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불교/자비와 보리심의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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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세속 보리심과 승의 보리심
2.1. 세속 보리심
2.1.1. 정의
2.2. 승의 보리심
2.2.1. 정의
2.2.2. 공성의 이해
2.2.2.1. 인무아(人無我)
2.2.2.2. 법무아(法無我)
2.2.2.3. 마음(의식)의 공성
2.2.3. 공성과 자비의 관계
3. 원보리심과 행보리심
4. 관련 서적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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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불보살의 자비의 총체인 관세음보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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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대비행(大悲行)과 중생 구제의 사업을
상징하는 따라(Tara) 보살[2]


제14대 달라이 라마, 《평화로운 마음, 선한 마음》

어머니가 편치 않은 사랑하는 외아들을 생각하는 것처럼 일체중생에게도 고통을 완전히 없애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길 때 연민심(憐愍心)이 제대로 생긴 것이다. 이때 대비심(大悲心)이라는 이름을 갖는다.

까말라쉴라,《수습차제ㆍ상편》(게쉬 소남 걜첸 譯)


《현관장엄론(現觀莊嚴論)》에서

발심(발보리심)남을 위해 원만구족(圓滿具足)한 깨달음(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구하는 마음이다.』

라고 자신의 뜻(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과 타인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 두 가지의 추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쫑카빠,《보리도차제광론》(게쉬 소남 걜첸 譯)


티베트 불교는 대승 불교로서 보리심(菩提心, bodhicitta)을 강조한다. 보리심의 원인으로는 대비심(大悲心)을 들 수 있다. 대비심이란 일체 중생이 고통을 여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대비심을 원인으로 하여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고자 부처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보리심을 갖게 되며, 이러한 보리심(혹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유정(有情)을 보리살타, 즉 보살(bodhisattva)이라고 한다.

《수습차제》에 따르면, 일체 중생을 자신의 외아들처럼 귀하게 여기며 그들을 한 명도 빠짐 없이 고통에서 구제하려는 대비심(大悲心)과, 대비심을 바탕으로 삼아승지겁 동안 위 없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견고한 보리심이 밤낮 없이 저절로 일어날 때 처음 대승에 입문하는 보리심이 생겼다고 본다.[3] 그 밖에도 《현관장엄론》에서는 보살의 수준에 따라 22 종류의 보리심이 있다고 설하였다. 이처럼 보리심은 대승의 입문인 동시에 핵심 중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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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심의 개발은 티베트 불교 수행 단계 중
상사도(上士道)에 해당한다.

작은 시냇물을 마실 힘도 없다면

큰 바다의 물을 어떻게 들이킬 수 있겠는가.

이승二乘(성문승과 연각승)도 능숙하지 못하다면

대승을 어떻게 배울 수 있겠는가.

《지장십륜경》(법장 譯)

벤첸라마 롭상예세, 《보리도차제의 마르티 일체지로 나아가는 지름길》(법장 譯)


보리심의 동기 발현과 보리심의 실천(현교의 육바라밀, 사섭법과 밀교의 수행 등)은 티베트 불교의 수행 체계인 보리도차제(람림)의 삼사도(三士道) 중 상사도(上士道)에 해당한다. 상사도 수행에 앞서 예비수행(가르침을 듣고 설하는 법, 선지식을 섬기는 법 등), 하사도(下士道, 이번 생에 대한 집착을 여의고 다음 생의 행복을 위해 선업을 행하고 악업을 멀리함), 중사도(中士道,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목적으로 계정혜戒定慧를 수행함) 등의 기반이 갖춰진 후 상사도에 입문하게 된다. 티베트 불교의 수행 단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티베트 불교/수행 체계 참조.

"생각하는 것은 남을 돕고자 생각 하지만

이루어지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 - 《보리도차제광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장애를 없애는 것도 보리심입니다. 모든 성취를 가져오는 것도 보리심입니다.

아름다운 용모, 무병장수, 많은 중생들이 나를 좋아하게 되는 것도 보리심입니다.

중생의 가난함과 괴로움, 슬픔을 없애는 것은 보리심입니다.

수행을 한다면 보리심 수행의 이상의 것이 없습니다. 보리심이 일어나게 되면 악업을 정화하고 모든 복덕자량을 쌓는 것입니다.

보리심의 관한 법을 여러분들이 듣고 접한 것은 굉장히 큰 기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후부터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가능한 최대로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일체중생들을 성불의 지혜로 내가 이끌겠다"는 마음을 내고 그러한 생각으로 보리심을 발심하세요.

제14대 달라이 라마


제14대 달라이 라마도 "처음에는 일체 중생을 위한 보리심을 내는 것이 불가능해보였지만, 60년 넘게 보리심에 대해 사유하고 수행한 끝에 최근에 와서야 진정으로 보리심을 발하게 되었다."고 법문 중에 종종 언급한다. 달라이 라마도 평생 동안 수행한 끝에 진정한 보리심을 낼 수 있었고, 올바른 보살들은 여러 겁에 걸쳐 보리심을 수행한다고 경전에서 언급하였는데 일반 수행자들이 오랜 기간 보리심 수행에 정진해야 함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대승에 입문하려는 수행자는 우선 경론에 의거하여 (보리심의 원인인) 사무량심, 보리심, 보살도의 정확한 의미와 학처(學處) 등을 익히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마음 동기와 행위를 점검하며 보리심을 지속적으로 증장시켜야 한다.

보리심의 이익과 희귀함에 대해 《입보살행론》은 다음과 같이 찬(讚)했다.

캄캄하게 어두운 밤이라도 천둥이 치면

번개 빛이 잠시 대지를 밝히는 것처럼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으로 중생들의 마음 속에

선한 생각이 잠시 일어나나이다.

이와 같이 선의 힘은 언제나 미약하고

죄악의 힘은 매우 강대하고 무서우니,

수승하고 원만한 보리심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선으로도 그 악을 극복하기 어렵나이다.

오랜 세월 동안 깊이 사유하신 부처님들께서

보리심의 이익이 가장 광대함을 발견하셨으니

중생이 보리심에 의지해서 불법(佛法)을 수행한다면

가장 수승하고 미묘한 지복을

반드시 얻게 되나이다.

존재(=有)의 무수한 고통을 극복하기를 바라고

중생들의 고통을 없애주기를 바라며

많은 행복을 얻으려는 희망을 가졌다면

결코 보리심을 버려서는 안 되나이다.

보리심을 일으키는 순간

윤회의 감옥에 갇혀있는 불쌍한 중생이라도

선서善逝(=부처님)의 아들인 불자佛子(=보살)라 불려지고

신들(=天)과 사람들에게 예경의 대상이 되나이다.

