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셉시온(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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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cepción
콘셉시온
파일:Escudo_de_Concepción_(Chile).svg
문양
국가
칠레

비오 비오주
Región del Biobío
면적
221,6km²
인구
220,746명
(2017년 기준)
시간대
UTC -4
서머타임: UTC -3
고도
12m


Concepción.







파일:Concepcion.jpg
파일:4102471890_e799f0c53a_b.jpg

1. 개요
2. 역사
3. 지진
4. 교육
4.1. 대학
5. 교통
6. 기후
7. 인구 통계
8. 문화 생활
8.1. 음악
9. 스포츠
10. 경제
10.1. 상업
11. 행정
12. 주목할만한 사람
13. 주목할 만한 사건
14. 쌍둥이 도시 – 자매 도시




1. 개요[편집]


콘셉시온(Concepción)은 칠레 중부에 위치한 도시로, 콘셉시온 주의 주도이다. 그것은 칠레에서 가장 고도로 산업화된 지역의 일부인 국내 무역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콘셉시온 주의 주도이며 비오비오 주의 주도이다. 그것은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남쪽으로 약 500km 떨어져 있다.

이 도시는 처음에 콘셉시온 만에 정착했는데, 이 지역은 나중에 펜코 코뮌이 된 지역으로, 지금은 콘셉시온 도시권의 일부이다. 이 도시의 별칭인 펜키스타는 원래 기반이 있던 곳에서 유래했다. 라모카 계곡(La Mocha Valley)에 위치해 있으며, 1751년 지진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후 이전했다.

1550년 페드로 데 발디비아가 스페인 제국의 영토로 건설하면서 1565년부터 1573년까지 칠레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 도시는 칠레의 독립을 위한 투쟁의 중요한 장소였으며, 칠레 독립 선언이 콘셉시온 광장에 열렸다. 1851년 마누엘 몬트가 대통령직에 선출되기 전까지 칠레의 대통령직은 콘셉시온 엘리트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칠레의 유명한 대학 도시이며, 콘셉시온 대학교, 비오비오 대학교, 가장 신성한 개념의 가톨릭 대학교를 포함한 수많은 교육 기관들이 위치해 있다. 코뮌에는 또한 다양한 역사적 다리, 벽화, 공원, 호수뿐만 아니라 테오트로 비오비오, 카사 델 아르테, 지역 자연사 박물관, 테아트로 우니베르시다드 데 콘셉시온과 같은 중요한 문화 장소도 있다.


2. 역사[편집]


1550년 비오비오 강 북쪽의 펜코에 돈 페드로 데 발디비아가 건설하였다. 그 당시에 그것은 Concepción de Maria Purisima del Nuevo Extreme라는 이름을 받았다. 콘셉시온의 새로운 정착지는 스페인 영토와 1870년대까지 독립을 유지했던 미국 인디언 부족인 마푸체 땅의 경계인 라 프론테라 (프론티어)에서 북쪽으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스페인 당국은 2년 후 왕실의 칙령에 의해 이 마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문장이 주어졌다.

스페인이 콘셉시온 지역에 도착했을 때, 연대기 작가 제로니모 데 비바르는 현지 마푸체인들이 금은팔찌와 "왕관 같은 것"을 착용했다고 언급했다. 이것은 잉카의 선물, 패배한 잉카로부터의 전쟁 전리품, 또는 잉카 야금학의 채택으로 해석된다.

1554년 마푸체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고, 1555년 다시 재건되었다. 콘셉시온은 1557년에 알토 데 핀토에 요새를 건설하면서 가르시아 후르타도 데 멘도사의 통치 기간 동안 복구되었다. 마을은 1558년 1월 6일, 주장 제로니모 데 빌레가스(Jeronimo de Villegas)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다. 이후 2세기 동안 라 아라우카니아에서 마푸체족에 대항하는 군대의 본부가 되었고, 1564년 마푸체족의 포위 공격과 다른 공격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10,000명으로 증가했다. 1565년부터 1575년까지 레알 오디언시아의 홈구장이었다.

