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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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8년 11월 17일
경상남도 동래 기장 죽성 352
(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사망
1945년 5월 6일
평양부 대찰리 163 평양연합기독병원[1]
(현 평양시 중구역 중성동)
본적
경상남도 동래 기장 죽성 352
묘소
북한소재
서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3. 사후
4. 기타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2. 생애[편집]


1888년 11월 27일 지금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竹城里에서 태어났다.[2]

1909년 지금의 죽성리 월전月田마을의 구장區長을 역임하면서 면장面長 박재형의 귄유로 기독교에 입교했다.[3][4]

1916년 9월 20일 제1회 대한예수교장로회경남노회大韓耶蘇敎長老會慶南老會에서 전도사 자격을 취득하여 통영의 대화정교회 조사助事로 임했다.[5][6]

1917년 12월 제4회 경남노회에서 평양신학교 입학 허락을 받았다.[7]

1919년 7월 경상남도 고성읍교회에서 목회 활동에 임했다.[8][9]

1924년 경남노회 서기로 선출되었고, 같은해 겨울 동래읍교회로 옮겨 사역 활동에 임했다.[10][11]

1926년 평양신학교를 제20회로 졸업하였고, 이듬해 1월 6일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12]

1927년 마산교회 분규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전권위원 6인 중 1명으로 선임되었다.[13][14]

1930년 남해읍교회에 부임하여 전도집회를 개최하여 남해 지역 개척에 임했다.[15]

1931년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국민정신통일'을 위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1935년 11월 평양지역 기독교계 사립학교장들의 신사참배 거부결의에 대하여 신사참배와 폐교의 양자택일을 요구하였고, 기독교계 학교들은 순응과 저항으로 분열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이른바 ‘황민화 운동’의 일환으로 교회에 직접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고, 1938년 2월 총독부 경무국은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이라는 미명하에 교회와 교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압력에 굴복하는 개인과 교회가 속출하면서 동년 동월 9일 평북 선천읍남예배당에서 열린 제53회 평북노회는 장로회 노회 최초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이에 대한 반발이 거세었지만, 일제는 관련자를 구속하였고, 관련 신학교를 폐쇄시켰다. 같은해 최상림은 경남노회의 노회장으로 선출되었다.[16][17][18]

1938년 6월 해운대교회에서 제41회 경남노회가 개최됐다. 해당 노회는 같은 해 9월 평양에서 열기로 한 27회 한국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기 위한 부산 경남지방의 준비모임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를 위해 일제는 노회에서 신사참배 문제가 안건으로 상정되지 않도록 사전에 정지작업을 해놓았다. 그런데 김길창, 양성봉 등의 교섭위원이 '신사참배를 수용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려 참배 문제가 공론화되었다. 한상동韓尙東 목사는 보고서의 결론에 대해 거부하기를 동의動議하였고 이약신 목사가 재청再請했다. 이에 최상림 노회장은 '신사참배 반대'를 경남노회의 공식 입장으로 선포했다.[19][20]

1940년 6월 말 일경에 연행되어 사천경찰서에 구금되었다.[21]

1941년 3월 부산남부경찰서로 압송되었고, 같은 해 7월 평양경찰서로 이송되어 동년 8월 25일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22]

1945년 4월 30일 병보석으로 출소하여 평양연합기독병원平壤聯合基督病院에 입원하였으나 같은 해 5월 6일 사망했다.[23]


3. 사후[편집]


1946년 9월 남미창정南米倉町서울예배당에서 조선기독교애린선교단의 수양회 일정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사망한 최상림 등 5명의 목회자에 대한 추도기도회를 열었다.[24][25][26]

1977년 11월 대한민국 정부는 최상림 등 다수의 유공자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27][28]

1991년 제46주년 광복절을 맞아 대한민국 정부는 최상림 등 다수의 유공자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29]

1997년 남해읍교회는 최상림 목사를 기리는 추모비를 교회뜰에 세웠다.[30]


4. 기타[편집]


  • 제41회 경남노회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1938년 9월에 열린 장로회총회는 신사참배에 동의했다. 이후 경남 지역의 교회들도 참배에 동참했다.[31][32][33][34]

  • 제41회 경남노회의가 열렸던 해운대교회는 1943년 8월 일경의 검속檢束으로 예배가 중지되었고, 강도 높은 압수수색을 받았다. 몇 달 후 일부 서류는 반환되었지만 제41회 노회록을 비롯한 서류들은 돌아오지 않았다.[35]

  • 최상림 목사는 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것이 아닌 예심이 진행되던 중 사망했다. 본래 예심은 기소의 타당성을 판단하여 공판에 회부할지 여부를 판단하는 제도이지만, 비공개 진행과 예심판사의 재량으로 기한을 연장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장기간 미결 구류 상태에서 검찰이 원하는 증거를 만들어 내는 수단으로 운용되었다.[36][37][38]

  • 최상림 목사가 주제했던 경남노회는 장로회 계열에서 유일하게 신사참배를 거부한 집회로 기록되었다.[39]

  • 제41회 경남노회의가 열렸던 해운대교회는 1912년 입국해 부산·경남 지역에서 활동했던 선교사 앨버트 라이트Rev. Albert C. Wright의 한국 선교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경남노회의 결정으로 설립된 곳이다. 현재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동에 위치해 있다.[40]