보리심은 가장 수승한 연금액(鍊金液)과 같나니

오염되고 탁한 범부의 부정한 몸을

고귀한 부처님의 몸으로 변화시키는

이러한 보리심을 아주 견고히 지켜야 하나이다.

중생의 인도자이신 부처님께서 무한한 지혜로

깊이 사유하시고 [보리심을] 매우 존귀한

것이라고 하셨으니 고통스런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는 진귀한 보배와 같은

보리심을 굳게 지켜야 하나이다.

다른 선업은 모두 파초(芭蕉)와 같아서

열매를 맺고 나면 시들어버리지만

보리심의 나무는 열매를 맺고 난 뒤에도

시들지 않고 오히려 계속해서 열매를 맺나이다.

큰 두려움이 있을 때 힘있는 이에게 의지하듯

보리심에 의지하면, 극중한 악업을 지었다 하더라도

한 순간에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어째서 사람들은 보리심에 의지하지 않는가.

겁말(劫末)의 맹렬한 불이 순식간에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것처럼

[보리심은] 온갖 죄업을

일순간에 완전히 소멸시켜주므로

보리심의 공덕은

무량한 것이라고

자애로운 미륵보살은

선재동자에 말씀하셨나이다.

《입보살행론》<보리심의 공덕>(석혜능 譯)

《입보살행론》(석혜능 譯)


장님이 쓰레기 더미에서

보석을 얻은 것처럼

운 좋게

지금, 저에게도 보리심이 생겼습니다.

중생의 죽음도 사라지게 하는

최상의 감로(甘露)도 보리심이며,

중생의 가난함을 없애는

줄지 않는 재물도 보리심입니다.

중생의 병을 완쾌하게 하는

최상의 영약(靈藥) 또한 보리심이며

윤회의 길을 헤매다가 지친 중생에게

휴식처가 되는 푸른 나무입니다.

모든 중생이 악도(惡道)에서

벗어나게 하는 토대이며

중생의 번뇌를 사라지게 하니

마음의 달[月]이 떠오릅니다.

중생을 무지(無知)하게 하는 허상(虛像)을 뿌리째 뽑아내는

커다란 태양이며

정법(正法)의 우유를 잘 저어

정수인 버터를 뽑아낸 것입니다.

윤회의 길을 여행하는 중생이

안락하고 즐거운 삶을 바랄 때

보리심은 최상의 행복에 머물게 하며,

중생의 긴 여행에 안도감을 느끼게 할 것입니다.

오늘, 저는 모든 부처님 앞에

모든 중생을

성불(成佛)과 행복한 길로 안내하니

천신(天神)을 비롯한 모든 중생이여! 기뻐하소서.

《입보리행론》제3품 (양지애 譯)


2. 세속 보리심과 승의 보리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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샨타락시타의 제자이자 날란다 사원의 12대 학장
까말라쉴라(Kamalaśīla)

이렇게 뿌리인 연민심을 수습하여 익숙해진 다음에는 보리심을 수습(修習)한다. 보리심은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세속 보리심과 승의 보리심이다.

까말라실라, 《까말라실라의 수행의 단계》(오기열 譯)


《해심밀경》, 《수습차제》등에서는 진리를 세속제(世俗諦)와 승의제(勝義諦)의 두 차원으로 설명하는 이제설(二諦說)에 입각하여 보리심을 각각 세속(世俗) 보리심(속제 보리심, saṁvṛiti cittotpāda)승의(勝義) 보리심(진제 보리심, paramārtha cittotpāda)으로 정의하였다.

2.1. 세속 보리심[편집]



2.1.1. 정의[편집]


세속 보리심은 연민으로써 모든 유정(有情)을 윤회로부터 꺼내고자 서약하는 것이다.

《해심밀경》(자홍 譯)


세속 보리심이란 연민심으로 모든 중생을 확실하게 고통에서 건져내기로 서원한 다음, '중생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깨달음을 이루리라!'라고 생각하면서 위없는 바르고 원만한 보리(무상정등각)를 염원하는 마음의 작용으로, 첫 마음을 일으키는 것(초발심初發心)이다.

세속 보리심은 또한 《보살지》의 〈계품〉에서 보여준 의궤에 따라 보살의 율의에 청정하게 머무는 스승에게서 [보리심계를 받아] 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그와 같이 세속 보리심을 일으킨 후에는 승의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한다.

까말라실라, 《까말라실라의 수행의 단계》(오기열 譯)


세속 보리심이란 공성을 아직 완전히 증득하기 전, 보살이 처음 발심하여 자량도(資糧道)에 입문할 때 대비심(大悲心)을 원인으로 삼아 일으키는 보리심이다. 일반적으로 보리심이라면 주로 세속 보리심을 뜻한다. 로종(lojong) 수행도 주로 세속 보리심을 개발하는 수행이다.[4] 그러나 부처의 일체종지를 이루기 위해서는 세속 보리심과 승의 보리심 둘 모두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2.2. 승의 보리심[편집]



2.2.1. 정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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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바라밀을 존격화(尊格化)한 반야불모[5]

공성과 자비를 핵심으로 하는, 매우 명료하며 부동(不動)하여 희론(戱論)의 극단을 떠난 것이다. [...]

승의 보리심은 출세간이며 희론의 극단에서 벗어난 것, 매우 명료하며, 승의의 유경(有境), 무구(無垢), 부동(不動), 바람 없을 때의 버터램프의 이어짐과 같이 매우 밝은 것이다.

《해심밀경》(자홍 譯)


승의 보리심이란, 세간을 벗어난 것이며 모든 희론을 여읜 것이고, 극히 밝은 것이며, 수승한 의미의 영역이다. 오염이 없는 것이며, 흔들림이 없으며 바람 없는 곳의 버터불처럼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그것의 성취는 항상 공경심을 가지고 오랫동안 샤마타와 위빠샤나의 요가를 수습하여 익숙해짐으로써 이루어진다.

까말라실라,《까말라실라의 수행의 단계》(오기열 譯)


승의(勝義) 보리심은 곧 공성(空性)을 바르게 아는 무분별의 지혜를 뜻한다. 승의 보리심은 공성을 현량(現量)으로 인식하는 견도(見道) 이상의 보살부터 갖게 된다.

