔의 혈맹인 튀르키예가 아르메니아에 나흐츠반 자치공화국에서 당장 철수하지 않으면 전면전을 벌일 것이라 경고하며 튀르키예군을 국경 쪽으로 이동시키자 바로 아르메니아 군대가 철수하였다. 그래서 나흐츠반 자치공화국은 이 전쟁의 포화에서 별 피해가 없었다. 나흐츠반은 튀르키예의 개입으로 전쟁의 포화는 면한 대신 사실상 아르메니아 편에 선 중립국 이란 탓에 본국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해 한동안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아제르바이잔으로서는 1993년에 남부 소수민족인 탈리시인이 한 때 일방적으로 자치공화국을 선포했던 악재도 겹쳤다.

전쟁 기간 동안 양군은 구소련제 무기와 군복을 사용했지만 아르메니아 측은 피아식별을 위해 철모나 방탄복에 흰 십자가를 그려넣기도 했다.


3.1. 캘배재르 전선[편집]


1993년 4월 아르메니아의 지원을 받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반군은 아제르바이잔의 캘배재르를 침공한다. 이 작전은 1993년 3월 27일에 시작되어 4월 5일에 종료된 전격전으로, 무장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아제르바이잔군은 지리멸렬하여 산발적으로 패주하였을 뿐 조직적으로 반격하는 데 총체적으로 실패한다. 일주일 남짓의 기간동안 아제르바이잔은 캘배재르 지방 전지역을 상실하는 대패를 당한다. 캘배재르 작전 문서 참고.

아르메니아의 공격 당시 산악지대인 캘배재르 지방은 아제르바이잔의 나머지 지역으로부터 고립되었다. 서쪽은 아르메니아, 동쪽은 나고르노카라바흐, 남쪽은 라츤 회랑, 북쪽에는 10,000피트 고도의 무로프 산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 지역에는 총인구 6만명 규모로 아제르바이잔인과 쿠르드족이 각각 3만명씩 살았고, 제대로 된 군대는 없었다. 이들은 전원 추방당하여 모두가 난민이 되었고, 도시는 약탈당한 채 2023년까지 그대로 텅 비어 있었다.

아르메니아의 기습 공세, 아제르바이잔군의 무저항, 험준한 산악지대, 3월의 추위[7] 등 여러 요소가 겹치며 6만명의 민간인들은 무차별 총격과 약탈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특히 군대가 민간인을 전혀 방어해 주지 못하고 패주하면서 마을에 덩그러니 남은 주민들은 아르메니아군의 폭력을 직접 받아내며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8]

당시 캘배재르에서 피난한 지역 주민인 이사(İsa·Isa)의 인터뷰가 남아있다. 1993년 당시 60세였으며 캘배재르 남부 타흐타바시으(Taxtabaşı) 집단농장의 관리인이었다. 그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하던 중 비무장 상태로 아르메니아군의 공격을 받았다.[9]

3월 27일 아침, 나는 형제인 애해드(Əhəd·Ahad), 친구인 휘세인(Hüseyn·Hussein)과 함께 말을 타고 츠라글르(Çıraqlı·Chirakli)에 사는 친척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여행 중이었다. 갑자기 뱅글리(Vəngli·Vankli, 캘배재르 동부의 아르메니아인 주거지역) 방향에서 우리를 향하는 기관총 소리가 들렸다. 우리 일행은 간신히 도망치기는 하였으나 내가 타고 있던 말은 살해당했고 나는 바위 뒤로 몸을 피해야 했다. 잠시 후 나는 우리 마을에서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출발한 다른 주민들을 보았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그들에게도 사격을 가했다. 네 사람이 죽었고 한 사람이 다쳤다. 유시프 제이날로프(Yusif Zeynalov·Yusuf Zeinalov), 하빌 내비예프(Habil Nəbiyev·Habil Nabiyev), 메흐만 무사예프(Mehman Musayev), 유시프 애지조프(Yusif Əzizov·Yusuf Azizov)가 죽었다.



3.2. 아그담 전선[편집]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애뷜패즈 엘치배이는 1993년 6월 수래트 휘세이노프의 쿠데타로 실각하고 튀르키예로 망명한다. 아르메니아는 이 권력 공백 사태를 이용해 1993년 6~7월에 걸쳐 아그담 구의 구도 아그담 시를 포위하는 데 성공한다. 아그담 시는 인구 5만명 규모의 역내 대도시였으나, 1993년 7월 23일 아르메니아가 이를 점령하였을 때 대부분 피난하거나 사살되어 남은 인구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모든 건물은 양국의 쌍방포격과 아르메니아의 약탈, 방화로 전소되어 도시 전체가 폐허로 변하였다.

