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난두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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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 제11대 국왕
페르난두 2세
Fernando II


출생
1816년 10월 29일
오스트리아 제국 코부르크 궁전
사망
1885년 12월 15일 (향년 69세)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재위기간
포르투갈 국왕
1837년 9월 16일 ~ 1853년 11월 15일
서명
파일:페르난두 2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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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
이름
페르난두 아우구스투 프란시스쿠 안토니우 드사셰코부르구고다
(Fernando Augusto Francisco Antônio de Saxe-Coburgo-Gotha)
아버지
작센코부르크고타의 페르디난트 공자
어머니
마리아 안토니아 코하리
형제자매
아우구스트, 빅토리아, 레오폴드
배우자
마리아 2세 (1836년 결혼 / 1853년 사망)
엘리제 헨슬러 (1869년 결혼)
자녀
페드루 5세, 루이스 1세, 주앙, 마리아 아나, 안토니아, 페르난두, 아우구스투 등
종교
로마 가톨릭


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



1. 개요[편집]


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의 제11대 국왕.[1]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출신으로[2] 영국빅토리아 여왕앨버트 공과 사촌 관계이고[3]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벨기에의 초대 국왕 레오폴드 1세의 조카이다. 또한 불가리아 왕국차르 페르디난트 1세의 큰아버지이다. 여동생 빅토리아의 장남인 가스통 도를레앙은 페르난두 2세의 처남 페드루 2세의 장녀인 이자베우와 결혼해 현재 명목상의 브라질 황위를 잇고 있는 오를레앙스-브라간사 가문을 개창하였다.

2. 생애[편집]


1816년 오스트리아 제국 코부르크 궁전에서 초대 작센코부르크 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의 동생이자 벨기에 초대 국왕 레오폴드 1세의 형인 페르디난트 공자와 코하리 공 페렌치 요제프의 딸인 마리아 안토니아 코하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아우구스트[4], 빅토리아[5], 레오폴드[6]가 있었다. 어린 시절 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 및 독일에 널리 퍼진 가족 소유의 영지에서 자랐다.

1835년 포르투갈의 여왕 마리아 2세는 남편으로 삼았던 오귀스트 드 보아르네와 2달만에 사별한 뒤 조속히 배우자를 맞이해서 후계자를 낳으라는 신하들의 독촉에 따라 새 남편을 찾아나섰다. 국무장관을 맡고 있던 제2대 라브라디오 백작 프란시스코 데 알메이다 포르투갈이 여왕에게 적합한 인물을 물색한 끝에 훌륭한 집안에 온화한 성품을 갖춘 페르난두를 주목하고 페르디난트 공자와 협상했다. 1835년 12월 1일 결혼 계약이 체결되었으며, 1836년 1월 1일 마리아 2세의 대리인과 함께 대리 결혼식을 거행한 뒤 포르투갈 육군 원수로 자신을 선임한다는 법령에 서명했다. 이후 코부르크를 떠나 벨기에를 거쳐 리스본으로 이동해 4월 8일에 도착했다. 마리아 2세와의 정식 결혼식은 이튿날 거행되었다.

포르투갈 법에 따르면, 페르난두는 여왕의 남편으로서 첫번째 상속인이 태어난 후에야 왕의 칭호를 받을 수 있었다.[7] 그래서 장남 페드루 5세의 탄생 전까지는 프린스 칭호의 국서로 지냈으며, 1836년 5월 4일 왕립 과학 아카데미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837년 9월 16일 장남 페드루 5세가 태어나자 공동 국왕이 되었다. 그는 공동 국왕이 된 후에도 예술에 전념하면서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꺼렸다. 그러면서도 포르투갈의 유적들이 별다른 관리를 받지 못하고 훼손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이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덕분에 마프라 수녀원, 바탈랴 수도원, 그리스도 수도원, 예로니모 수도원, 리스본 대성당, 벨렝탑이 보전될 수 있었다. 또한 역대 포르투갈과 브라질의 문학가들의 문집과 시, 역사가들의 연대기, 과학 기사들을 실은 <포르투갈과 브라질의 현대 잡지(Revista Contemporânea de Portugal e Brasil)>를 발행했다.

페르난두는 아내에게 무척 자상한 남편이었으며, 마리아 2세 역시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마리아 2세는 총 11번의 임신을 하였는데, 그 중 네 아이는 사산되었고 7명의 자식이 무사히 태어났다. 페르난두는 아내의 출산이 임박할 때마다 그녀의 왕위까지 섭정을 맡으면서 아내의 방침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다 1853년 마리아가 11번째 아이를 낳던 중 사망하자, 그는 포르투갈 왕위에서 물러났다. 대신 마리아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장남 페드루 5세가 16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2년간 섭정을 맡았다.

1862년 그리스 국왕 오톤이 실정을 거듭해 민심을 잃어 폐위될 위기에 몰리자 스스로 퇴위했다. 이때 그리스의 일부 인사들이 페르난두에게 왕좌를 제안했지만, 그는 거부 의사를 밝혔다. 1868년 스페인 여왕 이사벨 2세가 9월 혁명으로 폐위되어 프랑스로 망명했다. 스페인 임시정부는 페르난두에게 스페인 왕관을 제안했지만, 그는 이번에도 거절했다.

1869년 스위스계 미국인 여배우 엘리제 프리데리케 헨슬러(Elise Friedericke Hensler)와 1869년귀천상혼했다. 페르난두 2세의 사촌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2세[8]는 엘리제에게 '에들라 여백작(Countess of Edla)'이라는 작위를 내려줬다. 그는 말년에 포르투갈 공동 국왕을 맡았을 때 건축했던 페나 궁전에서 500여 종의 다양한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정원을 조성한 채 당대의 여러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엘리제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고, 1885년 12월 15일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아내 마리아 2세가 묻힌 상 비센트 드 포라 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 관계[편집]



  • 두번째 아내 엘리제 헨슬러
    • 자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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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여왕에게 장가들어 공동 왕이 된지라 아내의 브라간사 왕조로 취급될 뿐, 페르난두 2세 본인은 계속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였다.[2] 원래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의 본가는 루터교를 믿지만 페르난두 2세가 속한 코하리 계통은 종교가 가톨릭이었는데, 페르디난트 공자가 헝가리계 귀족 가문인 코하리 가문의 상속녀와 결혼하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했기 때문이다.[3] 빅토리아 여왕은 고모 빅토리아 공녀의 딸이고, 앨버트 공은 백부 에른스트 1세의 차남이다.[4] 1818 ~ 1881. 불가리아 국왕 페르디난트 1세의 아버지[5] 1822 ~ 1857. 프랑스 국왕 루이필리프 1세의 둘째 아들인 네무르 공작 루이 도를레앙과 결혼. 브라질 황제 페드루 2세의 딸인 브라질의 이자베우 황태녀의 남편인 외우 백작 가스통이 이 여인의 아들이다.[6] 1824 ~ 1884. 당대 오스트리아에서 대단한 인기를 구가했던 여성 피아니스트, 연극 배우, 작곡가, 가수였던 콘스탄치 가이거의 남편.[7] 이 때문에 마리아 2세의 첫 남편인 오귀스트 드 보아르네는 생전에 포르투갈 국왕이 되지 못했다.[8] 앨버트 공의 형.[9] 남편이 즉위하기 전에 사망해서 왕비가 되진 못했다. 셋째딸 마리아 요제파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 카를 1세의 어머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