2.2.2. 공성의 이해[편집]



2.2.2.1. 인무아(人無我)[편집]

티베트 불교에서는 공성에 대한 지혜를 얻는 차제(次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①끊임없이 일어나는 아주 미세한 찰나생멸의 무상(無常) → ②몸과 마음(오온) 외에 따로 '나'란 없다는 거친 무아(無我) → ③'나'라는 실체가 없어 이름과 생각(名言)뿐으로만 존재하는 미세한 무아(無我) → ④공성(무자성無自性)을 깨닫는 바른 지혜

■ 무아(無我)에 대한 네 가지 핵심(གནད་བཞི་ 네 시)

① དགག་བྱ་ངེས་པའི་གནད་ 각쟈 ㅇ에빼 네

- དགག་བྱ་ [각쟈] : 부정해야 할 바, 부정의 대상, 무엇이 없다고 할 때 그 것.

- 중생 누구에게나 선천적으로 '나'라고 하는 개별적 실체가 있다는 인식인 아상(我相), 아집(我執)이 있다(구생아집俱生我執). 이를 경전에서는 유경(有境, 주체)이라 한다.

- 이러한 유경의 대상(경境, 객체)을 분석해서 잘 알아야 한다. 유경의 인식 대상인 경(境)에는 오온(색수상행식)이 있다. 오온을 제외하고 별도로 '나'가 따로 없다. 오온 외에 '아트만', '참나'[6]

등 상호의존하여 발생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아(我)는 없으며, 있다고 여기는 착각을 아상, 아집이라 한다.

- 아상, 아집을 소멸시키려면 '아트만', '참나' 등 부정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부정해야 한다. 만약 부정 대상을 부정하지 못하거나, 부정 대상이 아닌 것을 부정한다면 단견(斷見) 혹은 상견(常見)의 극단에 치우치게 된다. 예를 들어 무아에 대한 설명 중 '없다'고 할 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이를 잘못 이해하면 윤회, 인과, 업, 해탈 등을 모두 부정하는 단견(斷見)에 떨어지게 된다. 유(有)ㆍ무(無)의 두 가지 아(我) 문단 참조.

② ཁྱབ་པ་ངེས་པའི་གནད་ 캽빠 ㅇ에뻬 네

- ཁྱབ་པ་ [캽빠] : 충족함.

- 아상이 집착하고 있는 '나'라는 실체가 있다면, 오온과 하나(一)로 또는 따로(異) 있는 것 말고는 없음을 충족한다.

- 예를 들어 '노르부'라는 이름의 사람이 있다면, 노르부는 집 안 또는 집 밖 둘 중 하나에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오온 안에 있든지 오온 밖에 있든지 둘 중 하나를 충족함이 확실하다.

③ གཅིག་བྲལ་ངེས་པའི་གནད་ 찍델 ㅇ에빼 네

- 자성이 하나(一, གཅིག་)가 아님.

- '나'와 '나의 오온'이 완전히 하나라고 하면, '나', '나의 몸', '나의 마음', '나의 행동'이라고 아(我)와 아소(我所)로 나눠서 따로 구분할 수 없다.

- 이렇게 '나'와 '나의 오온'을 하나라고 보게 되면, 내가 하나인 것처럼 다섯인 '오온'도 하나라고 해야 하거나, '오온'이 다섯이듯 '나'도 다섯이라고 해야 한다.

④ དུ་བྲལ་ངེས་པའི་གནད་ 두델 ㅇ에빼 네

- 자성이 다수(異, དུ་མ་)가 아님.

- '나'와 '나의 오온'이 완전히 다르다면, '나'와 '나의 오온'은 완벽히 무관한 서로 다른 독립된 실체여야 한다. 분리된 측면에서는 '나'와 '나의 오온'이 다르지만 실체로서는 다르지 않다면 이는 거짓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성이 다수가 되는 것은 실현 불가능하다.

- 또한 '나'와 '나의 오온'이 서로 다르다면, 만약 질병, 노화, 죽음이 발생하여도 '나'는 그러한 것들을 겪지 않게 된다. 따라서 '나'는 생멸(生滅)등 오온의 특성을 갖지 않는 잘못이 있게 된다.

- 만일 '나'와 '나의 오온'이 다르다면, 오온을 제외하여야 '나'를 규정할 수 있게 된다.

∴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나'는 없다.

제14대 달라이 라마,《초심자의 새로운 마음의 눈을 뜨게 하는 선설善說(ལེགས་བཤད་བློ་གསར་མིག་འབྱེད་ཅེས་བྱ་བ་བཞུགས་སོ།, Opening the Eye of New Awareness)》

제14대 달라이 라마,《로사르믹제(새로운 마음의 눈을 여는 말씀)》(게셰 소남 초펠 譯)


이러한 논리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오온 외에 별도로 영원불변한 '아트만', '참나' 등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대개 자신의 주관적 체험을 근거로 든다. 그러나 주관적 체험은 증명이나 반증이 불가능하며 믿음, 신념의 영역에 해당한다. 설사 주관적 체험을 인정하더라도 이들의 '아트만', '참나'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면 오온의 일부인 의식의 특정한 상태, 경계(境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김성철 동국대(경주) 교수는 《우파니샤드》 등에서 언급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경지를 불교적 관점에서 사무색정(四無色定) 중 하나인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에서 경험하는 의식의 일시적인 상태, 경계로 해석하였다. 김성철, 《불교 초보 탈출 100문 100답》

그나마 식무변처정은 상당히 고차원적인 선정에 속하지만, 대부분은 깊은 잠에 빠지거나 기절한 것 같은 무기(無記), 혼침(昏沈)의 상태를 경험한 후 이를 "분별망상이 끊어진 자리", "참나" 등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아 주의를 요한다. 명상 중의 각종 체험이나 삼매(三昧, samadhi)는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일시적인 현상이며 이를 통해 번뇌로부터 일시적으로 멀어질 수는 있지만, 무아ㆍ공성에 대한 바른 지혜를 얻었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번뇌의 근원인 아집을 제거할 수 없으며, 이러한 현상에 집착하고 진정한 '나'라고까지 여긴다면 도리어 아집이 더욱 공고해지는 폐단을 초래하여 해탈은 더욱 요원해진다.

불교의 소승과 대승, 그리고 대승의 현교와 밀교 등 모든 가르침에서는 무아의 견해를 설하고 있다. 행(行)의 측면에서는 삼보에 귀의 하는 마음이 있느냐의 여부에 있으며, 견해의 측면에서는 사법인(四法印)을 인정하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있다. 사법인은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열반적정이라고 말씀하셨기에, 일체법이 공하고 무아(無我)임을 모든 불교도가 인정한다.