1570년, 1657년, 1687년, 1730년, 1751년에 마을을 파괴한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당국은 마을을 비오비오 강 옆에 있는 벨 데 라 모카(Vale de la Mocha)로 옮겼다.

콘셉시온 마을의 새로운 부지는 마우레 강에서 라 프론테라까지 관할권을 확장한 콘셉시온의 주요 도시가 되었다. 초대 콘셉시온 총독은 오소르노 후작 암브로즈 오히긴스(Ambrose O'Higgins)로, 후에 칠레의 총독과 페루의 총독이 되었다.

1810년 9월 18일, 제1차 정부 위원회가 산티아고에서 회의를 열었을 때, 콘셉시온 시민들은 이에 동참했다. 콘셉시온은 페루 부왕국의 칠레 재정복 시도에서 스페인 육군의 진입점으로 사용되었다. 정치인과 병사들은 신생 독립국에서 중요한 정치 세력이 되었다.

1818년 1월 1일, 암브로세 오히긴스의 아들 베르나르도 오히긴스가 칠레의 독립 전쟁을 선포하고 선서했다. 독립의 순간까지, 그 도시는 그것의 옛 정착지와 새로운 정착지에서 다양한 교전의 현장이었다.

1835년 2월 20일, 마을은 지진으로 인해 대부분 파괴되었고 재건되어야 했다.

1875년까지, 주요 영국 공동체와 독일 식민지가 이 지방에 존재했다. 1895년, 스페인 군대가 더 많이 주둔했다.

1919년에 설립되었으며 칠레 최초의 세속 사립 대학교가 되었다. 이웃한 항구인 탈카후아노는 칠레에서 가장 큰 해군 기지가 있는 곳이다.

2010년 2월 27일, 규모 8.8의 지진이 콘셉시온 시를 강타하여 전국적으로 521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을 입었다. 지진 이후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데이터에 의존하는 지질학자들은 이 사건의 결과로 도시가 서쪽으로 약 3m 정도 이동했다고 결론지었다. 뒤이어 일어난 쓰나미는 도시를 놓쳤다.

2010년 칠레 대지진 이후, 수감자들의 탈출 시도가 실패한 후, 콘셉시온의 엘만자노 교도소에서 교도소 폭동이 시작되었다. 교도소의 다른 부분에 불을 질렀고 경비원들이 공중으로 총을 쏘고 군부대의 도움을 받은 후에야 폭동이 진압되었다. 2010년 3월 5일, 페루 야전병원이 도시에 배치되었다.


3. 지진[편집]


칠레 영토의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콘셉시온 지역은 지진 활동이 활발하며, 1939년 강력한 지진에 의해 콘셉시온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1953년 지진으로 도시의 15%가 파괴되었다. 1960년에 발생한 또 다른 큰 지진은 근처에 진원지가 있었다.

2010년 2월 27일, 규모 8.8의 지진이 도시의 35.846°S, 72.719°W, 115km(71mi)에서 발생했다. 미국 지질조사국은 토요일 0334 GMT에서 지진이 35km(22마일) 깊이에서 발생했다고 밝혔다. 그 영향은 브라질 상파울루까지 멀리 떨어져 있는 2,870마일(4,620km)까지 느껴졌다.


4. 교육[편집]


"대학 도시"로 유명한데, 이 곳에는 우니베르시다드 데 콘셉시온, 카톨리카 데 라 라 산티시마 콘셉시온, 우니베르시다드 델 비오비오와 같은 가장 중요한 대학들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 도시는 또한 많은 다른 대학들을 위한 수많은 본부들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이 대도시는 교육 기관, 기술 형성 센터 및 앞서 언급한 대학들에 초점을 맞춘 큰 교육 제안을 가지고 있다.


