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퍼시(핫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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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헨리 퍼시
Henry Percy
별명
해리 핫스퍼
Harry Hotspur
생몰년도
1364년 5월 20일 ~ 1403년 7월 21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노섬벌랜드 워크워스 성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슈롭셔 주 슈루즈버리
아버지
헨리 퍼시
어머니
마가렛 네빌
형제자매
토머스, 랄프
아내
엘리자베스 모티머
자녀
헨리, 엘리자베스
직위
기사, 가터 기사단 단원, 스코틀랜드 국경 감시관
1. 개요
2. 생애
3. 가족



1. 개요[편집]


잉글랜드 왕국기사. 백년전쟁 시기에 스코틀랜드군과 프랑스군에 맞서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전쟁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용맹을 떨쳤고, 성격이 불 같았기 때문에 '해리 핫스퍼'(Harry Hotspur: 무모한 해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403년 헨리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슈루즈버리 전투에서 전사했다.


2. 생애[편집]


1364년 5월 20일 노섬벌랜드의 워크워스 성에서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제2대 라비의 네빌 남작 랄프 네빌의 딸인 마가렛 네빌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토머스, 랄프가 있었지만, 그보다 먼저 사망한 것 외에는 자세한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1378년 12월, 아버지의 지휘하에 스코틀랜드군에게 빼앗긴 베릭 성 탈환 작전에 참여해 2시간 만에 탈환하는 데 기여했다. 1380년 제3대 바치 백작이자 얼스터 백작이며, 아일랜드 보안관인 에드먼드 모티머에게 배속되어 아일랜드인들이 잉글랜드 왕국의 지배를 받아들이게 하도록 여러 차례 원정을 이끌었다. 1383년에는 튜튼 기사단에 참여해 고대 프로이센을 향한 십자군 원정에 종군했다.

1384년 7월 30일 스코틀랜드 동부 국경 감시관에 선임되었고, 1385년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동행했다. 1386년 칼레의 수비대장으로 부임되어 피카르디 습격을 이끌었고, 1387년 8월과 10월 사이에 해군을 이끌어 프랑스군의 브레스트 포위를 약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1388년 24세의 나이에 가터 기사단의 기사로 발탁되었으며, 스코틀랜드 동부 국경 감시관으로 재임명되었다.

1388년 8월, 제2대 더글러스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가 이끄는 1,200명의 맨앳암즈와 다수의 일반 병사로 구성된 스코틀랜드군이 제드버러 성을 공략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했다. 얼마 후,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 스파이를 체포했다. 스파이는 고문을 받은 끝에 잉글랜드군이 국경 남쪽에 집결하면서 스코틀랜드군의 침공이 서쪽 경로와 동쪽 경로 중 어느 쪽으로 이뤄지는 지가 분명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했다고 진술했다. 만약 스코틀랜드군이 한 쪽을 택한다면, 잉글랜드는 다른 경로를 통해 반격을 가할 터였다. 이에 스코틀랜드군은 두 경로로 동시에 잉글랜드를 공격하기로 했다. 더글러스가 300명의 맨앳암스와 2,000보병을 이끌고 동쪽 경로를 통해 더햄으로 진군하는 동안, 린치 백작은 더 많은 군대를 인솔해 서쪽 경로를 통해 리더데일과 칼라일로 행진하기로 했다.

스코틀랜드군이 두 경로를 통해 노섬벌랜드에 쳐들어오자, 랄프 퍼시의 잉글랜드군은 칼라일로 달려갔고, 헨리는 뉴캐슬로 이동했다. 그 후 더글러스의 군대가 뉴캐슬을 지나치자, 헨리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성에서 출격해 적을 공격했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더글러스와 헨리는 전투 도중 서로 만나서 일기토를 벌였고, 더글러스가 헨리를 쫓아내고 퍼시의 창과 페넌트를 노획했다고 한다. 더글러스는 퍼시가 빼앗긴 것을 되찾으려 할 것이라 여기고 도발했지만, 헨리는 증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당국의 엄격한 지시에 따라 가만히 있었다.

