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데가르트 폰 마린도르프/작중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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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마린도르프 백작가의 영애
3. 제국재상 수석비서관
4. 황제 수석 비서관
5. 총본영 참모총감
6. 임신과 결혼
7. 은하제국 황후
8. 은하제국 섭정 황태후



1. 개요[편집]


은하영웅전설의 등장인물 힐데가르트 폰 마린도르프의 작중 행적을 서술한 문서.


2. 마린도르프 백작가의 영애[편집]



힐데가르트 폰 마린도르프는 골덴바움 왕조문벌귀족 가문 마린도르프 백작가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힐다가 장성했을 때 이미 죽었고, 힐다는 마린도르프가의 영지를 떠나 제국수도 오딘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힐다는 예술보다는 정치와 군사에 관심이 많았는데, 매우 영리하여 친분이 있는 마크달레나 폰 베스트팔레 남작부인이 "남자였으면 국무상서나 군무상서가 되었을 것"이라고 칭찬하기도 했다.나중에 황후에 섭정이 된거 알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시간이 흘러 우주력 797년, 제국력 488년. 멋대로 황제를 옹립한 제국재상 클라우스 폰 리히텐라데 공작과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후작의 '추축파'와, 신 정권에서 소외당한 문벌귀족들이 결집한 '연합파'는 시시각각 충돌하고 있었다. 마린도르프가의 당주이자 힐다의 아버지 프란츠 폰 마린도르프 백작 역시 이 내전에서 어디에 가담해야 할지를 두고 머리를 싸맸다. 이때 힐다가 오랜만에 오딘에서 영지로 귀성했다.

마린도르프 백작은 내전에서 중립을 택하고 싶었지만 본인도 제국귀족의 일원이었기에 마음속으로는 연합파의 맹주 오토 폰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러나 힐다는 "오랜 세월 횡포를 부린 골덴바움 왕조는 조만간 멸망한다"고 외치며 아버지의 결정을 반대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라인하르트에게 붙자고 제안했다.

  • 라인하르트는 정통성이 확실한 새로운 황제를 옹립했으므로[1], 황제에 반역한 자를 황제의 이름으로 토벌한다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다. 반면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과 리텐하임 후작의 무리들은 야심을 앞세워 반란을 일으키려고 할 뿐이다.
  • 대부분의 귀족이 결집할 문벌귀족 진영은 이미 강대하기 때문에, 마린도르프 가문이 가담한다해도 별다른 대우를 받지 못할 것이다.[2] 반면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한 라인하르트파는 마린도르프가가 가담한다면, 세력증강은 물론 정치적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으므로 후대를 받을 수 있다.[3][4][5]
  •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과 리텐하임 후작은 공동의 목표를 위해 잠시 손을 잡은 것일 뿐 진정으로 협력할 마음이 없으며[6], 맹주와 부맹주부터가 대립하는 모양새이니 문벌귀족 진영은 군의 지휘체계가 통일되지 않았다. 반면 라인하르트 쪽은 통일된 지휘체계와 의사를 가지고 있다.[7]
  • 라인하르트와 그의 부하들은 문벌귀족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평민계급에 인기가 많다. 그리고 전쟁은 평민 병사들을 동원해야 하는 만큼 병사들이 귀족 장교에게 불만을 품는다면, 브라운슈바이크 진영은 폭동이나 모반으로 무너질 가능성도 있다.[8]

설명을 마친 힐다는 라인하르트 쪽이 충성의 증거로 영지와 인질을 요구한다 해도 라인하르트 쪽에 붙어야 한다고 결론을 냈다. 그리고 자신이 라인하르트를 찾아가겠다고 했는데, 딸을 아끼는 마린도르프 백작은 반대했지만 힐다의 설득에 넘어가 허락했다. 가문을 위해 희생하는 게 아니라 가문을 도구로 삼아 힐다 네가 잘 되라는 마린도르프 백작의 명대사도 이때 등장했다.