4.1. 대학[편집]


폰티피키아 대학교는 1724년부터 1767년까지 예수회에 의해 설립된 고대 대학교이다. 1751년 5월 24일, 지진과 쓰나미로 도시가 황폐화되면서 대학의 도서관과 모든 자금이 파괴되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물의 맹렬한 결과로, 칠레 남부의 지배에 대한 풍부한 문헌들이 유실되었고, 이는 도시의 문화와 집단 기억에 재앙을 가져왔다. 자연 재해로 인해, 도시를 현재 위치인 Valle de la Mocha로 이전하기로 결정되었다. 신학교는 산 펠리페 대학교의 설립 이후 칠레 수도원 대학들의 학업 활동이 감소하던 시기에 새로운 위치에 서서히 부활했지만, 1767년 예수회 탄압 이전에도 일부 학위들은 계속 수여되었다. 1991년 콘셉시온 대주교가 칠레 폰티피아 카톨리카 대학교 탈카우아노 지역본부에서 설립한 산티시마 콘셉시온 대학교(UCSC)의 자연적이고 합법적인 전신으로 여겨진다.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이 1990년 칠레 산티아고 데 칠레 대학의 호노리스 카우사 박사로 취임한 자리에서 한 연설에서 "페노폴리타나의 업적은 이전에도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후안 카를로스는 산 펠리페의 전임자인 도미니카 대학교 산토 토마스 데 아키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편, 칠레 대학은 도시의 학교들이 남성들이 법학 학위를 취득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 과정을 가르치는 것을 허용했다. 학생 중에는 수십 년 후에 칠레 대법원장이 된 헨리 우루티아 만차노가 있었다.

1919년 초대 총장인 엔리케 몰리나 가르멘디아를 포함한 시민 집단에 의해 설립되었다.

결국 대학은 국가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고, 전통적인 대학의 일부가 되었고,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개의 대학 중 하나가 되었다.


전통적인 대학

콘셉시온 대학교

델비오 대학교

가장 성스러운 개념의 가톨릭 대학교

페데리코 산타마리아 공학 대학교


사립 대학교

데사롤로 대학교

안드레스 벨로 대학교

아크스 대학교

산 세바스티안 대학교

태평양 대학교 (칠레)

아메리카 대학교

볼리바리아나 대학교

페드로 데 발디비아 대학교

공화국 대학교

아콩카과 대학교

칠레 공과대학교 INACAP


전문 대학교

칠레 가톨릭 대학교 듀오쿠 프로페셔널 연구소

콘셉시온 대학교 버진리오 고메즈 전문 연구소

산타시모 콘셉시온 가톨릭 대학교 기술 연구소

산토 토마스 전문 연구소, 산토 토마스 대학교

안드레스 벨로 대학교 IEP 전문 연구소

라 아라우카나 전문 연구소

프로비덴시아 직업 연구소

기예르모 수베르카소 은행 연구소

디에고 포르탈레스 프로페셔널 연구소

커크 전문 연구소

플레이스 프로페셔널 연구소

INACAP 전문 연구소


초등학교와 중학교

이 도시에는 프랑스의 국제 학교인 리세 프랑세 샤를 드 골과 독일의 학교인 콜레지오 알레만 드 콘셉시옹과 영국의 학교인 세인트 존 학교가 있다.

1878년 감리교 성공회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는 콘셉시온 칼리지(Concepción College)는 가톨릭 여자 데이 스쿨이자 기숙학교이다.

리세오 여자 상업 콘셉시온


5. 교통[편집]


탈카후아노에 있는 카리엘 수르 국제공항이 있다. 도시 지역의 대중교통은 비오트렌으로 알려진 통근 열차 시스템뿐만 아니라, 집단에 속한 코뮌의 여러 대로와 거리를 통과하는 많은 버스 노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6. 기후[편집]