당시 아그담에서 피난에 실패한 지역 주민인 알렉산드르(Aleksandr)의 인터뷰가 남아 있다. 1993년 당시 82세였으며 그는 2차대전 참전용사였다. 192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에 거주하였으며 이 인터뷰는 1993년 7월 23일 아르메니아군이 아그담에 입성한 날의 기록이다.[10][11]

나는 집에 있었다. 몸이 좋지 않았다. 나는 주방에서 차를 끓이고 있었고, 어디선가 폭발이 발생했다. 찻잔이 주방 온사방을 날아다녔다. 포격 그리고 또 포격이 사방에서 이어지는 것은 이미 익숙해져 있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미 떠났다. 나는 창문으로 향해 길가를 보았다. 아르메니아군이 20명인가 25명인가가 걸어오며 아파트 단지를 사방팔방 사격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기에 아제르바이잔군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들은 내 집의 문을 열어젖혔고, 나는 구석에 숨었다. 내 손은 깨진 유리잔으로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뒤로 돌아 달렸다.

그들은 나더러 "손을 들어라", "나가라"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그들은 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나는 14,000 루블이 있었고 그것을 꺼내 주었다. 그 중 한 명은 나를 주방으로 데려가 황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금 내놔, 금 내놔." 나는 금이 없었다. 그는 내 참전용사 메달을 뜯어서 자기 주머니에 넣고 웃으면서 우리 집을 떠났다. 나머지는 나를 인질로 잡았다.


이 노인은 아그담에서 포로로 잡혀 예레반으로 압송되었고, 스테파나케르트를 거쳐 국제 적십자사의 중재 아래 1994년 2월 아제르바이잔으로 송환되었다.


3.3. 이란 국경 전선[편집]


1993년 8월부터 아르메니아의 지원을 받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반군은 이란 국경 지대인 아라스 강을 향해 진군한다. 이 시기 아제르바이잔의 4개 구(구바들르, 재브라이을, 퓌줄리, 쟁길란)가 추가적으로 아르메니아군에게 포위된다. 이 지역의 총인구는 최대 30만 명에 달하였는데, 아르메니아의 두 단계에 걸친 공세를 통해 이 지역의 민간인들은 무차별사격, 인질, 추방, 학살, 약탈 등의 피해를 입고 모두 청소되었다.

여기에는 아그담 전선과 마찬가지로 아제르바이잔군이 상당수 배치되어 있었으나 대개 무장이 부실하고 제대로 훈련받지 못하여 다른 전선에서와 마찬가지로 민간인을 지켜내지 못하였다.

인종청소로 소멸한 도시 퓌줄리 인근의 주민인 쉬매이얘(Süməyyə·Sumaya)의 인터뷰가 남아있다. 1993년 당시 46세였던 쉬매이얘는 자신의 사촌이 아르메니아 반군의 손에 살해당하자 퓌줄리 함락 당일인 8월 20일, 도시에서 동쪽으로 10km 떨어진 메르딘리(Merdinli·Merdini) 마을을 벗어나 피난하게 된다.[12]

그 날 아침 아제르바이잔 병사들은 그녀에게 피난을 권고하였으나 아직 그녀와 이웃들은 피난을 망설였고, 오후 2시경 마을 주거지역에 산발적으로 그라드 로켓이 낙하하며 그녀의 집과 벽, 유리창을 부쉈다. 몇 시간이 지나 아제르바이잔 병사들은 퇴각하며 '우리는 저들을 막을 능력이 없다'고 하였다. 곧 아르메니아군이 진입하였다. 그녀에 따르면 사촌은 자가용으로 탈출을 시도하다 아르메니아군의 총격에 맞아 사망하였다고 한다.