그렇게 다시 오딘으로 돌아간 힐다는 우주항에서 라인하르트 원수부로 직행했다. 테오도르 폰 뤼케 중위가 앞을 막아섰지만 힐다는 나름 필사적인 표정을 연기하며 면회를 요구했다. 거기에 넘어간 뤼케는 여기저기 연락을 취한 뒤 면회 허가를 받아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라인하르트를 만난 힐다는 바로 마린도르프 가문은 향후 일어날 내전에서 라인하르트를 지지하겠으며, 아버지에게도 말한 지지 이유를 다시 들려주었다. 아군이 필요했던 라인하르트는 흔쾌히 마린도르프 가문은 물론 힐다가 소개하는 가문들을 후대하겠다고 약속했다.

라인하르트의 약속을 얻어낸 힐다는 마린도르프 백작가가 충성하는 대가로 가문과 영지 소유권을 인정하는 공문서를 작성해달라고 요구했다.[9] 라인하르트는 이 부탁에 잠시 고민했지만 얼마 뒤 오늘 안에 문서를 작성해주겠다고 답변했다. 힐다는 다시 한번 라인하르트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라인하르트는 힐다가 설득해줄 귀족들에게도 공문서를 작성해야 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힐다는 "스스로 청하는 자가 있다면 공문서를 발급해 주되, 그렇지 않은 자들은 굳이 해줄 필요는 없다"고 답했다. 이 말은 마린도르프 가문이 다른 귀족들과 횡적 연대를 도모하지 않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라인하르트는 자신보다 어리면서도[10] 명석한 힐다에 속으로 "제국귀족 수천 가문 중에 겨우 칭송할 인재가 나타났다"고 감탄했다. 이후 칼 구스타프 켐프 중장이 문벌귀족의 불온한 움직임을 보고하면서 두 사람의 면회는 끝이 났다.

과연 힐다의 말대로 립슈타트 귀족연합을 결성하고 내전에 뛰어든 귀족들은 우세한 세력으로도 제국군에게 붙는 족족 패배했다. 그리고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벌인 베스터란트 학살사건은 귀족연합군에게 치명타를 날렸고, 귀족들은 근거지 가이에스부르크 요새에 고립되었다. 내전 기간 동안 힐다는 수도에 남아서 라인하르트에게 수도의 동향, 특히 제국재상 리히텐라데 공작의 동향에 대해 상세히 보고했다.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1차 암살미수사건 이후, 키르히아이스를 잃고 점점 냉혹하게 변해가는 라인하르트에 대해 염려했다.


3. 제국재상 수석비서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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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A
DNT
보좌관 시절

힐데가르트의 명석한 두뇌를 눈여겨 본 라인하르트가 제국재상 수석비서관으로 등용한다.

라인하르트의 수석 비서관에 등용된 이후, 키르히아이스를 잃은 라인하르트에게 정치적 군사적 문제를 논의하는 상담 상대가 되었다. 직접적인 함대 지휘를 제외하고, 라인하르트에게 있어 키르히아이스의 공석을 공사 양면으로 메우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은하통일의 과정에서 적절한 조언을 통해 라인하르트가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부분도 섬세하게 메워주었으며, 라인하르트 주변 참모들이 라인하르트를 공적으로 보필하는 것에만 골몰한 것에 비해[11] 사적 문제도 염려하여 신경쓰곤 했다.[12] 라인하르트도 안네로제와의 접촉을 위해 힐데가르트를 사자로 보내는 등 다른 가신들에 비해 터부가 덜하기도. 사실상 키르히아이스의 공백을 감정이나 전투 이외의 영역은 거의 다 메꿔줬다고 봐도 무관하다.[13]

제1차 라그나뢰크 작전 때에는 정식으로 중령 대우를 받아 군복을 입고 총기함 브륀힐트에 동승했다. 버밀리온 성역 회전에서는 홀로 양 웬리의 성향을 통찰하여 라인하르트에게 양 웬리와 싸우는 대신 수도를 공략하자고 제안했지만 양과 싸우고 싶었던 라인하르트는 힐다의 주장을 거부했고, 기함에 동승하기를 원하는 힐다의 요청도 만약 힐다에 무슨 일이 생기면 마린도르프 백작을 볼 면목이 없다고 거부했다. 라인하르트는 알로이스 폰 릴리엔크론 중위와 병사 20명을 붙여 힐다를 경호하도록 했고 홀로 직속함대와 함께 버밀리온에서 양 웬리와 맞서 싸웠다.