콘셉시온의 기후는 쾨펜 Csb로 분류되며, 2월에는 건조한 여름이다. 태평양의 시원한 물은 일년 내내 온화한 기온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기온은 30 °C를 초과하거나 0 °C 이하로 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5월과 10월 사이의 6개월 동안, 도시는 총 1,130mm(44인치)의 연간 강수량의 약 83%를 받는다. 1912년 기록이 시작된 이래 가장 비가 많이 내린 달은 2000년 6월로 565.7mm(22.3인치)였다. 해상의 냉각은 아르헨티나의 같은 평행을 이루는 인근 내륙 지역보다 훨씬 더 시원한 기온을 가져오는데, 여름 평균 최고 기온은 콘셉시온의 역대 최고 기온과 맞먹는다. 위도 36도의 여름 기온은 콘셉시온처럼 시원하지 않으며, 아르헨티나대서양 해안에서는 적도로부터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완화는 칠레 태평양 전체에서 분명히 나타나므로, 콘셉시온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북아메리카 서해안에서도 비슷한 서늘한 여름 지중해성 기후 경향이 발견되지만, 예를 들어, 콘셉시온은 샌프란시스코보다 약간 더 습한 겨울이 있다. 반대로, 콘셉시온의 기록적인 겨울 밤 기온은 아르헨티나 대서양 연안의 같은 위도에 기록된 온도보다 훨씬 더 온화하다.

목재의 열 연소와 디젤의 수송에 크게 의존하는 대도시 지역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콘셉시온의 공기는 산티아고, 테무코에 이어 칠레에서 세 번째로 오염이 심하다.


7. 인구 통계[편집]


2002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면적은 221.6km2, 인구는 216,061명이고, 이 중 남성은 103,860명, 여성은 112,201명이다.

콘셉시온은 전체 인구의 14.35%를 차지하며, 농촌 인구는 1.88%, 도시 인구는 98.12%(212,003명)이다. 또한 인구의 5.5%가 대도시권에 거주하고 있다.

1970년과 1982년 사이에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코로넬 시로부터 분리된 산 페드로가 포함된 것이다.

1996년 코뮌의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치과얀테와 산페드로 데 라 파스가 형성되었다. 이 코뮌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수는 콘셉시온의 침실 공동체, 즉 콘셉시온의 경우처럼 상점이 많지 않은 주거 도시가 되면서 빠르게 증가했다.

이 도시에는 상당한 비율의 외국인 거주자가 있으며, 가장 많은 수는 스페인, 이탈리아, 미국 주재원 공동체이다. 이민의 물결로 정착한 도시에는 독일,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그리스, 포르투갈, 크로아티아, 스칸디나비아, 아랍,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후손들이 더 많이 살고 있다.


8. 문화 생활[편집]


외부인에게는, 콘셉시온 주민들과 펜코 인근 도시들 사이에 혼란이 있을 수 있다. 콘셉시온은 원래 펜코가 있던 곳이기 때문에, 콘셉시온은 펜키스타라고 불리고, 펜코는 펜콘이라고 불리고 있다. 또한 비공식 용어인 펜코폴리타노는 수도에 속한 모든 코뮌의 지역 주민을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더 넓은 의미로는 콘셉시온 지방을 지칭하기도 한다.

2014년, 로큰콘 축제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도시의 비센테나리오 공원(바이센테니얼 파크)에서 야외에서 열릴 것이며, 무료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축제의 목적은 도시가 구현한 음악적 스포트라이트를 회복하고 칠레 록의 요람이라는 명성을 얻으면서 동시에 도시의 주요 관광 명소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2015년 3월 7일 토요일에 초판이 열렸으며, 이후 매년 여름이 끝날 때마다 국내외 주요 및 유명 아티스트들과 함께 신흥 지역 밴드들이 한자리에 모여 성황리에 개최되고 있다.


8.1. 음악[편집]


로스 트레스, 로스 벙커스, 에모시오네스 클랜데스티나스, 산토스 뒤몽, 데 살룬, 마추카, 율리우스 포퍼와 같은 수많은 밴드들이 이 도시에서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콘셉시온은 "록의 수도"로 묘사되어 왔다. 로스 프리시오네로스 같은 수많은 밴드들이 이 도시에서 그들의 첫 번째 주요 콘서트를 열었다.

이 도시의 음악 공연장은 관광 경로인 라 루타 데 라 무시카의 주요 특징으로, 락 장면 외에도 지역 재즈, 민속 장면도 보여준다.


