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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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라크 쿠르나.jpg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아담의 나무' (인지의 나무). 아브라함이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전해진다
파일:쿠르나 이라크.jpg
무슬림, 유대인 순례객 모두가 찾는 에즈라 영묘

1. 개요
2. 역사
2.1. '쿠르나 참사'
2.2. 굴곡의 현대사


1. 개요[편집]


아랍어 القرنة
영어 Al-Qurnah

이라크 남부의 도시. 바스라에서 서북쪽으로 40km, 나시리야에서 동쪽으로 90km, 아마라에서 동남쪽으로 80km 떨어져 있다. 인구 13만의 중소 도시지만 매우 중요한 도시이다. 유프라테스 강티그리스 강이 샤트 알 아랍 (아르반드 루드)으로 합류하는 요충지에 입지하였고, 에덴동산의 위치로 비정되기도 한다. 또한 서남쪽 유프라테스 남안에는 이라크 최대의 유전인 서쿠르나 유전, 동북쪽 티그리스 동안에는 세계 최대의 석유 밀집지 중 하나인 마즈눈 유전[1]이 위치한 자원의 보고이다. 따라서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란군의 주요 공세지 중 하나였고, 양측 합쳐 5만이 넘는 전사자를 낼 정도로 치열한 전장이었다. 본래 일대는 거대한 습지가 있었으나 90년대 이후 수량이 줄며 절반 이상 사라졌다.

2. 역사[편집]


파일:쿠르나 이라크 1.jpg
20세기 초엽, 티그리스 강에서 바라본 에즈라 영묘

역사적으로도 고대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주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가 도시를 세울 정도로 유서가 깊다. 현지 전설에 따르면 에덴동산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하며, 한 고목을 선악과가 열린 '아담의 나무' (شجرة آدم)라 여겨 신성시한다. 다만 최근 기존 나무가 죽자 대체하는 나무를 심었다 한다. 북쪽 25km 알 우자이르의 티그리스 동안에는 구약의 저자 중 하나인 유대교 성인이자 이슬람 일각에서도 예언자라 여겨 추앙하는 에즈라 영묘가 있다.

2.1. '쿠르나 참사'[편집]


근대 오스만 제국 시절 이라크 남부는 자치 지역이었고, 여러 부족들이 할거했다. 그러던 1855년 모술 부근의 아시리아 유적인 두르 샤르킨 (코르사바드) 유적을 발굴한 후 유물을 싣고 바다로 나가려던 프랑스 선박이 쿠르나를 지나다 셰이크 아부 사드의 현지 해적이 공격해 대부분 침몰시키는 일이 있었다. 쿠르나 참사라 불리는 이 일로 유물 중 10%만이 루브르 박물관에 인계될 수 있었다 한다.[2]

2.2. 굴곡의 현대사[편집]


20세기 쿠르나는 전략적 위치 때문에 수차례 전장이 되었다. 1차 대전기인 1914년 12월 영국군이 6일 간의 전투 끝에 점령하였고, 상술한 이란-이라크 전쟁 시에 이란군이 대규모 공세를 퍼부었으나 도시 자체는 함락되지 않았다. 다만 전쟁 도중 마즈눈 유전이 크게 훼손되었다. 1977년에는 노르웨이의 탐험가 토르 헤위에르달이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 문명 간의 인구 이동을 증명하겠다며 쿠르나에서 갈대배를 타고 항해에 나섰으나 불안한 주변 정세로 지부티로 선회해야 했다. 걸프전 이후 사담 후세인 정권은 이란에 협력한 습지 아랍인들을 응징하기 위해 4대강 사업 여러 보를 세워 습지를 마르게 하였고, 이라크 전쟁 후 다시 습지화에 나섰으나 옛 규모의 절반 가량만이 회복되었다. 2005년 5월 민병대가 쿠르나 점령을 시도했으나 다국적군에게 격퇴되었다. 2010년대 들어 이라크 정부가 서쿠르나 유전의 개발에 적극 나서며 향후 도시의 성장이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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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랍어로 마즈눈은 미쳤다는 뜻인데, 그만큼 석유가 밀집되어 있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미쳤다리[2] 그후 1970년대 일본 발굴단이 가라앉은 유물의 회수를 시도했지만 실패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