그러나 힐다는 포기하지 않고 간다르바 성계에 있는 고급장교들을 설득한 끝에 고속순항함을 빌려 버밀리온 성역에서 전투의 추이를 살핀 뒤 볼프강 미터마이어 제독이 있는 엘류세라 성역으로 달려갔다. 힐다는 지금 달려가봤자 라인하르트를 구하긴 늦었으며 차선책으로 하이네센을 공략하여 동맹정부를 항복시키자고 제안했다. 미터마이어는 이 주장에 수긍하여 로이엔탈과 함께 하이네센을 공격했고 결과적으로 이 지략은 양 웬리의 계략을 저지하고 라인하르트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원했다. 적의 사정권에 브륀힐트가 노출되어 죽을 뻔한 라인하르트를 힐데가르트의 지모로 구하게 되자, 그녀의 지모대로 움직여 준 미터마이어가 "당신의 지략은 1개 함대의 무력보다 낫다"고 말한 바 있다. 라인하르트 외에는 거칠 것 없는 미터마이어나 로이엔탈 같은 쟁쟁한 제국 장성들도 그녀의 지략과 판단력을 존중했을 정도로 탁월한 통찰을 발휘하였다.


4. 황제 수석 비서관[편집]


라인하르트의 제위 등극과 함께 대령 대우로 황제 수석비서관이 되었다. 개국 초기 사촌동생인 하인리히 폰 큄멜큄멜 사건을 일으키자 국무상서가 된 아버지와 함께 책임을 지고 근신하지만, 라인하르트의 명령에 의해 복귀하기도 하였다. 하이네센 점령 이후 로이엔탈이 반역혐의를 썼다가 풀려났을때 로이엔탈의 아기를 밴 엘프리데 폰 콜라우슈는 어떻게 해야겠냐고 하자 라인하르트는 "그냥 중절하면 되지 않나?" 라고 하는데 힐데가르트는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유배지로 보내겠다는 것도 아기한테는 악영향을 미친다며 반대했다.[14]

회랑 전투에서는 개전에 반대했지만, 라인하르트는 개전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회랑 전투 도중 본래 총본영 참모총감으로 내정되어 있었던 칼 로베르트 슈타인메츠 제독이 전사하자 라인하르트의 명으로 2대 참모총감이 되었다. 힐다는 병사 한 명 지휘한 적 없다고 난색을 표했지만 라인하르트는 병사를 지휘하는 건 전선의 제독들이고 힐다는 황제에 조언만 해주면 된다며 임명을 강행했다.


5. 총본영 참모총감[편집]


5월 9일 라인하르트는 전투가 소강기에 접어들자 어전회의를 열어 정식으로 힐다를 중장 대우로 총본영 참모총감에 임명했다. 라인하르트는 문관과 무관의 구분을 위해 힐다를 참모총감에 임명하면서 군사적 권한은 강화하되 정치적 발언권을 없애버렸다. 힐다도 이 점을 헤아려 정치 관련 질문에는 대답을 꺼렸는데, 그걸 본 라인하르트는 "프로이라인을 제국재상에 임명하지 않는 한 짐의 상담에는 응하지 않겠지"라고 말해서 힐다가 당황하는 걸 즐겼다.

