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림

최근 편집일시 :



陳琳
?~217년
1. 개요
2.1. 하진 휘하에서
2.2. 원가 휘하에서
2.3. 조위 휘하에서
4. 평가
5. 미디어 믹스



1. 개요[편집]


후한 말과 삼국시대 조위의 관리이며 자는 공장(孔璋)으로 서주 광릉군 사양현 사람.패드리퍼

미려한 문장이 유명해 건안칠자의 한명으로 꼽힌다.


2. 정사[편집]



2.1. 하진 휘하에서[편집]


본디 하진 밑에서 주부 벼슬을 지냈다.

하진이 원소의 계책에 따라 동탁 등 외부의 장군들을 소집하려 하자 상부로 지내던 진림은

"지금 장군께서는 황제의 위엄을 지니고 군권을 장악하여 위엄을 떨치고 계십니다. 이제 대군이 모여들면 그 가운데 최강자가 영웅이 되게 마련입니다. 이 같은 경우를 빗대어 '무기를 거꾸로 들어 남에게 칼자루를 쥐어준다.' 라고 합니다. 결국 공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만 어지러워질 따름입니다."

라고 진언했고, 시어사 정태(鄭泰)와 상서 노식(盧植) 역시 동탁을 불러들이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진언했다. 하지만 하진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후 하진이 암살당하자 기주로 도망가 원소를 따른다.


2.2. 원가 휘하에서[편집]


진림은 원소의 심복이 되어 문서 작업을 담당한다.

관도전 이전의 사서상의 등장은 단편적인 기록 몇 개 뿐이지만 기록 부족이 심각한 원소 휘하 내에서는 이 정도만 해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장홍전에 따르면 195년 12월에 동군태수 장홍이 원소에게 반기를 들자 원소는 장홍을 공격해 성을 포위했지만 3개월 이상의 공격에도 성이 함락되지 않자 같은 군 출신이었던 진림을 시켜 항복을 종용하는 편지를 쓰게 했다. 이에 장홍이 답서를 보내 진림의 말을 조목조목 반박해 거절한 일화가 있다. 이 답서에서 장홍은 진림을 일컬어 "전쟁터에 첩실을 데리고 와서는 편히 쉬면서 빠질대로 빠져 있다." 혹은 "옳고 그름을 논하지만 진실된 마음은 없이 자신의 위기만 구하려 한다."는 식으로 대차게 디스한다.

199년에 원소가 공손찬을 포위했을 당시 공손찬이 동맹군인 장연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자 원소가 이를 가로챈 뒤 진림을 시켜 내용을 조작하게 해 진림이 위조한 거짓 문서에 낚인 공손찬은 원소에게 참패했다.

관도대전이 벌어지자 조조의 죄상을 규탄하는 선전문인 토조조서를 쓴 것으로 매우 유명하다. 조조 뿐만이 아니라 조조의 부친인 조숭, 조부 조등까지 죄다 신랄하게 깐 이 문장은 현대에도 남아 있으며 당사자인 조조마저 감탄할 정도의 명문이었다고 한다.고인드립+패드립을 보존한 조조의 위엄

“사공 조조의 조부 중상시 조등은 좌관, 서황 같은 환관들과 한 통속이 되어 극악무도한 짓을 다했고, 더럽게 재물을 긁어모으고 거칠 것 없이 날뛰어 세상의 풍속을 썩게 하고 백성들을 못살게 굴었다. 조조의 아비 조숭은 본래 거렁뱅이로 문전걸식을 하다가 환관의 양자가 되어 뇌물을 주고 관직을 사고, 금은보화를 수레에 싣고 권문세가에 뇌물을 바쳐 삼공의 지위를 도적질하여 사직의 커다란 우환이 되었다. 조조는 더러운 환관의 자손으로서 원래 아름다운 덕을 갖추지 못했으면서도 교활하게 협행을 꾸미며 어지러움을 좋아하고 화를 일으키기를 즐겨했다.”


최염전에 따르면 원소 사후 최염이 투옥되자 진림은 음기(陰夔)와 함께 이를 변호해 그를 석방시켜준다.

무제기와 원소전에 따르면 조조가 업을 포위하자 이를 구하기 위해 회군한 원상까지 격파해 포위하자 원상이 진림과 전 예주자사 음기를 사절로 보내 항복을 청한다.