그 후 더글러스의 군대는 폰테랜드 성을 파괴한 뒤 오터번 성을 포위했다. 그들은 한쪽에는 습지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숲이 우거진 언덕이 있는 강변에 진을 쳤다. 한편 헨리는 더글러스의 군대가 스코틀랜드군의 분견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즉시 맨앳암스와 보병대를 이끌고 더글러스를 쫓아갔다. 당대의 몇몇 사료에 따르면, 헨리에겐 6,000명의 맨앳암스와 8,000명의 보병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그의 군대가 그정도로 클 가능성은 없다고 간주하며, 스코틀랜드군보다 다소 많은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벌어진 오터번 전투에서, 제임스 더글러스는 전사했지만 잉글랜드군은 크게 패했으며, 헨리는 형제 랄프와 함께 생포되었다.

이후 7,000파운드의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헨리는 1391년 6월 1일 스코틀랜드 서부 국경 감시관에 선임되었다. 1393년 6월 키프로스 왕국에 외교 사절단으로 파견되어 외교 임무를 수행했으며, 아키텐 공작 곤트의 존을 대신하여 아키텐의 보안관으로 임명되었다. 1395년 1월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리처드 2세의 아일랜드 원정에 참여했고, 1395년 6월 스코틀랜드 동부 국경 감시관에 선임되었다. 1399년 아버지와 함께 볼링브로크의 헨리의 반 리처드 2세 반란에 가담해 리처드 2세를 몰락시키는 데 일조한 뒤 10년간 스코틀랜드 동부 국경 감시관을 맡을 권리를 인정받았다. 아버지 헨리 퍼시 역시 10년간 스코틀랜드 서부 국경 감시관을 맡을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리하여 퍼시 가문은 스코틀랜드와 접한 잉글랜드 북부 전체를 총괄할 정도로 강대한 위세를 떨쳤다.

한편,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가 내전으로 혼란스럽고 퍼시 부자가 국경을 비운 틈을 타 1399년부터 1400년까지 잉글랜드 북부를 5번 습격했다. 이에 헨리가 1400년 3월에 스코틀랜드를 급습해 더글러스 가문의 영지를 약탈했고, 그해 8월 잉글랜드 왕실군이 본격적으로 스코틀랜드를 침공해 에딘버러를 점령했다. 그러나 적군의 지속적인 유격전에 시달리다가 식량이 고갈되자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웨일스에서 오와인 글린두르가 반란을 일으키자, 헨리 4세는 11월에 스코틀랜드와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후 헨리 4세와 헨리 퍼시 부자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1402년 3월, 헨리 4세는 헨리 '핫스퍼' 퍼시를 대신해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을 록스버러 성의 수비대장으로 선임했다. 이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지나친 권세를 누리는 퍼시 가문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후 헨리 퍼시 부자는 왕에게 일련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왕이 국경을 지키는 데 필요한 재정을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아서 수비가 잘 되고 있지 않다고 불평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헨리 4세가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 전념하고 오와인 글린두르와 화해하기를 원했는데, 정작 헨리 4세가 반대로 하고 있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러던 중 헨리 '핫스퍼' 퍼시의 처남인 에드먼드 모티머가 오와인 글린두르와의 전쟁에서 패배해 생포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퍼시 가문이 모팀머를 위해 몸값을 협상하려고 했을 때, 헨리 4세는 모티머가 오와인 글린두르와 내통해 패배를 초래한 혐의가 있다며, 몸값을 지불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로 인해 퍼시 가문과 모티머 가문의 헨리 4세에 대한 불만이 증폭되었다.

1402년 6월 22일, 조지 던바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헨리 4세의 허락 없이 스코틀랜드로 쳐들어가 네스빗 무어 전투에서 패트릭 햅번이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해 사령관을 포함한 240명의 스코틀랜드인을 사살했다. 스코틀랜드 영주들은 이를 복수하기 위해 9월에 잉글랜드 북부를 대대적으로 공격하기로 결의했다. 제4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총사령관을 맡고, 100명이 넘는 남작과 50명의 프랑스 기사를 포함한 대규모 스코틀랜드군이 조성되었다. 당대 연대기에는 40,000명에 달한다고 기술되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7,000 ~ 10,000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헨리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창병 12,000명과 궁수 7,00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소집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 북부를 별다른 저항 없이 초토화한 뒤 스코틀랜드로 귀환했다. 그러다가 호밀돈 언덕에서 헨리 '핫스퍼' 퍼시, 조지 던바, 랄프 그레이스토크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게 가로막혔다. 1402년 9월 14일에 벌어진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은 참패했다. 이 전투에서 80명의 스코틀랜드 영주가 생포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아치볼드 더글러스를 포함한 거의 모든 스코틀랜드 사령관과 30명의 프랑스 기사가 있었다. 반면 잉글랜드군은 단 기사 10명만 잃었다고 전해진다. 스코틀랜드 포로들은 북부 잉글랜드의 도시들에 보내졌다.