국가의 관료와 군인의 좋지 않은 행태를 개선한 것은, 내정에 있어서 힐다의 큰 업적이다. 어떤 관료가 자신의 연설 마지막 부분에서 "인류 사회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기 위해선 페잔을 매듭의 중심으로 삼아야 하며 가령 로엔그람 왕조가 망해 없어지더라도 페잔은 우주의 요지로 남게 해야 한다"고 실언했던 사건에서, 실수한 당사자에게는 견책 처분을 내리는 정도로 끝냈다.[15] 그에 반해, 이런 단순한 실수를 쓸데없이 고자질한 관료는 간신이 생길 수도 있는 구멍을 메울 겸 강등 처분했다. 군대의 경우, 서로 마주보았을 때[16] '카이저 만세' 라고 라인하르트를 찬양하지 않으면 왕따당하고 인사고과에 악영향을 당하는 것을 고쳤다.

비서관으로 있으면서 라인하르트에게 이런저런 직언을 날리는데 너무 직언만 올려서인지(?) 한번은 라인하르트가 직언 올리는 것도 좀 자제하란 투로 얘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뿐 베스터란트 학살사건때 키르히아이스의 직언을 무시했다가 어떤 꼴이 났는지 알아서인지 여전히 곁에 두었다. 그리고 본인은 변해가는 라인하르트의 모습을 보며 제2의 키르히아이스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물론 본인도 자신이 키르히아이스만큼 잘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6. 임신과 결혼[편집]


라인하르트가 제위에 오르자, 주변 인물들은 은연중에 힐데가르트를 황후 후보로 여기게 되었다.[17] 얼굴 되지 집안 되지 성격 되지 능력 되지 미모, 가문, 지성, 인성까지 무엇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재원이었으며, 더욱이 이성에 대해 관심이 없는 시스콘 라인하르트에게 있어서는 거의 유일하게 의미 있는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에밀 폰 젤레와 더불어 그래도 라인하르트의 사적인 면에도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서 보면 만점이라 할만하다.

물론 힐데가르트도 큄멜 사건을 겪으며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그 와중에도 절대 카이저가 우리 부녀를 내칠 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어, 라인하르트가 아예 "마린도르프 부녀에게 이 시답잖은 사건의 책임을 묻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 라고 못박아 직무에 복귀할 수 있었다.

라인하르트가 시종인 에밀에게 '안네로제의 남동생'인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는 것을 본 힐다는, '나에 대한 마음은 어떨까' 하고 설레는(?) 모습을 보인다.라인하르트는 여동생이 없으니 친누나의 모습을 투영해야 하나? 근데 정신연령은 라인하르트가 힐데가르트보다 더 떨어진다고 해도 딱히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큄멜 사건으로 근신 중일 때 폐하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부친의 질문에 머뭇거리기도 했다. 양 웬리가 죽었을 당시 라인하르트가 충격을 받고 머리를 쥐어뜯다가, 힐다가 대리 조문으로 자신이 직접 갈지를 묻자 "그대는 계속 내 곁에 있지 않으면 곤란하다. 참모총감이니까." 라고 했는데, 힐다는 속으로 '바보같이 나는 지금 뭘 기대한 거야, 폐하는 그런 분이니까...' 라고 생각한다. 간간히 나오는 독백을 보면 힐다는 진작부터 마음이 있었던 듯.시스콘인 것과 정서가 소년기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만 빼면 안 반하는 게 이상한 완벽남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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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사고를 친 건지 도통 모를 컷

라인하르트와의 관계는 내내 공적인 상하관계였으나, 어떤 사건을 계기로 결국 사고쳐서 라인하르트와 결혼에 이르게 된다. 은하통일 이후 베스터란트 학살사건 희생자의 유족이 라인하르트를 암살하려다 실패했을 때 그가 한 말에[18]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던 라인하르트를 위로하다 결국 하룻밤을 보낸 후,[19] 기겁한 라인하르트가 다음 날 아침부터 그녀의 집을 찾아와 허겁지겁 프로포즈한 덕에[20][21] 결혼에 골인하게 된 것.

