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히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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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터키 아크히사르 3.jpg
시가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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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시기 바실리카 유적

1. 개요
2. 역사
2.1. 중세
2.2. 근현대
3. 갤러리
3.1. 티아티라


1. 개요[편집]


Akhisar

튀르키예 서부의 도시. 마니사에서 동북쪽으로 45km, 발르케시르에서 남쪽으로 70km, 알라셰히르에서 서북쪽으로 75km, 우샤크에서 서쪽으로 100km 떨어진 평지에 위치한다. 인구는 11만명으로, 마니사 도 제2의 도시이다. 전통적으로 리디아 북부의 중심지 티아티라 (Θυάτειρα)였고, 염색업을 중심으로 상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요한 묵시록에서는 소아시아 7대 교회 중 하나인 두아디라로 언급되었다. 다만 마니사, 알라셰히르와 마찬가지로 튀르키예 독립전쟁 시에 학살과 방화가 이루어져 수백년간 이어지던 종교적 다양성은 사라지고 말았다.

시내에는 옛 성당과 병원 유적 및 전통 가옥들이 다수 남아있다. 서남쪽 5km 지점에는 자동차 정비와 농산물 가공을 주력으로 한 산업단지가 있고, 2018년 서쪽 3km 지점으로 이전된 철도역에서는 이즈미르, 반드르마, 에스키셰히르 등지로 향하는 기차가 다닌다. 튀르키예 TTF 2. 리그 소속 아크히사르 벨레디예스포르의 연고지이다. 일대의 농지에서는 튀르키예 담배 생산량의 10%가 산출되고, 그외에 올리브아몬드 등이 경작된다. 주민들은 체스를 즐기며, 매년 체스 대회를 포함한 자글락 축제가 열린다. 2009년 가을에는 U-16 세계 체스 올림피아드를 개최하였다.

2.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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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카 유적 옆의 옛 회랑 유구. 2019년 들어 복원되었다
사르데스와 함께 미시아, 이오니아, 카리아 지방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로써 일찍부터 도시가 형성되었다. 본래 펠로피아 (Πελόπεια) 혹은 세미라미스 (Σεμίραμις)라 불렸으나 기원전 290년, 리시마코스와 전쟁 도중 딸의 출생 소식을 들은 셀레우코스 1세가 이를 기념하며 그리스어로 딸을 의미하는 투가테라 (θυγατέρα)를 차용한 투아테이라로 명명하였다. 혹은 기존 리디아식 지명을 변형한 것이라고도 하는데, 시간이 흐르며 지명은 티아티라 (Θυάτειρα)로 간략화되었다. 로마 제국기 티아티라는 경제적으로 염색업이 발전하였고, 특히 부귀의 상징이던 보라색 옷감의 거래로 유명하였다. 또한 당대 로마령 아시아 속주의 도시들 중 가장 많은 상인 조합 (συντεχνία, 순테쿠이아)이 있었다. 최근 발굴을 통해 염색공 조합 외에도 양모, 마직류, 외투, 가죽제품 제작 및 무두장이, 배달부, 제빵사, 노예상, 대장장이 등 다양한 직업군의 상인 조합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1]

이렇듯 활발한 상업 도시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던 티아티라는 일찍부터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어 요한계시록에서 언급된 7대 소아시아 교회 중 하나인 두아디라로 언급되었다. 당시 이제벨이라는 여자 예언자가 활동하며 기독교도들을 현혹시키는 것을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한편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중 트라키아의 필리피에서 티아티라 출신의 보래색 옷감 상인 리디아를 만나 환대를 받았는데, 그녀는 바울이 유럽에서 처음으로 개종시킨 이로써 동서 교회 모두에서 성녀로 추숭된다. 그외에 티아티라 출신의 인물로써 기원전 8년 제193회 고대 올림픽 (올림피아드)의 육상 종목에서 우승한 아르테미도로스가 있다. 로마 시대 티아티라는 3개의 김니지움 (체육관)을 지닌 큰 도시였고, 서기 214년 로마 황제 카라칼라는 티아티라를 속주의 하위 행정구역인 콘벤투스의 치소로 삼아 지방 법원을 두었다. 366년 티아티라에서는 프로코피우스의 반란군이 발렌스 황제의 진압군에게 격파되었다.

2.1. 중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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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시기의 바실리카 유적

7세기 후반과 8세기 초엽 우마이야 왕조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 당시 티아티라 역시 파괴되었고, 그때마다 재건되었으나 조금씩 쇠퇴하였다. 1307년 도시는 사루한 베이국 령이 되었고, 튀르크식 지명인 아크히사르 (하얀 성채)로 불리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기 아크히사르는 사루한 산작 하의 카자 (군) 중에서 첫 순위였고, 일대의 교통 / 산업 거점으로써 주도인 마니사보다 40%나 더 많은 조세가 걷혔다. 따라서 19세기 철도 건설에 있어 아크히사르는 초기 계획에 포함되었고, 1890년에 철도역이 세워졌다. 다만 그무렵 수백년간 공존해오던 기독교도와 무슬림 주민들 간에 어둠이 드리웠다.

2.2. 근현대[편집]


19세기 말엽 다른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대에는 러시아-튀르크 전쟁으로 추방된 불가리아 무슬림들이 다수 정착하였는데, 기독교도에 원한을 품던 그들은 1895년 10월 현지 아르메니아 인들을 공격해 학살하였다. 1917년 통계에 의하면 아크히사르에는 3만 2천의 무슬림과 5천 9백의 그리스인, 5백의 아르메니아인, 5백의 유대인이 있었다. 튀르키예 독립 전쟁기에는 1919년 6월 그리스 군이 침공했으나 현지 주민들의 반발로 5일 후 철수하였다. 이듬해 6월 하계 공세의 일환으로 그리스 군은 재차 아크히사르를 점령하였다. 1922년 9월 튀르키예군이 수복할 당시 7천에 달하는 그리스 인들은 학살되었고, 아르메니아 공동체 역시 현지 무슬림들이 쿠란에 맹세하며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음에도 결국 배신당하여 약탈과 학살로 소멸되었다. 남은 기독교도들은 이듬해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으로 이주되며 아크히사르에는 현재 튀르크 무슬림들만 남아있다.

3. 갤러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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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심의 옛 골목과 옛 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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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세워진 파샤 자미

3.1. 티아티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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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카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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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카 유적 옆의 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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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카 유적의 북쪽 400m 지점 옛 병원 부지의 발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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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카 유적 일대에 흩어져 있는 유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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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외에 노끈과 올리브, 올리브유, 포도, 건포도, 수박 등의 농산물을 콘스탄티노플 시장에 팔았다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