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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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45년부터 1982년까지 존재했던 중국공산당의 최고 수위 자리. 국가직인 중화인민공화국 주석(국가주석)과 구별하여 당 주석(중공중앙주석)이라고 불리었다. 오늘날의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나 당헌상 직권이 훨씬 더 강력하였다.
2. 법적근거[편집]
2.1. 7차 당대회 규약[편집]
2.2. 8차 당대회 규약[편집]
2.3. 9차 당대회 규약[편집]
※10차 당대회에서 당장 변동 없음.
2.4. 11차 당대회 규약[편집]
3. 연혁[편집]
대장정 및 중일전쟁에서의 생존, 연안 정풍 등으로의 정적 숙청을 완료한 이후 당내에서 더 이상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이룩한 마오쩌둥은 1943년 3월 20일 정치국 회의에서 <중앙기구 조정 및 축소 결정>을 통과시켜 서기처를 실질적인 최고 권력기구로 부상시켰으며 정치국 주석 겸 서기처 주석에 선출되어 당의 최후 정책 결정권을 가지는 등 막강한 권위를 자랑하였다.
1945년, 7차 당대회에서 마오쩌둥 사상을 당장에 삽입하는 한편, 중앙위원회 주석 직함을 신설, 정치국 주석과 서기처 주석을 겸임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비록 1943년에 명시되었던 최후 정책 결정권은 없었으나 실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니키타 흐루쇼프가 이오시프 스탈린을 격하하자 마오쩌둥은 충격을 받고 이를 상쇄하기 위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직함을 신설하는 한편, 마오쩌둥 사상을 당장에서 삭제하고 정치국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서기처 주석을 총서기로 대체하여 덩샤오핑이 맡게 하고 어느 정도 권력분산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마오쩌둥의 권위 후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마오쩌둥은 다른 지도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당상황제'의 지위를 만끽하였다. 마오쩌둥은 수도 베이징에 잘 머무르지도 않았으며, 정치국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도 정치국 회의의 진행을 주무를 수 있었다. 마오쩌둥은 2선에서 물러나 영향력을 행사하고 1선에서 2선급 지도자들이 실무를 담당하는 이 체제를 1-2선 체제라고 부른다.
하지만 대약진 운동의 참혹한 실패 이후 당내에서 류사오치 등의 생각 외로 세게 자신에게 도전하자 마오쩌둥은 이를 처참하게 짓뭉개고 정치국을 무력화시킴으로 1-2선 체제는 붕괴된다. 이로써 1966년부터 중국을 10년간 뒤흔든 광풍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죽은 후 주석 직함은 화궈펑이 차지하였으나 그도 덩샤오핑에게 밀려 실각하면서 후야오방이 최후의 주석이 된다. 그리고 1982년, 1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주석이 폐지되면서 중공중앙주석 직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다가 1997년 15차 당대회에서 70세를 넘은 차오스, 류화칭 등 원로들을 은퇴시키려 했던 장쩌민은 만약에 원로들이 거세게 반발할 시에 당중앙위원회 주석 직함을 부활시켜 자신이 취임하고, 리펑을 부주석으로 삼는 방안을 고안했으나, 유일하게 생존한 원로 보이보의 조정으로 주석직을 부활하지 않는 것으로 끝났다. 시진핑 권력의 강화에 따라 2017년 19차 당대회에서 당주석 직함이 부활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으나 결국 현실화되진 않았다.
4. 역대 주석[편집]
5. 같이보기[편집]
6. 참고문헌[편집]
- 김정계, 중국공산당 100년사 1921~2021(서울: 역락, 2021).
- 조영남, 「중국 마오쩌둥 시대의 엘리트 정치: ‘일인지배’의 사례」 『중소연구』 43(2) (2019.8).
- 张静如, 中国共产党历届代表大会:一大到十八大(中)(河北人民出版社, 2012).
- 本书编委会编, 中国共产党历次党章汇编(1921 ~ 2012) (北京: 中国方正出版社,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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