2.3. 조위 휘하에서[편집]


원상이 패하자[1] 조조에게 투항했으며, 진림을 본 조조가 “경이 이전에 본초(本初)[2]를 위해 나에게 글을 보내온 적이 있다. 하지만 죄상은 나 혼자만의 것이고, 악인에 대한 통박도 내 몸에서 그칠 일이거늘, 어찌하여 조상의 대에까지 소급했던가?”라고 꾸짖자, 이에 진림은 "시위를 당긴 화살은 쏘지 않을 수 없소."라고 변명해 조조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화살은 자신에 비유하고 시위는 원소에 비유하되, 화살은 스스로 발사되는 게 아니라 시위가 발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로 인해 진림은 조조의 화살이 될 수 있음을 비쳤고, 진림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산 조조는 진림을 더 책망하지 않았으며 이후 사공군모좨주로 임명되어 계속 문서 작성을 담당했다.

조조 휘하로 들어간 후에는 원소 시절만큼 외부적으로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매우 중용된 것으로 보이며, 진림은 글의 초안이 완성되면 우선 조조에게 보였다. 조조가 진림의 글을 볼 때마다 너무 감탄한 나머지 지병인 두통조차 잊어버렸다고 하며, 당시 중요한 국가의 포고령과 군사문서, 격문 등은 모두 진림과 완우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이후 문하독으로 옮겼다가 217년에 역병이 유행하자 진림, 서간, 응창, 유정 등이 동시에 병이 들어 죽었다.


3. 연의[편집]


대부분 정사와 비슷하다.

다만 정사의 내용이 한가지 사건으로 짜집기 되었다. 정사에서 조조의 두통을 낫게한 진림의 글은 토조조서가 아니다. 정사에서는 진림이 조조에게 귀순한 후 조조에게 문장을 보여주자 조조가 진림의 문장을 보고 두통이 나았다. 연의에서는 이 일화를 토조조서 때와 합쳐버려서 진림이 원소 밑에서 조조를 규탄하는 글을 쓴걸 조조가 보고 두통이 낫는걸로 바뀌었다.

연의에서 합쳐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시 조조는 지병인 두통 때문에 침상에 누워있었는데, 격문을 접한 조조는 갑자기 모골이 송연해지며 전신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두통마저 잊은 조조는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조홍에게 "누가 이 글을 지었느냐?" 라고 물었다. 조홍이 대답한다. "예, 진림이라는 자가 지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조조는 빙긋 웃으면서 말한다. "글재주가 있는 자는 반드시 무략으로써 제도해주어야 한다. 진림의 문장이 비록 훌륭하지만, 원소의 무략이 부족하니 어쩌겠느냐!" 그리고는 마침내 모든 모사들을 집결시켜 원소를 상대할 대책을 상의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진림의 격문이 두통을 고쳤다.’는 일화다. 패드립을 보고 병이 나았습니다.


4. 평가[편집]


역사가가 직접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지만 '시위에 놓인 화살' 운운하는 것으로 봤을 때 권력에 아부하며 곡학아세하는 성향이 있어 평판이 상당히 나빴던 것으로 보인다.

조비가 원성현의 현령으로 지내던 오질에게 보낸 편지에서 진림에 대해 "문장은 탁월하지만 조금 번잡하다"고 평가했다.

조식양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진림을 비판했다. 오늘날 사부(詞賦)의 작가를 대표하는 인물로 건안칠자중 공융,완우를 뺀 5인과 양수를 거론하는데 모두가 빼어난 것은 아니라며 진림을 콕 집으며 진림이 스스로 사마상여 수준이라며 자만하는 것을 비난하는 편지를 진림에게 보냈더니 조식이 자기를 인정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린다고 극딜한다. 이 편지에서는 유수도 같이 까인다.

훗날 안씨가훈의 저자인 안지추는 진림을 일컬어 '원소 휘하에 있을 때는 조조를 이리나 승냥이로 비유하더니 조조 휘하로 들어가자 원소를 뱀이나 살모사 등으로 비유한다'고 적으며 위에서 시키면 따라야 하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한편으론 이것이 문인된 자의 고민이라고 한다. 아무리 어려운 시기라도 진림처럼 부끄럽게 살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다. 말이 쉽지


5. 미디어 믹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진림/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왕찬전에서는 원소가 패하자 조조에게 투항했다고 되어있으나 오류로 보인다.[2] 원소의 자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2-07-09 02:44:42에 나무위키 진림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0-18 13:14:07에 나무위키 진림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