아버지 마린도르프 백작은 힐데가르트가 라인하르트와 사고치고 새벽에 들어온 직후의 아침식사 때 폐하와 밤을 보냈냐고 아무렇지 않게 물었으며, 라인하르트가 청혼을 위해 찾아오자 망설이는 힐다를 대신해 라인하르트를 응대하여 돌려보낸다. 폐하가 자신을 사랑해서 청혼하는 것이 아니라고 정색하는 힐다에게 넌 어떠냐고 백작이 묻자, 힐다는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이에 백작은 '폐하뿐만 아니라 자기 마음 모르는 건 우리 딸도 마찬가지'라면서 '둘이 잘될까? 힐다, 너는 내게 자랑스러운 딸이다. 전부터 생각한 것이지만, 네가 평범하고 가까운 곳을 보는 야심 적은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면 나도 내 분수에 맞는 조촐한 삶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내가 국무상서로 일하는 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겠군.' 이라고 생각한다.[22] 정작 힐데가르트는 라인하르트가 프로포즈하기 위해 찾아오자, 그를 만나기는커녕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망설이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이 정서적으로 소년을 벗어나지 못한 라인하르트를 포용할 만한 사람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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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하라 카츠미 삽화(소설 10권)
한동안 대본영에 출근도 하지 못했고 복귀한 후에도 응답을 미뤘으나, 라인하르트와 대화를 나눈 후 그의 순수함에 청혼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마음의 추가 급격히 기울게 된다. 그 후 임신을 자각하고,[23] 청혼을 수락하면서 그 사실을 라인하르트에게 알렸다. 그리고 이듬해, 라인하르트와 결혼식을 올림으로써 로엔그람 왕조의 초대 황후가 되었다.


7. 은하제국 황후[편집]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은 외척이 된 마린도르프 가문의 국정 장악을 우려했으나, 국무상서 마린도르프 백작은 딸 힐데가르트가 황후가 될 것이 확실해지자 스스로 상서직을 사임하고 후임으로 미터마이어를 천거했다.[24] 차려놓은 밥상도 거부하는 프란츠 개인의 성격 뿐 아니라 라인하르트 본인의 건강에도 이상이 생겨 황가의 대를 잇는 문제로 다들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재원인 힐데가르트와 황제 라인하르트 간의 결혼을 환영하였다.

황후가 되고 나서는 공식적으로 활약하지 않았으나, 라인하르트의 좋은 상담역이 되어 이제르론 잔당을 포용하도록 권유하고 결혼과 회임을 핑계로 안네로제의 페잔 이주를 어물쩡 성사시키는 등, 라인하르트의 뒤를 잇는 2인자의 위치를 구축한다.[25] 지구교는 그녀와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기를 암살하기 위해 호랑가시나무관 습격사건을 벌였지만, 안네로제 폰 그뤼네발트 대공비와 울리히 케슬러 상급대장의 활약으로 암살은 실패했고 도리어 지구교 페잔지부가 케슬러에 의해 소탕당했다. 그리고 우주력 801년 5월 14일 출산예정일보다 조금 일찍 출산했다. 이 아이는 라인하르트의 뜻에 따라 알렉산더 지크프리트 폰 로엔그람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8. 은하제국 섭정 황태후[편집]


이후 쭉 페잔에 있었으며 벨제데 임시 황궁에서 라인하르트의 임종을 지켰다. 라인하르트는 힐다에게 "모두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해 준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겠구려......."라고 사실상 힐다에게 전권을 위임한 뒤 죽었고, 힐다는 죽은 라인하르트와 막 태어난 알렉산더를 대신해 은하제국 섭정황태후로서 전 우주의 정점에 섰다.