  • 최상림 목사가 사망한 평양연합기독병원은 1915년 감리교의 홀기념병원과 장로교의 평양제중병원이 통합하였고 1923년 감리교 여선교회의 평양부인병원이 통합에 동참하여 운영한 기독교 의료 기관이다.[41]

  • 해방 이후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주남선朱南善·한상동韓尙東 등 항거자들이 출감하여 경남노회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참배에 대한 자숙을 주장했지만, 제대로 수용되지 않으면서 교단이 분열되었다.[42][43][44][45][46]

  • 개신교 계열 교회가 신사참배에 대하여 회개한 것은 2000년대 이후 이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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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朝鮮의자랑, 斯界의 重鎭', 동아일보 1927.04.30평양연합기독병원 주소지 확인 출처[2] '공훈전자사료관' 자료는 "경상남도 동래 기장 죽성"으로 기재하고 있다. 기장군이 동래부에 편입된 것은 1895년으로 최상림 출생 이후 만들어진 행정구역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순교자기념선교회'에 기재된 출생지"경남 양산군 기장면 죽성리"는 1973년 개편된 행정구역 명칭이다. 최상림의 출생 전 행정구역 명칭 중 시기적으로 근접한 것은 1789년 호구총수戶口總數에 기록된 "기장현 읍내면 두모포豆毛浦"이다. '죽성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기장 (機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상림崔尙林',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공훈전자사료관, '최상림',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순교자기념선교회[3]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순교자기념선교회 재인용[4] "월전 마을"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서 확인되는 명칭이다. 이전 명칭 중에서 시기적으로 근접한 것은 1895년 개편 당시 명명된 "동래부 기장군 읍내면 월전동"이다. '월전 마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5] '좁은 길로 간 사람들 [6]: (12) 신사참배 반대를 가장 먼저 결의한 최상림 목사', 기독신보 2022.07.12[6] 대화정교회는 호주 선교사 엔드류 아담슨Andrew Adamson의 주도로 1905년 설립되었다. 1956년 충무교회로 개명했고, 1983년 재건축 되었다. '충무교회 (忠武敎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7] 평양신학교는 장로교 선교부와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가 설립한 장로교 교역자敎役者 교육기관이었다. 1950년 총회신학교로 개칭했고, 1961년 문교부 인가를 받아 장로회신학대학으로 승격되었다. '평양신학교 (平壤神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8] '최상림(崔尙林)',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9] 기독신보 2022.07.12 재인용[10] '慶南老會開會', 동아일보 1924.01.08[11] 기독신보 2022.07.12 재인용[12]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순교자기념선교회 재인용[13] '臨時老會决議로 諸般行事禁止', 동아일보 1927.04.01[14] 마산교회는 박승명朴承明 목사와 이상소李相召·이순필,,李順弼 장로 사이에서 촉발된 분규가 폭력사태로 악화되었다. 급속히 성장한 한국 기독교는 1920년 무렵 내부에서 여러 형태의 갈등이 폭발했다.조선일보 1926.11.19, 조선일보 1926.12.14, 동아일보 1927.02.13, 동아일보 1928.10.13[15]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순교자기념선교회 재인용[16] '2007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주기철', 공훈전자사료관[17] '신사참배 거부운동 (神社參拜 拒否運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18] 기독신보 2022.07.12 재인용[19] '한국의 역사교회 (21) 부산 해운대교회; 신사참배 반대 가결한 현장', 국민일보 2009.06.19[20] 기독신보 2022.07.12 재인용[21]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공훈전자사료관 재인용[22]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순교자기념선교회 재인용[23]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공훈전자사료관 재인용[24] '다섯 殉敎者를 追悼', 동아일보 1946.08.27[25] '聖! 朝鮮基督敎六十年靑史의 꽃 獄死殉敎한 五十先知의 不滅의 이 鬪魂', 동아일보 1946.09.03[26] 남미창정은 1946년 10월 일본식 행정명을 고치는 과정을 통해 남창동南倉洞으로 명명되었다.동아일보 1975.02.11[27] '이제야 햇빛 본 「獨立有功」 77년도 褒賞者', 동아일보 1977.11.30[28] '政府수립후 최대규모 獨立有功 1,330명 추가 褒賞', 경향신문 1977.11.30[29] '建國훈장 有功者 명단', 경향신문 1991.08.15[30] 기독신보 2022.07.12 재인용[31] '신사참배 거부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재인용[32] '신사 참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33] '馬山管內各敎會에서 神社參拜를 决議', 동아일보 1938.11.07[34] '慶南老會를 압두고 牧師들 神社參拜', 조선일보 1938.11.25[35] 국민일보 2009.06.19 재인용[36]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공훈전자사료관 재인용[37] '근대 사법제도와 일제강점기 형사 재판'; 3.1운동 이후 형사사법 제도,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38] '‘예심제도’ 만들어 거짓 조서 용인… 판결은 통과의례 불과했다', 서울신문 2019,04.19[39] 국민일보 2009.06.19 재인용[40] '해운대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41] '평양연합기독병원 (平壤聯合基督病院)',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42]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총회역사, 설립배경 제5장·제6장[43] '교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44] '대한예수교장로회 (大韓Jesus敎長老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45]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1701[46]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206[47] '[분단 70년을 넘어 평화통일을 향해 (1부)] 神社 앞에 머리 숙였던 한국교회… 그 오욕 씻은 순교자의 피', 국민일보 2015.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