오후 6시경이었다. 아제르바이잔군 병사가 마을로 달려왔다. 우리는 아르메니아군의 전차와 병력수송장갑차들이 메르딘리에 진입하는 것을 보았다. 주민들은 패닉에 빠졌다. 모두 각자의 자동차, 트럭, 트랙터 등 무엇이든 잡아 타고 탈출하려 하였다. 아르메니아군은 우리에게 사격을 가했다. 우리 가족은 한 차에 탔다. 내 사촌인 페흘래반 앨리예프(Pəhləvan Əliyev·Pehlavan Aliyev)는 다른 차를 타고 우리 뒤를 따랐다. 우리 앞에 가는 차가 한 대 더 있었다. 우리는 좁은 길을 따라 애흐매드배일리(Əhmədbəyli·Ahmedbeyli)로 향하는 포장도로에 올랐다. 그 마을은 20km 떨어진 곳에 있는 이란 국경의 마을이었다. 우리는 포장도로에 막 올랐는데, 그 때 내 사촌이 뒤따라오고 있어야 할 후방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그를 구하기 위해 멈출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저 달렸다.



4. 결과[편집]


1994년 러시아프랑스가 중재에 나섰다. 이후에 로베르트 코차랸이 아르메니아 대통령에 당선되고, 5월 5일 비슈케크 조약으로 정전(停戰)하였다. 전쟁은 아르메니아의 승리라는 게 중평. 동원된 병력은 아르메니아 측이 최대 시점 2만(아르메니아군 8,000명, 나고르노카라바흐군 10,000명), 아제르바이잔 측이 최대 시점 4만 2천(아프간, 체첸 의용병, 튀르키예 장교 등 1,500~2,500명 제외)으로 아제르바이잔이 훨씬 많았지만, 오히려 전사자는 아르메니아 측 4,592명, 아제르바이잔 측 25,000명~30,000명으로 아르메니아가 훨씬 적었다. 민간인 사망자 수는 아르메니아인이 1,500여 명, 아제르바이잔 700여 명이며 아르메니아 난민은 50만 명 가량, 아제르바이잔 난민은 70만 명 가량 발생했다.[13]

아제르바이잔이 1988년부터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분쟁에 고통 받아왔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아르메니아 공화국은 전쟁을 촉발시키고 무력을 사용해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5분의 1에 달하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 및 인접한 7곳의 행정 구역을 점령했으며 점령 지역 내에서 인종청소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는 UN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822호(1993), 853호(1993), 874호(1993) 및 884호(1993)를 통해 아제르바이잔에 행해지는 무력사용을 지속적으로 규탄하고 있으며 아제르바이잔 영토 보전과 자주권을 침범하는 그 어떠한 행위 및 그런 행위로 인해 이루어지는 모든 상황이 타당하다고 인식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추가적으로, 점령된 아제르바이잔 지역에 아르메니아가 수립한 불법 괴뢰 정권과 하부 조직들은 지속적으로 국제적으로 논의되고 있으며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이라 일컬어지는 이 독립체는 아르메니아에서조차도 어떠한 국제적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제르바이잔 외교부


이 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이 패배하는 바람에, 국제법상(de jure) 아제르바이잔의 영토이지만, 사실상(de facto) 아르메니아 영토라는 이중적인 상황이 되었다. 해당 지역은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현 아르차흐 공화국)이라는 미승인국이 세워져 사실상 아르메니아실효 지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영토 분쟁의 불씨는 남아 2016년 나고르노카라바흐 충돌과 2020년에 일어난 제2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으로 이어진다.

튀르키예와 중국은 당시 미국의 압력으로 지원을 하지 못했고 이스라엘이나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도 지원에 나서지 않아 아제르바이잔은 사실상 고립되었다. 러시아가 일부 장비를 지원한 수준이라서 아제르바이잔은 아랍연맹이나 심지어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에게까지 이슬람 형제로써 지원해달라고 애원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모두 거절당했다. 그나마 체첸과 다게스탄의 의용병들이 소수 참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때부터 자신들을 외면한 러시아와 아랍연맹에 앙심을 품은 아제르바이잔은 이후로 이들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친서방으로 전향하여 서방세계와의 외교적 우호 증진에 노력하고, 조지아와도 경제적 우호를 다졌다.