불교의 4대 학파(유부, 경량부, 유식파, 중관파)가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무아는, '나'(아트만, 원질)는 영원한 것도 아니고, 부분으로 나뉠 수 없는 하나도 아니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유식파에서 주장하는 법무아의 견해는 마음과 마음의 대상이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중관파에서는 현상의 실체가 없다는 의미로 법무아를 주장한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중관의 열쇠》 (게시 소남 걀첸 譯)


외도와 불교도를 구분하는 기준은 방편 측면에서 삼귀의, 견해 측면에서 인무아(人無我) 인정이다. 게시 텐진 남카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브라만교도같은 외도들은 무상(無常)하고, 부분이 있으며,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다른 것에 의존하는 오온과 달리, 오온과 별도로 존재하는 상일주재(常一主宰)[7]하는 인아(人我)를 주장하므로 불교도나 불교 수행자는 될 수 없다. 불교 부파 중 윤회의 주체로서 오온과는 다르지만 오온을 떠나서 따로 존재하지도 않는(非卽蘊非離蘊) 뿌드갈라(Pudgala, 補特伽羅)의 존재를 주장한 독자부, 정량부 역시 불교의 근본 교리인 무아설을 위배했다는 혐의로 '불법에 붙은 외도(附佛法外道)'라고 비판받은 바 있다.

근현대 불교학자들 중에도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나 미즈 리스 데이비스(Mrs. Rhys Davids)처럼, 상대부정(paryudāsa-pratiṣedha)같은 문법적 요소나 경전의 일부 구절을 근거로 "오온은 무아(無我)이며 무자성(無自性)이지만, '아트만', '참나' 등 오온을 제외한 나머지 무언가는 아(我)이며, 자성(自性)이 있다"는 식의 비아설(非我說) 혹은 진아설(眞我說)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오온 외에 별도로 존재하는 '나'가 있다", "자성이 다수이다"란 주장과 별 반 다를 바 없는 가설로, 이로 인해 발생하는 오류는 이미 상술하였고 이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대승 논사들에 의해 논파당하였다.

한편 석가모니는 상주론자들이 비록 불교도는 아니지만 인과를 부정하는 단멸론자보다는 훨씬 우월하다고 보았다. 상주론자들은 인과를 부정하지 않기에 선한 행위를 실천하여 좋은 과보를 누리고, 수행을 통해 지혜자량과 복덕자량을 일부 쌓을 가능성이 있다(그러나 상견常見으로 인해 쌓을 수 있는 자량의 한계가 있다. 자량도資量道의 세제일법世第一法에서 상견은 완전히 극복된다). 인과를 부정하여 수행도 필요없다고 여기면 자량을 쌓을 기회조차 얻을 수 없기에 차라리 승의제의 공성을 부정할지언정 세속제의 인과를 인정하는 편이 낫다.


2.2.2.2. 법무아(法無我)[편집]

그대가 [자성(自性)이 성립하지 않는] 자아를 보듯이

모든 법(法)에도 그렇게 적용해야 한다.

모든 법은 허공과 같아

자성이 전혀 없다.

《삼매왕경(samadhirajasutra)》


오온(五蘊)으로 대변되는 일체 현상의 무아(無我), 즉 법무아(法無我) 역시 위에서 설명한 인무아(人無我)와 유사하다. 예를 들어 물병의 경우, 물병은 수많은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구성된다. 물병을 이루는 여러 작은 부분, 입자들은 근취인(近取因,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물병을 만드는 장인의 노력 등은 구유연(俱有緣, 부수적인 원인)이 되어 물병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원인과 조건에 전혀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생겨나서 스스로의 힘으로 유지되는 물병은 없다. 마찬가지로 모든 법은 자성이 없으며,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부중생의 의식은 마치 법의 자성, 즉 법아(法我)가 존재하는 것처럼 인식하므로, '나' 뿐만 아니라 법에 대해서도 상술한 '무아에 대한 네 가지 핵심'을 철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분석 끝에 전도(顚倒)된 인식의 대상은 해체되어 사라지고, 마음에 떠올렸던 인식 대상은 단지 이름과 생각(名言)으로만 존재하며 그저 연기(緣起)로 구성된 것임을 알게 되어 법무아(法無我)를 깨닫는다.

위에서 언급한 '무아에 대한 네 가지 핵심' 외에도 여러 다양한 논리적 추론들[8]을 통해 무아, 공성에 대해 그릇됨 없이 바르게 알 수 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집중 명상(Skt. sthāpyabhāvanā; Tib. 'jog sgom)을 통해 샤마타를 획득하고, 논리적으로 추론하고 분석하는 명상인 분석 명상(Skt. vicārabhāvanā, Tib. dpyad sgom)을 통해 비파샤나를 획득한다.[9] 티베트 불교에서는 샤마타 수행과 그 결과로 얻게 되는 샤마타, 비파샤나 수행과 그 결과로 얻게 되는 비파샤나로 수행과 결과를 명확히 구분하는 편이다. 보살은 샤마타비파샤나를 함께 닦아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 곧 승의 보리심을 점차로 발현하게 된다. 샤마타와 비파샤나를 통해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가 점차 강화될수록, 공성(空性)으로서의 연기(緣起), 연기로서의 공성이란 진여실상(眞如實相)을 더욱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볼 수 있다. 이는 석가모니불의 수승하고 바른 지견(智見)과 일치한다. 그 밖에 공성에 대한 설명은 티베트 불교/중관 사상 참조.
제14대 달라이 라마,《초심자의 새로운 마음의 눈을 뜨게 하는 선설善說(ལེགས་བཤད་བློ་གསར་མིག་འབྱེད་ཅེས་བྱ་བ་བཞུགས་སོ།, Opening the Eye of New Awareness)》
제14대 달라이 라마, 《로사르믹제》(게셰 소남 초펠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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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삼학사(랍숨섀둡링) 주지 게시 텐진 남카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법에는 가유(假有)와 실유(實有) 2가지가 있다. 가유와 실유를 정의하는 여러 기준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자기동일성(identity)의 인식 여부이다. 어떤 법이든 그것을 인식할 때 다른 법의 특성에 의존해서 인식해야 한다면 가유이고(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떠올릴 때 그 사람의 성격, 형상 같은 오온의 특성을 먼저 떠올리는 것) 어떤 법이든 그것을 인식할 때 다른 법의 특성에 의존하지 않고 법 자체의 동일성, 즉 자성(自性, svabhava)이나 자상(自相, svalaksana)으로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실유이다.[10] 따라서 자아 혹은 개아(個我, pudgala)는 가유이고 실유가 아니다.

상일주재(常一主宰)하는 아(我)를 거친 인아(人我), 독립적 실유(實有)인 아를 미세한 인아라고 한다. 외도는 오온과 별개로 존재하는 상일주재하는 아를 주장하고, 소승의 유부, 경량부와 대승의 유식학파, 자립논증 중관학파 등은 자아와 오온이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유부는 오온의 화합, 경량부는 의식, 유식학파는 아뢰야식, 자립논증 중관학파는 사례의 의식(의식 중에 특별한 의식)을 '나'라고 여긴다. 그리고 귀류논증 중관학파는 자아는 명명할 정도의 수준으로 가설(假說)된 것이라고 말한다.