그리고 후세 역사가들 사이에서 "로엔그람 왕조를 만든 사람은 카이저 라인하르트지만, 로엔그람 왕조를 길러낸 사람은 카이저린 힐데가르트였다."는 말이 나오고, 이를 서로 자기가 한 말이라고 역사가들끼리 다툴 정도로 로엔그람 왕조를 발전시켰다.[26][27]
[1] 에르빈 요제프는 부모가 일찍 사망했고 친모가 문벌귀족 출신이 아니라는 것만 빼면 프리드리히 4세의 유일한 직계 남성 후손으로서, 아무리 아버지들이 제국 최고의 명문 귀족이라지만 프리드리히 4세의 외손녀에 불과한 엘리자베트자비네에 비하면 정통성만큼은 막강했다.[2] 립슈타트 전역 내내 보여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리텐하임 후작의 저열한 인성과 삽질을 생각하면, 설령 마린도르프 가문이 실제 공을 세웠다고 해도 힐다의 말대로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3] 특히나 힐데가르트의 선택으로 마린도르프가는 라인하르트에 붙은 귀족 1호가 되었으며, 또 직접 나름대로 많은 귀족들이 라인하르트에게 줄서는데 기여했다. 첫번째로 줄 선 귀족이 되어 존재감을 드러냈음은 물론이요, 적절히 공까지 세우기까지 하여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을 수도 있게 되었다.[4] 모티브는 장수를 설득한 가후로 추측된다.[5] 관도대전에서 장수를 찾아와 허도좀 공략해달라는 원소의 사신을 가후가 내쫓아냈다. 이후 장수는 가후에게 어느 편에 들어야 할지 물어봤는데, 가후는 조조를 따르는 게 낫다고 했다 장수는 벌써 조조를 두 번이나 물먹이고 아들, 조카, 아끼던 장군 전위까지 죽인 원수 사이다.(다만 두 번이나 물 먹은건 전적으로 조조의 책임이었다...장수는 처음에 항복했는데 항복했을때 조조가 장수의 숙모를 건드렸고...이에 장수가 불만을 품자 제거하려고 암살자를 보낸거...) 게다가 원소는 강성한데 조조는 약하고. 그런데도 가후가 원소의 사절은 저렇게 대하고 조조에게 귀순하는 게 낫다고 하니 의아해 왜 그래야 하는지 물었다. 이에 가후가 답했다. 조조는 천자를 받드니 첫째입니다. 원소는 강성한데 우리는 군사가 적어 '그를 따른다 해도 필히 우리를 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조조는 군사가 약한데 우리를 얻게 되면 필히 기뻐할 것이니, 두 번째입니다. 패왕의 뜻을 가진 자는 사사로운 원한을 풀어버리니, 이것이 세 번째 이유입니다. 다만 이는 장수에게 이득이 되는 일보다 가후와 부하들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원소는 강성한데 우리는 군사가 적어 그를 따른다 해도 필히 우리를 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엄청난 개소리다. 장수가 오히려 원소 쪽에 항복했어도 크게 손해받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왜냐하면 장수가 조조와 원소 양쪽 모두에게 상당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장수가 원소 쪽과 연합하면 친원소 세력에 가까웠던 유표 세력과 대놓고 친원소 라인을 표방한 여남군 대부분과 연계해 남북으로 조조를 협공하기에 상당히 유리한 형세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어도 원소와 조조의 결전 당시엔 장수가 원소에게 경시받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할 수 있다.[6] 이는 리텐하임 후작이 립슈타트 전역 중기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과 불화를 일으킨 끝에 변경성역을 탈환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함정 5만 척과 함께 가이에스부르크 요새를 나와 변경으로 진군하여 사실상 귀족연합군을 반으로 쪼개버리면서 현실화 된다.[7] 사실 라인하르트쪽도 리히텐라데와의 불안한 연합이기는 했지만, 군사적 측면에서만 보면 나름 서로의 역할이 제대로 분리되어 있었다.