특히 이슬람국가로서 이례적으로 이스라엘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이스라엘로부터 무기를 수백억 달러 어치를 들여오고 이스라엘군과 합동훈련을 하거나 교관을 초빙하는 등 군사적인 밀월관계를 맺고 있다. 네탸나후 이스라엘 총리가 방문할 때는 알리예프는 이스라엘과 우린 혈맹이나 마찬가지라며, 환영할 정도였다. 이스라엘도 아제르바이잔 석유를 통해 자국군 연료 문제를 많이 해결하고 나아가 가장 큰 안보위협인 이란 핵개발을 견제할 요충지로 아제르바이잔내 이스라엘군 주둔 허용을 얻어냈다. 이에 대해 아랍연맹에서는 언짢게 여겼지만 아제바이잔 측에서는 개의치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상황이 변하자 미국도 더 이상 아르메니아만을 지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26년 뒤에 벌어진 제2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는 거꾸로 아르메니아가 고립되어 오랫동안 전쟁 준비를 한 아제르바이잔에게 일방적으로 격파당했다. 그나마 초반에는 아르메니아군이 용맹히 항전했으나,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국제적인 고립과 군사적으로 수세에 몰려 결국 항복해야만 했다. 전쟁의 결과 아제르바이잔이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대부분의 지역을 수복하게 되었다.

2023년 아제르바이잔은 아르차흐 방향으로 공세를 개시했다. 공세 개시 단 하루만에 아르차흐 공화국이 백기를 들고 대통령이 해체 문서에 서명하여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35년에 걸친 군사 충돌은 아제르바이잔의 총체적 승리로 일단락 되었다.


5. 관련글[편집]



[1] 아르차흐 공화국 아스케란구에 속했던 시기에는 이바냔(Իվանյան·Ivanyan)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1990년 4월에 아제르바이잔 SSR의 도시 지위를 부여받았지만,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이후 아제르바이잔계 주민 대다수가 난민으로 도시를 떠났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영어식인 호잘리(Khojaly)로 더 잘 알려져 있다.[2] Copyright 2006. Golbez. All right reserved.[3] 당시 사망자는 최소 200에서 최대 1,000명까지 추산되지만, 가장 신뢰도가 높은 아제르바이잔 의회조사단의 자료에 따르면 전투원과 동사자를 포함해 호잘르 일대에서 485명이 사망했다.[4] 아르메니아 정부와 아르메니아계 서적들에서는 절대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며 책임을 회피하지만, 4월 이전까지 유격전이나 하던 나고르노카라바흐 민병대가 이 시기부터 갑자기 증강된 무기들을 들고 나와 포병전을 하거나 진공작전으로 아제르바이잔 영토에서 적극적인 인종청소를 벌이기 시작한다. 또한 아르메니아 국경 방향에서의 진군이 남부인 슈니크와 북부인 세반 호수 인근에서 모두 관측되는 등 이는 명백한 주권국간의 침략 문제로 확대된다.[5] 이때 아제르바이잔군은 완전히 막장이었다. 공자인 아르메니아군보다 병력이 2.5배나 많은데다 체첸군의 지원까지 받은 상태에서 치룬 슈샤 방어전에서도 패배했다.[6] 흔히 알려진 것처럼 아르메니아군은 아프간 전쟁으로 단련된 보병이지만 아제르바이잔군은 석유 캐던 공병이어서 패배한 것이 아니다. 애초에 두 나라 모두 아프간전 참전자는 1만이 안 되어서(아르메니아 4천, 아제르바이단 7,500) 군의 대다수를 차지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 참전한 아제르바이잔인 아프간전 베테랑이 4,500으로 이것만으로도 아르메니아인 아프간전 베테랑 전체를 넘긴다.[7] 내륙 고고도 산지에서의 3월은 거의 늦겨울이다.[8] Azerbaijan : Seven years of conflict in Nagorno-Karabakh, p.8~9, by Human Rights Watch/Helsinki (Organization : U.S.), 1994.[9] Azerbaijan : Seven years of conflict in Nagorno-Karabakh, p.9~10, by Human Rights Watch/Helsinki (Organization : U.S.), 1994.[10] Azerbaijan : Seven years of conflict in Nagorno-Karabakh, p.26~27, by Human Rights Watch/Helsinki (Organization : U.S.), 1994.[11] 인터뷰 채록은 1994년 3월 28일 바쿠에서 이루어졌다.[12] Azerbaijan : Seven years of conflict in Nagorno-Karabakh, p.30~31, by Human Rights Watch/Helsinki (Organization : U.S.), 1994.[13] 출처 : 위키백과, The Caucasian Knot: The History and Geopolitics of Nagorno-Karabagh, Gefährliche Töne의 "Frozen War"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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