9. 스포츠[편집]


1959년 FIFA 월드컵에서는 칠레가 동메달을 획득했다.

오늘날, 콘셉시온은 세 개의 프로 축구팀들의 연고지이다.

클럽 데포르티보 우니베르시다드 데 콘셉시온, 현재 프리메라 디비시온에 속해 있다.
클럽 데포르티보 페로비아리오 알미란테 아르투로 페르난데스 비알, 현재 칠레 2부 리그에 참가하고 있다.
클루브 데 데포르테스 콘셉시온, 현재 칠레 3부 리그에 참가하고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프로 농구팀은 다음과 같다.

CD 우니베르시다드 데 콘셉시온은 칠레 바스케트볼 데 칠레에 있는 농구 클럽이다.


10. 경제[편집]


역사적으로 강력한 제조업으로 특징지어졌던 콘셉시온은 또한 지역 경제의 주요 유통과 서비스 중심지였다.


10.1. 상업[편집]


도시의 무역은 플라자 인디펜던시아 (독립광장), 보행자 거리 알론소 데 에르실레이 수니가 (1981년 건설), 주요 도로를 따라 집중되어 있다. 그 중 하나가 디에고 바로스 아라나 거리인데, 이 거리는 도시의 상업 중심지로 발전했고, 1907년까지는 "커머스 거리"로 알려져 있었다. 새로운 상업 중심지는 칠레의 200주년 기념일(2010년 9월 18일)의 일환으로 구 중앙역과 새로운 시민구 주변에 개발되고 있다. 지역 무역의 상당 부분은 도시 주변의 정착지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휴알펜, 탈카우아노, 산 페드로 데 라 파즈와 같은 공동체가 있으며, 몰 플라자 델 트레볼과 같은 번화한 쇼핑 센터가 있고, 지속적인 상업 발전이 있는 곳이다.

음식과 관련된 다른 상업적인 장소로는 베가 모뉴멘탈과 메르카도 센트럴 데 콘셉시온(콘셉시온의 중앙 시장)이 있다.


11. 행정[편집]


콘셉시온은 칠레의 3급 행정 구역으로, 4년마다 직접 선출되는 알칼데가 이끄는 지방 자치체가 관할한다. 2016~2020년 시장은 2012년 처음 선출된 알바로 오르티스 베라(기독교민주당)이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기독교민주당 3석, 국가재건당 2석, 독립민주연합 2석, 칠레 공산당 1석, 칠레 사회당 1석, 칠레 급진당 1석을 차지하고 있다.

칠레의 선거구에서는 가스통 사베드라(PS), 호세 미겔 오르티스(PDC), 하이메 토하(PS), 펠릭스 곤살레스(PEV), 엔리케 판 리셀베르크(UDI), 세르히오 보바딜라(UDI), 프란체스카 무뇨스(ROCE)가 하원의원을 맡고 있다 알레한드로 나바로 브레인(MAS)과 재클린 반 리셀베르크헤(UDI)가 제12선거구 비오비오코스타에 속해 있다.


12. 주목할만한 사람[편집]


산티아고 마누엘 데 알데이 아스페, 1755년에서 1788년 사이의 산티아고 주교 (1712년-1789년)

파트리치오 알멘드라, 축구 선수 (b. 1977)

루이스 알타미라노, 1924년 칠레 정부 군정의 대통령 (1867년-1938년)

오페라 가수 Graciela Araya (1962년 b.

미겔 아르디만, 축구 선수 (b. 1967)

엔리케 소로 바리가, 작곡가 (1884-1954)

디에고 호세 베나벤테, 칠레 상원 의장 (1790–1867)

마누엘 불네스, 1841년부터 1851년까지 칠레의 대통령 (1799년-1866년)

로베르토 카르테스, 축구 선수 (b. 1972)

아르투로 델 카스티요, 만화책 작가 (1925-1992)

벨기카 카스트로, 배우 (1921-2020)

피아니스트이자 칠레의 영부인 델피나 데 라 크루즈 (1837–1905)

호세 마리아 데 라 크루즈, 군인 (1799–1875)