일체법의 자성(自性)이 공(空)하고 자아는 명언(名言)으로 가립(假立)되었을 뿐이라는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관점에서 볼 때, 소승~자립논증 중관학파까지의 불교 학파들은 모두 자아를 가유라고 주장하지만 오온이나 의식 등의 법(法)은 독립적 실유로 여기는 미세한 아집(我執)이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대승의 유식학파에서 아뢰야식을 건립하는 것 또한 실유의 자아를 건립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선 아(我)가 상일주재가 아님을 이해한 후 아가 독립적 실유가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전자보다 후자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후자를 미세하고 전자를 거칠다고 하는 것이다. #


2.2.2.3. 마음(의식)의 공성[편집]

세간의 유정은 대부분 식온(識蘊)을 헤아려 ‘나[我]’라고 집착하고, 그 밖의 다른 온을 헤아려 ‘내 것[我所]’이라고 집착하는 까닭이다.

《대승아비달마잡집론》(이한정 譯)


흔히 대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견문각지見聞覺知) 인식 작용을 하는 마음(의식)을 변치 않는 '나', '자아', '영혼' 등으로 여기기 쉽지만, 그러한 마음(의식) 또한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찰나생멸을 반복하는 연속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1) 6식(六識)[11]의 각각은 원인들, 즉 각각의 6식 자체의 인식 기능, 대상, 즉각적인 조건 등에 의존하고 있다. (2) 식(識)의 경험이 하나로 단일하게 보일지라도, 그 경험은 깊은 정념 속에서 선명하게 경험할 수 있는, 지극히 짧은 순간들의 식(識)으로 이루어져 있다. (3) 각 순간의 식(識)도 바로 전 순간의 식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바로 다음 순간의 식(識)에게 영향을 준다. 이들 서로 다른 순간들의 식(識)은 단절된 사건들이 뒤섞인 것이 아니라, 연속을 형성한다.

“어리석은 사람아, 조건이 없으면 식(識)이 발생할 일도 없기 때문에, 식(識)은 연기(緣起)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내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갈애 멸진의 긴 경(MN 38:5)》


석가모니는 ‘식(識)’이 자아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사띠(Sati) 비구는 의식이 조건들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저절로 존재하며,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이주하며, 업(業)을 만들면 그 과정에서 변화되는 일이 없이 그 업의 결과를 경험한다고 믿었다. 그러자 석가모니는 식 또한 조건에 의해 발생한다며 사띠 비구를 심하게 질책했다.

실재하는 것은 없다.

오온, 원소, 감각, 감각 기관,

주체, 객체가 온전하게 사라진

법무아와 동일한

내 마음은 본래 발생한 적이 없는

공성 그 자체이다.

《구햐싸마자 딴뜨라(Guhyasamāja tantra)》(양지애 譯)


마음은 윤회와 열반 등 모든 인식하는 현상의 토대이다. 죽음의 과정에서 거친 의식은 정광명(淨光明) 같은 초미세의식에 용해되고, 환생할 때 거친 의식은 초미세의식의 기반으로부터 다시 나온다. 거친 의식에서 건설적인 생각과 파괴적인 생각이 생겨서 업(業)을 만든다. 번뇌에 찬 생각의 결과로 윤회가 오고, 출리심과 보리심과 지혜와 같은 도덕적 마음 상태의 결과로 열반을 성취한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부처의 반열반(般涅槃, parinirvana) 이후에도 부처의 청정하고 자각(自覺)하는 특성을 가진 마음(의식)의 연속은 계속 이어지며 이를 단절할 원인은 없다고 본다.[12] 그러나 이러한 가장 미세하고 청정한 마음, 밀교에서 말하는 족첸의 '릭빠(rig pa)'나 무상요가 딴뜨라의 '정광명(淨光明, ‘od gsal)'조차 순간들로 구성된 연속으로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이며 독립된 실체가 아닌 무자성(無自性)이기 때문에 승의(勝義)로 존재하지 않으며, 외도(外道)의 고정불변한 실체로서의 '영혼', '아트만', '참나' 등과 같지 않다.

정광명 같은 미세한 마음/의식은 윤회와 열반을 얻는 기반이지만, 마음은 '마음'이라는 명언(名言)으로만 가립(假立)되었을 뿐 그것의 독립적이고 불변(不變)하는 실체를 찾고자 한다면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즉 마음의 궁극적인 본성 혹은 마음의 법성을 안다는 것은 '주체(혹은 마음/의식)의 무자성=주체의 공성'을 온전히 깨닫는 것과 같다. 무상요가 딴뜨라 등 밀교(密敎)의 공성에 대한 견해와 현교(顯敎)인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공성에 대한 견해는 일치한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툽텐 최된, 《달라이 라마의 불교 강의》(주민황 譯)

2.2.3. 공성과 자비의 관계[편집]


성문 연각 등은 능인으로부터 태어나고

부처님은 보살로부터 태어나시니

자비심과 둘이 아닌 마음(공성)과

보리심은 보살들의 씨앗이다.

연민심이란 승리자의 원만한 결실로

이것의 씨앗이며 성장시키는 물과 같고

오랫동안 수용하는 대상을 성숙시키는 것이기에

그래서 내가 가장 먼저 자비를 찬탄하는 것이다.

먼저 나라고 자신을 애착하고

나의 것이라고 사물에 집착이 생겨나니

도르래처럼 자유가 없는 중생에게

자비를 일으키게 한 모든 것을 공경한다.

중생은 움직이는 수면 위의 달과 같이 흔들리고

자성(自性)이 공(空)함을 본

이러한 보살의 마음은 모든 중생을

해탈시키기 위해 자비로 순응하고

보현(普賢)의 원력으로 잘 회향하여

환희에 머무는 그것을 초지(初地)라 부르며

그때부터 초지를 얻게 되었으므로

보살이라 불리는 호칭을 얻는다.

짠드라끼르띠,《입중론》(양지애 譯)


불교에서 지혜와 함께 자비를 강조하므로 불교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한다고 여기기 쉽지만, 자애심, 자비심, 보리심 등의 도덕적이고 선한 마음은 거친 의식에 해당하며 초미세의식 자체는 선악(善惡)을 떠난 중립적인 의식이다. 또한 미세의식과 거친 의식 모두 본질은 공(空)이며 선악의 분별은 조건지어진 연기(緣起)에 해당한다.[13] 미세의식은 중립적이며 자애심, 자비심, 보리심 등의 도덕적인 마음은 거친 의식에 해당하므로 도덕적인 마음의 계발과 함양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대승 불교의 윤리, 수양론에 토대가 된다.