이때 헨리 4세는 포로가 된 스코틀랜드 남작들을 런던으로 이송하라고 요구했다. 아버지 헨리 퍼시는 처음엔 거부했지만, 헨리 4세가 퍼시 가문이 포로들의 몸값을 받는 것을 금지하면서 자신의 명령을 어기면 영지를 몰수하겠다고 위협하자 어쩔 수 없이 포로들을 런던으로 보냈다. 그러나 헨리 '핫스퍼'는 자신이 잡은 더글러스 백작을 넘기길 거부했다. 이에 헨리 4세가 연이어 질책하자, 그는 반란을 일으키기로 작정했다.

1403년 6월 초, 헨리 '핫스퍼' 퍼시는 체스터에서 헨리 4세를 성토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선언문에서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에 대한 반역과 배신을 했다고 비난했으며, 정당한 왕위 계승자인 에드먼드 모티머[1]의 법적 권리를 부정하게 박탈했다고 덧붙였다. 여기에 웨일스에서 반란을 일으킨 오와인 글린두르와 글린두르의 포로로 있던 에드먼드 모티머[2]도 호응했으며, 포로로 잡혀 있던 스코틀랜드 영주들도 자유를 얻는 대가로 그와 동맹을 맺었다.

헨리 '핫스퍼' 퍼시는 숙부인 우스터 백작 토머스 퍼시와 함께 슈루즈버리로 행진하면서 오와인 글린두르와 합세하고자 했고, 아버지 헨리 퍼시도 아들을 돕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그러나 아버지와 오와인 글린두르가 미처 합류하지 못한 사이, 그의 군대는 1403년 7월 21일 슈루즈버리에서 헨리 4세가 이끄는 대규모 군대와 대면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그는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끝내 전사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 토머스 월싱햄에 따르면,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적진에 무모하게 침투했다가 피살되었다고 한다. 또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는 앞을 좀더 잘 보기 위해 바이저를 열었다가 얼굴에 화살을 맞아 죽었다고 한다.[3]

헨리 '핫스퍼' 퍼시의 유해는 슈롭셔 주 휘트처치로 옮겨져 가매장되었다가, 그가 살아있다는 소문을 불식시키려는 헨리 4세의 명령으로 슈루즈버리의 시장에 두 개의 맷돌 사이에 똑바로 세워져서 전시되었다. 이후 그의 수급은 베어져 요크에 보내져 요크 시의 성문에 박혔고, 몸통은 4등분되어 런던, 뉴캐슬, 브리스톨, 체스터에 별도로 보내졌다가 나중에 미망인인 엘리자베스 모티머에게 전달되었다. 엘리자베스는 1403년 11월에 남편의 유해를 요크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했다.


3. 가족[편집]


  • 엘리자베스 모티머(1371 ~ 1417): 제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의 딸.
    • 헨리 퍼시(1393 ~ 1455): 1405년 조부 헨리 퍼시와 함께 스코틀랜드에 망명했다가 헨리 5세와 화해하고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제2대 노섬벌랜드 백작이 되었다. 훗날 장미 전쟁에서 랭커스터 왕조를 위해 싸우다가 1455년 5월 22일 제1차 세인트 알반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 엘리자베스 퍼시(1395 ~ 1436): 제7대 클리퍼드 남작 존 클리퍼드와 초혼, 제2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과 재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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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둘째 아들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외손자[2] 퍼시 가문이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로 내세운 에드먼드 모티머의 숙부[3] 적장인 헨리 5세도 이 전투에서 얼굴에 화살을 맞아 하마터면 죽을 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