[8] 이는 립슈타트 전역 말기에 사실로 드러났다. 베스터란트 학살사건이라는 희대의 만행으로 인해 제국 평민들은 귀족을 증오하게 되었고 이는 립슈타트측 병사라고 해서 다를 바 없었으며, 마침내 제2차 가이에스부르크 요새 공방전 막판에 귀족 장교들의 막장 행각들로 폭발한 병사들은 상관격이었던 그 귀족들에게 온갖 방법으로 무자비하게 보복했다.[9] 비록 당장은 몇몇 귀족들의 협력이 필요한 라인하르트지만, 그는 본질적으로 귀족들을 혐오했으며 개혁의 일환으로 귀족들을 대거 숙청할 계획이었다. 힐다는 이를 꿰뚫어보고 라인하르트가 태도를 바꾸어 마린도르프 가문을 숙청하지 못하도록 그의 이름으로 작성된 공문서를 요구한 것이다.[10] 라인하르트보다 1살 연하다. 라인하르트도 작중 등장인물들 중에 굉장히 어린 편인데 그 라인하르트보다도 어리다.[11] 친우 키르히아이스가 죽어 라인하르트가 쇼크 상태에 빠질 때나, 여자에 통 관심이 없는 라인하르트의 혼사 문제 정도나 걱정했었다.[12] OVA에서는 제8차 이제르론 공방전 전 워프 실험을 끝낸 가이에스부르크에 들러 키르히아이스가 죽은 곳에 홀로 들어간 라인하르트를 보며,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죽은 사람에게밖에 마음을 못 열다니 너무 외롭지 않은가'라며 그에게 깊은 연민을 느끼는 장면도 묘사된다.[13] 키르히아이스가 죽고 나서부터 공허한 인간이 된 라인하르트가 폭군이 되지 않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철저하게 마키아벨리스트였던 오베르슈타인만 참모로서 라인하르트 곁에 있었다면....우리가 아는 성군이라 부를 수는 없어도 현명한 군주라 부를 수 있는 존재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14] 은영전 세계관에선 워프 기술은 여성의 출산능력에 악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후반에 힐다도 직접 안네로제를 찾아가지 못하고 페잔으로 초청해야 했다.[15] OVA에서는 말실수를 했다고는 하지만 정확한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16] OVA에서는 건배 축사로.[17] 특히 미터마이어는 "내게 권한만 있다면 프로이라인 마린도르프를 황비 후보로 추천하겠다"고 아내에게 말할 정도로, 둘이 잘 됐으면 좋겠다며 종종 언급하곤 했다. 오베르슈타인은 힐다의 아버지 마린도르프 백작에게 황비 자리를 노리고 있냐는 식의 노골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했으나, 백작이 전혀 관심이 없다고 회피하자 외려 만족하기도.[18] 라인하르트를 학살자라고 부르면서, "네놈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과 다를 바 없다"며 분노했다. 자세한 상황은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2차 암살미수사건 문서 참고.[19] 다만 어째서 골덴바움 왕조의 황제들을 음탕하다고 생각하며 이때까지 그 어떤 여성에게 눈길도 안 주던 라인하르트가 왜 그랬는지는 미스테리. 놀랍게도 하룻밤 같이 해 달라고 한 건 어쩌다보니 그런 것도 아니고 무려 라인하르트가 먼저 요청한 거다(...). 다만 트라우마 중의 트라우마인 베스터란트 학살사건의 악몽이 다시 떠올라 정신상태가 말이 아니었던 라인하르트의 사정을 감안해 보면 정신상태가 심하게 몰린 상황에서 그런게 염두에 두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또 다르게 보면 라인하르트가 힐데가르트를 이성 상대로 봤는지에 대한 묘사는 전혀 없었지만 내심 힐데가르트를 이성으로 의식하고 있었지만 어떤 이유로 표현하지 못하던 것을 정신상태가 심하게 몰린 상황에서 저런 식으로 표출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는 일, 라인하르트가 죽을 때까지 소년기의 정서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받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능할 일이기도 하다.