대승 불교에서 자비의 최종형태는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와 자비심이 결합한 무연자비(無緣慈悲)[14]이지만,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만으로 무연자비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와 자비심은 지혜와 방편에 해당하는 각기 다른 법(法)이기 때문이다. 단, 지혜와 자비를 함께 수행하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가 발달할수록 무명(無明)에 얽매인 중생들에 대한 연민이 늘어나고, 자비심을 수행하면 공성에 대한 명상이 용이해지며 일시적으로 거친 번뇌를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제14대 달라이 라마, 툽텐 최된, 《달라이 라마의 불교 강의》(주민황 譯)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견해에 의하면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는 성문, 연각, 보살 삼승이 모두 가지고 있지만 대비심을 원인으로 하는 보리심 없이는 부처의 길로 나아갈 수 없다.[15] 따라서 보살은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 뿐 아니라, 원만한 부처의 과위를 얻는 종자이며 육바라밀 등 보살행의 실천을 증장시키는 대비심(大悲心)에 대해서도 수행하여야 한다.

반야학의 권위자인 겔룩의 학승 게시 빨덴 닥빠(dpal ldan grags pa) 스님은 대비심의 정의에 대해 '일체중생을 대상으로 모든 허물과 고통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슴 속 깊이 저절로 생긴 연민심'이라고 말하였다. 수없는 전생 동안 일체 중생이 나의 어머니 아닌 적이 없으며, 때문에 그들 또한 이번 생의 어머니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인 지모(知母), 내 어머니였을 적 은혜를 기억하는 염은(念恩), 그 은혜에 보답해야겠다는 보은(報恩), 모든 중생이 행복하길 바라는 자심(慈心) 등 네 가지를 대비심의 공통적이지 않은 주된 원인으로 삼는다.[16]

진정한 대비심은 꾸밈없이 저절로 일어날 정도의 수준에 이르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대비심에 익숙해지게 하는 조건들을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한다. 마치 집착과 같은 번뇌도 익숙해지면 저절로 일어나는 것 같이 대비심도 익숙해질수록 저절로 꾸임없이 일어나는 것이 가능하다. 이와 관련하여 샨띠데바의 《입보살행론》에서 “익숙해지면 쉬워지지 않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다르마끼르띠의 《석량론》에서도 “마음이 자비 등에 익숙해지면 저절로 생기게 된다.”라는 등의 논리적인 이유를 들어 자세히 설명하였다.

대비심을 닦는 구체적인 방법에 관해 설명하자면, 무아를 닦는 것과 같이 대상을 뚜렷하게 보는 것을 위주로 하는 경우에 주로 족곰(집중명상)을 해야 하는 것과 달리, 자비를 닦는 것과 같이 마음의 힘을 증장시키려 하는 경우에는 주로 여러 가지 이유에 관해 분석하는 쬐곰(분석명상)을 해야 한다. 대비심에 관한 분석명상에서 처음에는 부모, 가족, 친지 등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서 시작하여 다음으로 자신에게 손해도 이익도 주지 않은 주변 사람, 나중에는 자신에게 해를 끼친 원수까지 대상을 확장해나간다. 또는 질병, 기아, 형벌, 혹한과 혹서, 도살, 폭행, 재난 등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중생들을 사유하고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얻기를 발원하고, 그 뒤 업과 번뇌에 시달리는 삼계(三界)의 모든 중생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얻기를 바라는 대자대비심이 가슴 속 깊이 일어나도록 노력하고 익숙해진다.
게시 빨덴 닥빠, 《공성과 자비에 대한 고찰의 요지(སྟོང་ཉིད་དང་བྱམས་བརྩེའི་སྐོར་རྟོག་འཆར་གནད་བསྡུས།)》(게시 소남 걀첸 譯)

서양의 일부 불교학자들은 자비심과 공성에 대한 대승 불교의 가르침이 모순된다고 이해하였다. 예컨대 예수회 사제이며 뛰어난 불교학자였던 하인리히 두몰린(Heinrich Dumoulin)은 지혜와 자비의 통일에 대해 "이 관점의 문제점은 인간들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말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들의 주장처럼 덧없는 인간 존재에는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상 도와주고 구원하는 사람도 없고, 도움과 구원을 받는 사람도 없음을 알아차림하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구원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실체의 환상에 얽매이지 않으면 보다 활동적이고 자유롭게 자비를 행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주장에는 논리적인 모순이 있지 않은가?"라고 말하였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는다면 자비심도 틀림없이 실재가 아니고 그런 자비심은 아무런 가치도 없으며,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고통받는 개인이라는 개념이 있어야 자비심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까르마 까규의 스승인 제9대 따렉 꺕괸(sgra legs skyabs mgon) 린뽀체는 공성에 의해 자비심의 효력이 줄어들지 았으며 오히려 공을 바르게 이해할 때 진정으로 자비심을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타인에게 세속제에 해당하는 자비심을 느끼더라도, 자비심이 승의제인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와 결합해야만 비로소 타인을 고통으로부터 진정으로 해방시킬 수 있다.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비롯되고, 현상을 꿈처럼 보는 것은 세상에 대한 집착을 놓아 버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한 자비와 공성이 결합할 때, 별개의 독립적인 주체와 객체로 이루어져있다는 이원적(二元的) 인식을 초월하여 모든 존재가 상호의존하고 있다는 불이(不二)의 인식으로 진정으로 무한하고 열린 자비를 발현할 수 있다. '자기'와 '타자'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않으면 결코 근본적으로 자비로워질 수 없고 끊임없이 삶에 고통을 초래하게 된다.
따렉 꺕괸, 《티베트 마음수련법 로종》(이창엽 譯)


제14대 달라이 라마, 《부정적인 감정 극복하기》

3. 원보리심과 행보리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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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란다 사원에서 《입보살행론》을 설한 샨티데바[17]

보리심을 간단히 요약해서 말하면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나니

발원하는 원보리심과

발원한 것을 실행하는 행보리심이나이다.

어디를 가고 싶어하는 것과

실제로 가는 것이 다르듯이,

현명한 이들은 이 두 가지 보리심의 차이를

순서대로 알아야 하나이다.