팝 앤 록 밴드 드 살룬

Francisco Encina, 칠레 하원 의장 (b. 1943년)

에드가르도 엔리케스 칠레 교육부 장관 (1912-1996)

미겔 엔리케스, 의사이자 정치인 (1944-1974)

루이스 페드로 피게로아, 축구 선수 (b. 1983)

알프레도 프랑스, 축구 선수 (1895-1938)

테니스 선수 아드리안 가르시아 (b. 1978)

엔리케 몰리나 가르멘디아, 칠레 최고 대학 중 하나인 콘셉시온 대학의 설립자 (1871년-1964년)

곤살로 가리도, 도로 자전거 경주자 (1973년생)

호세 고니, 칠레 국방부 장관 (1948년 b.

Osvaldo Gonzales, 축구 선수 (b.

플루트 연주자이자 작곡가 비비아나 구즈만 (b. 1964)

이시도라 히메네스, 운동선수 (1993년 b.

클라우스 융게, 체스 마스터 (1924-1945)

얼터너티브 록 밴드 로스 벙커스

록 밴드 로스 트레스

이그나시오 우루티아 만차노, 정치인 (1879년-1951년)

가수이자 코미디언인 만돌리노 (1934-2014)

아델키 밀리아르, 영화 배우, 감독, 작가, 제작자 (1891–1956)

칼라 무뇨스, 라켓볼 선수 (b. 1992)

토마스 파블로 엘로르자, 칠레 상원 의장 (1921년 ~ 1999년

로드리고 페닐릴로, 칠레 내무부 장관 (1973년 b.

페포, 만화가 (1911-2000)

호세 호아킨 프리에토, 1831년부터 1841년까지 칠레의 대통령 (1786년부터 1854)
라이문도 레볼레도, 축구 선수 (b. 1997)

크리스티안 레예스, 스프린터 (1986년 b.

시메나 린콘, 칠레 상원 의장 (1968년 b.

아르투로 산휴자, 축구 선수 (1979년 b.

왈도 산휴자, 축구 감독이자 콜로-콜로의 회장 (1900년 ~ 1966년)

호세 A. 산토스, 은퇴한 미국인 기수 (1961년 b.

레네 슈나이더 칠레 육군 총사령관 (1913-1970)

세바스티안 세풀베다, 시나리오 작가, 영화 제작자, 감독 (b. 1972년)

리카르도 소토, 리커브 양궁 선수 (b. 1999)

크리스티안 우리베, 축구 선수 (1976년 b.

호세 프란시스코 우레졸라, 칠레 상원 의장 (1911-2004)

이그나시오 우루티아 만차노, 칠레 상원 의장 (1879년-1951년

르네 발렌수엘라, 축구 선수 (b. 1955)

변호사이자 사회당 정치인 파울리나 벨로소 (b. 1957년)

루이스 베라, 축구 선수 (1929-2014)

후안 데 디오스 비알 델 리오 (1774년–1850년)

구스타보 비베로스, 축구 선수 (b. 1947)

엘레나 웨이스, 피아니스트 (1908-1988)

아니발 자냐르투, 정치인 (1847-1902)

미겔 데 자냐르투, 변호사 겸 정치인, 칠레 독립선언서 서명자 (1786년-1851년)


13. 주목할 만한 사건[편집]


1999년 11월 20일, 23세의 칠레 임업생 호르헤 마투테는 콘셉시온 근처의 디스코텍에서 불가사의하게 사라졌다. 2004년 2월 산타후아나 마투테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14. 쌍둥이 도시 – 자매 도시[편집]


콘셉시온의 자매 도시는 다음과 같다.

팔레스타인 베들레헴 (2006)

브라질 캄피나스 (1979년)

브라질 카스카벨 (2006)

에콰도르 과야킬 (2006)

콜롬비아 메데인 (1998)

멕시코 몬터레이 (1997)

중국 난징 (2018)

아르헨티나 라플라타 (1993)

아르헨티나 산 미겔 데 투쿠만 (2013)

중국 우한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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