[20] 힐데가르트도 갑자기 황제의 구혼을 받은 터라 당황하여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달라고 했는데, 여자의 마음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한 황제는 생전 관심을 두지 않던 문화예술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런데 황제 본인이건 측근이건 군인 일색인 탓에 아는 게 없어 무작정 이것저것 참석하기 시작한 탓에 비텐펠트 상급대장은 황제와 고전 발레극 감상을, 루츠 상급대장은 황제와 시 낭송회 참석을, 뮐러 상급대장은 황제와 전위 음악 감상을해야만 했다. 상급대장들은 마음에도 없는 예술 관람에 차출된 셈이나 황제가 본인이 제독들을 일일이 지명한 탓에 안 나갈 수도 없어서 곤욕을 치루어야했다. 곤란한 일을 부하에게 부당하게 떠넘기는 것을 혐오하는 우주함대 사령장관 미터마이어 원수는 사령장관의 공무를 이유로 참모 칼 에두아르트 바이어라인 대장을 대리로 내보냈다(...). 문화예술에도 관심을 두라며 골칫거리를 부하에게 전가해버린 것(...).[21] 상급대장 중에서도 문화예술에 대한 조예는 거의 전문가 수준인 에르네스트 메크링거가 있었다면 곤욕은 커녕 기뻐하며 자진해서 참석했을 것이나 메크링거 상급대장은 본토 방위의 임무를 부여받고 오딘에 남아있었다. 또한 오스카 폰 로이엔탈 원수는 노이에란트 총독으로 동맹령에 가있어 페잔에 남은 상급대장들이 온전하게 이 고통(...)을 분담해야 했다. 음악회 출석을 명받은 뮐러 상급대장은 전위 음악 감상보다는 차라리 내란이 한 번 더 일어났으면 한다고 한탄할 지경.[22] 힐데가르트는 자신이 폐하와 결혼하지 않으면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했지만 마린도르프 백작은 네가 결혼을 하든 안 하든 폐하의 아이를 가진 이상 그럴 수 밖에 없다고 했다. 확실히 오베르슈타인의 성향을 감안해보면 마린도르프 백작의 판단은 옳기는 하다.[23] 다만 중간에 노이에란트 전역이 터져버린 바람에 힐다는 이 사실을 숨겼다.노이에란트 전역만 아니었다면 로이엔탈이 라인하르트와 힐데가르트 사이에서 아이가 생긴 것에 대한 평가를 하는걸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24] 다만 라인하르트는 후임자를 정하지 않고 사표를 수리할 수 없다는 이유로 마린도르프 백작을 유임시켰고, 죽을 때까지 후임자를 임명하지 못했다.[25] 이때도 2인자 염려증 환자인 오베르슈타인이 견제하려고 시도했으나, 법적으로 이미 황후의 지위에 있으니 그로서는 방도가 없었다.배배꼬인슈타인도 피해간 황후자리[26] 아들이 어느 정도 장성할 때까지 최소 15년, 보수적으로 보면 약 20년 이상의 기간을 섭정통치했을 것이고 아들의 자질을 확인하면서 기존 제국의 시스템대로 유능한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로 할지, 라인하르트가 필요하다면 고려하라고 유언으로 남겼으며 생전의 양 웬리나 율리안 민츠를 비롯한 이제르론 공화정부의 주요인사가 제국에 민주주의가 도입되지 못한다면 차선이라고 생각하던 입헌군주제 등을 고려하며 도입할 지를 결정했을 듯 하다. 어떠한 선택을 했는지는 불명이지만 로엔그람 왕조를 길러냈다는 평을 듣는 만큼 최선이자 최고의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27] 당연하지만 오랜 세월 적대해왔으며 은하제국의 본질 자체를 부정하는 민주공화정을 도입할 수는 없으며, 문벌귀족에 학을 뗀 로엔그람 왕조였던 만큼 소수의 "귀족"에게만 권력을 몰아주는 시스템 역시 논외로 하게 된다면 결국 중앙집권이나 입헌군주제 둘 중 하나를 선택했을 듯 하다. 이러한 흐름은 근대 영국과 꽤나 비슷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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