《입보살행론》(석혜능 譯)


《입보살행론》에서는 보리심을 원보리심(願菩提心)행보리심(行菩提心)으로 구분한다. 원보리심은 모든 중생을 돕기 위해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려는 소망이다. 그리고 행보리심은 원보리심을 실제로 이루기 위해 보살계와 육바라밀, 사섭법 등을 실천함을 의미한다. 원보리심과 행보리심을 각각 눈과 다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원보리심을 통해 가야할 곳을 보고, 행보리심을 통해 그곳에 이르는 길을 걷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3.1. 원(願)보리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티베트 불교/자비와 보리심의 강조/원(願)보리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 행(行)보리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티베트 불교/자비와 보리심의 강조/행(行)보리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관련 서적[편집]


소원을 들어주는 모든 보석보다

더 소중한 모든 존재를 위하여

최상의 목표를 성취하고자 하니

언제나 제가 그들을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나를 가장 낮은 사람으로 여기고

마음 깊이

다른 사람을 윗사람으로 받들게 하소서.

그 무엇을 행하건 내 마음을 잘 살피기를

그리고 나와 남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번뇌가 일어나면 바로

단호히 맞서 물리치게 하소서.

매우 부정적이며 고통에 억눌려

성품이 밝지 않은 사람을 보면

마치 귀한 보물을 찾은 듯이

그들을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남들이 나를 시기하여

부당하게 욕하고 비난하고 조롱해도

좌절은 내 몫으로 받아들이고

승리는 그들에게 바치게 하소서.

내가 도움을 주었거나

큰 기대를 걸었던 사람이

몹시 나를 고통스럽게 해도

변함없이 그를 존경하는 스승으로 여기게 하소서.

요약하면 이익과 기쁨은

직간접으로 내 어머니였던 모든 중생께 드리며

내 어머니의 모든 상처와 고통은

은밀히 내가 떠맡게 하소서.

이러한 모든 행이 세속 팔풍에 물들어

더럽혀지지 않게 하시고

모든 것이 환영임을 깨달아

애착 없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랑리 탕빠,《수심팔훈》[18]

(양지애 譯)


로종과 관련된 문헌으로는 《보행왕정론(보만론)(Ratnāvalī)》, 《보살지(Bodhisattvabhūmi)》, 《입보리행론(입보살행론)(Bodhicaryāvatāra)》, 《마음을 다스리는 8가지 게송(수심팔훈, 수심팔송)(blo sbyong tshigs rkang brgyad ma)》, 《수심칠요(blo sbyong don bdun ma)》, 《보살행37송(rgyal sras lag len so bdun ma)》 등이 있다.

국내에 번역된 관련 서적은 다음과 같다.
(일부 서적은 절판된 점 참고 바람)

#(중관)보만론/보행왕정론

#친우서/권계왕송

#보리심석론

#보살지

#입보리행론/입보살행론

#수심칠요

#보살행37송 #수심팔훈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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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 탱화의 관세음보살은 팔이 4개인 사비(四臂)관음이다. 4개의 팔은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상징하고 흰 색 몸은 번뇌에 물들지 않는 청정함을 상징한다. 정수리에는 근본 스승(本師)인 아미타불을 정대(頂戴)하고 있으며 가운데 양 손에는 여의주, 오른손에는 수정 염주, 왼손에는 백련(白蓮)을 들고 있다.[2] 관세음보살이 대비(大悲)의 본체인 대비심(大悲心)을 상징한다면, 따라보살은 대비의 작용인 대비행을 상징한다. 따라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눈물에서 화현한 화신(化身) 혹은 여성 수행자의 몸으로 성불한 부처로 알려졌다. 또한 오방불(五方佛) 중의 하나인 북방 불공성취불(不空成就佛, Amogasiddhi)의 불모(佛母)로서 불공성취불과 같은 녹색 형상을 취한다. 한역에서는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건져 주는 불모(佛母)'라는 뜻의 '도모(度母)'로 일컬어지며, 관련 경전도 한역 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다.[3] 대승(상사도)의 보리심 뿐 아니라 소승(중사도)의 출리심도 마찬가지로 밤낮없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정도가 되어야 한다. 《육십송여리론》의 주석처럼 "불타는 집에 갇혀 있던 이들이 그 곳을 벗어나고, 감옥에서 갇혀 있는 죄수들이 감옥을 탈출하려는 듯"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밤낮 없이 일어날 때 비로소 출리심이 생겼다고 본다.[4] 보리심을 개발하는 로종 수행은 티베트 불교의 수행 체계인 보리도차제(람림)의 상사도(上士道)에 해당한다. 때문에 로종 수행을 하기에 앞서 이전 단계인 하사도(下士道)와 중사도(中士道)의 토대를 갖출 필요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티베트 불교/수행 체계 참조.[5] 전통적으로 대승불교에서 자비는 부격(父格), 지혜는 모격(母格)에 해당한다. 자식이 아버지의 종성(種姓)을 따르듯, 반야 지혜는 성문ㆍ연각ㆍ보살 삼승(三乘)의 공통적인 원인이지만 자비의 정도에 따라 각각의 승(乘)이 구분되므로 자비를 아버지, 지혜를 어머니에 비유한 것이다. 티베트 불교 도상에서 보통 반야불모는 가운데 두 손으로 선정인(禪定印)을 취하고(사진의 불상은 전법륜인轉法輪印을 취하고 있다) 나머지 양 손에 지혜를 상징하는 금강저와 반야경을 지물(持物)로 가진 모습으로 묘사된다.[6] 불성ㆍ여래장 계열이나 선종(禪宗)에서 방편교설로 제시하는 '진아(眞我)', '참나'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부정대상인 '참나'는 방편설이 아닌, 외도(外道)의 아트만과 같은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아(我)를 의미한다. 참고로 선종에서는 유무(有無)의 양변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中道)를 얻기 위해 갖가지 언어적 방편을 사용하는데, 가령 무변(無邊)에 치우친 경우 '한 물건(一物)'을, 반대로 유변(有邊)에 치우친 경우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등을 설하여 고정된 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선종의 '참나' 역시 '한 물건'과 유사한 의도를 지닌 언어적 방편으로 해석 가능하다. 그러나 '참나'라는 방편설이 취지와는 달리 대중에게 많은 혼동을 야기하여 불교계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비판이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현재 한국 불교에서도 '참나'라는 표현을 점차 사용하지 않는 추세이다.[7] 상(常): 상주성(常住性), 일(一): 무분(無分)의 일(一), 주재(主宰): 독립성[8] 다른 추론들에 관하여 제14대 달라이 라마,《달라이 라마의 불교 강의》 7, 8장을 참조할 것.[9] 분석 명상에 관한 국내 서적으로 《달라이 라마가 전하는 우리가 명상할 때 꼭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10] 불교에서 법(法)의 독립성은 존재론적 차원과 인식론적 차원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존재론적 차원에서 법의 독립성은 다른 법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성립하는 것이고, 인식론적 차원에서의 독립성은 다른 법의 특성에 의존하지 않고 그 법에 대한 인식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외도(外道)가 건립한 상일주재(常一主宰)로서의 아(我)는 존재론적 독립성을 내포하고, 소승 유부, 경량부와 대승 유식학파, 자립논증 중관학파가 건립한 독립적 실유(實有)로서의 아(我)는 인식론적 독립성을 내포한다.[11] 전오식(前五識)인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식과 제6식(第六識)인 의(意)식을 가리킨다. 티베트 불교는 중관학파의 견해를 따르기 때문에 유식학파에서 주장하는 제7식 마나식, 제8식 아뢰야식 등을 인정하지 않는다.[12] 티베트 불교를 비롯한 대승불교에서는 윤회를 지속시키는 업과 번뇌 등의 원인이 완전히 소멸되면 오염된 온(蘊) 또한 더이상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청정하고 자각하는 본성을 가진 마음의 연속은 끊임없이 이어지며 이러한 연속을 단절시킬 다른 원인은 없다고 본다. 따라서 티베트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부처의 출생부터 반열반까지의 일생인 12상(相) 혹은 8상(相)은 중생을 교화하여 수행으로 이끌기 위해 보인 방편에 해당하며, 반열반 이후에도 부처의 청정한 마음의 연속은 사라지지 않고 지속된다. 부처는 번뇌에 오염된 오취온(五取蘊)이 아닌 부처의 사신(四身)을 통해 일체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제도행을 끊임없이 행하고 있다.[13] 인도의 마하싯다들과 티베트의 닝마, 까규 중 돈오를 강조하는 측에서는 불성ㆍ여래장 사상을 근거로 '중생이 이미 본래 부처'라는 레토릭을 종종 사용했고, 역시 불성 사상에 기반한 동아시아의 선불교 조사들 또한 '본래 부처', '자성불' 등을 언급한다. '본래 부처'라는 긍정적 레토릭은 중생에게 선천적으로 이상적이고 자비로운 부처의 성품이 내재한다는 성선설적(性善說的) 인상을 전달하기 쉽다.
그러나 불성의 궁극적인 본질은 선악과 같은 개념적 분별로부터 자유로운 공성이라는 점에서 불성 사상은 통상적인 의미의 성선설과 구별되어야 한다. 예컨대 족첸에서 '카닥(ka dag)'이라 일컬어지는 본초청정(本初淸淨)은 곧 선악을 초월한 공성을 의미하며, 《육조단경》에서도 혜능은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이러한 때 명(明) 상좌의 본래면목은 무엇인가?(不思善不思惡 正與麽時 那箇是明上座 本來面目)"라고 선악을 초월한 궁극적 본질에 대해 질문하였다.
다만 쫑카빠가 《도의 세 가지 핵심》에서 "인과로 드러난 공성의 이치 깨달으면 극단의 견해에 빠지지 않게 되네." 라고 말한 것처럼 속제의 인과를 통해 진제의 공성을 바르게 알 수 있고, 따라서 공성을 안다는 것은 곧 공성과 상호의존 관계인 인과를 아는 것과 같다. 빠드마삼바와가 "나의 견해는 하늘보다 높지만 행위는 보릿가루보다 더 세밀하다."라고 말한 것처럼 진정으로 공성을 증험하게 되면 신ㆍ구ㆍ의로 짓는 행위 하나하나가 인과의 이치에 순응하게 되고 더 나아가 이원성(二元性)을 초월한 무연자비(無緣慈悲)의 실천도 가능해지기 때문에 공(空) 사상은 윤리, 자비의 실천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14] 대비심(大悲心)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①중생연자비(衆生緣慈悲): 중생을 대상으로 하는 대비심. 중생이 무상(無常)이나 무자성(無自性)임을 깨닫지 않고 일으킨 대비심.
②법연자비(法緣慈悲): 법을 대상으로 하는 대비심. 중생이 무자성임을 깨닫지 않고 무상임을 깨달은 지혜로 일으킨 대비심.
③무연자비(無緣慈悲): 무자성을 대상으로 하는 대비심. 중생이 무자성임을 깨달은 지혜로 일으킨 대비심.
[15] 티베트 불교에서 자기중심적 태도와 아집은 인과관계를 맺지 않아 하나가 다른 것의 원인이 되지 않으며 동질관계도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하나가 심상속(心相續)에 존재하더라도 반드시 다른 하나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 자기중심적 태도는 우리 자신을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태도이고 아집은 자아가 존재하는 방식을 오해하게 만드는 요소로서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아(我)가 내재적으로 존재한다는 잘못된 견해, 어리석음의 번뇌인 우치(愚癡)에 해당한다(아집의 일반적인 의미와 불교적인 의미에 차이가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자기중심적 태도는 번뇌장도 소지장도 아니며 따라서 윤회의 근원도 아니다. 성문, 연각은 아집을 근절하였지만 자기중심적 태도를 버리지 못했고, 8지 미만의 보살은 번뇌장을 제거 못해 아집이 남아있지만 반드시 자기중심적 태도가 있다고 볼 수 없다. 자기중심적 태도는 성문승, 연각승에서 해탈을 성취하게 하는 등 모든 훌륭한 활동을 하게 만드는 올바른 마음이지만, 부처를 이루기 위한 보살도를 수행하는 과정에서는 버려야 할 대상이다. 보리심은 자기중심적 태도의 대치법(對治法)이고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는 아집의 대치법이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툽텐 최된, 《달라이 라마의 불교 강의》(주민황 譯)
부연하자면 윤회를 벗어난 성문, 연각, 8지 이상 보살은 아집을 제거했지만, 자기 중심적 태도 혹은 이기심은 무상정등각을 이룬 붓다를 제외한 모든 중생이 갖고 있다. 그 중 보살은 보리심으로 자기 중심적 태도를 대치(對治)하는 존재다. 때로 어떤 보살은 오랜 습기(習氣)로 인해 자기 욕망을 우선시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때마다 보살은 다른 중생을 위하는 이타의 보리심으로 자기 중심적 태도, 이기심을 대치(對治)해야 한다.
[16] 또는 타자 역시 자신처럼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멀리한다는 보편적인 사실을 인지하고, 무아(無我)와 연기(緣起)에 대한 통찰을 통해 타인을 자신처럼 소중히 여기는 자타상환법으로 대비심, 보리심을 증장할 수도 있다.[17] 자신의 수행을 위해 지은 《입보살행론》을 날란다 사원의 전교생 앞에서 암송하던 중 제9장의 “모든 것은 허공과 같다(공하다)”는 구절에 이르자, 점점 높이 하늘로 솟아오르더니 모습은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아 암송을 끝까지 계속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18] 달라이 라마의 《수심팔훈》 법문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