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V/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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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립 배경
2. 1997년
2.1. 편성 분야별 성과
2.1.1. 보도·시사
2.1.2. 스포츠
2.1.3. 르포·다큐
2.1.4. 엔터테인먼트
2.1.4.1. 애니메이션
3. 1998년
3.1. 편성 분야별 성과
3.1.1. 보도·시사
3.1.2. 스포츠
3.1.3. 르포·다큐
3.1.4. 엔터테인먼트
3.1.4.1. 콘서트
3.1.4.2. 게임
4. 1999년
4.1. 편성 분야별 성과
4.1.1. 보도·시사
4.1.2. 스포츠
4.1.3. 엔터테인먼트
4.1.3.1. 외화
5. 2000년
5.1. 편성 분야별 성과
5.1.1. 스포츠
5.1.2. 엔터테인먼트
5.1.2.1. 콘서트
5.1.2.2. 게임
5.1.2.3. 애니메이션
6. 2001년
6.1. 편성 분야별 성과
6.1.1. 스포츠
6.1.2. 엔터테인먼트
6.1.2.1. 애니메이션
7. 2002년
7.1. 편성 분야별 성과
7.1.1. 스포츠
7.1.2. 엔터테인먼트
7.1.2.1. 애니메이션
8. 2003년
8.1. 편성 분야별 성과
8.1.1. 엔터테인먼트
8.1.1.1. 애니메이션
9. 2004년
9.1. 편성 분야별 성과
9.1.1. 엔터테인먼트
9.1.1.1. 외화
10. 재허가 심사 전 상황
10.1. 재허가 추천 거부로 인한 TV 방송 중단
10.1.1. TV방송 중단 이후
11. 여담


1. 설립 배경[편집]


인천광역시를 중심으로 하는 인천·경기 지역에 지상파 민영 TV 방송이 필요하다는 여론은 텔레비전 방송의 다민영 시대가 열린 1990년대 초중반부터 줄곧 지속돼왔다. 물론 당시 수도권에는 1991년 개국한 SBS가 이미 전국을 호령하는 대형 방송국으로 성장해있었기에 굳이 수도권민영방송이 또 필요하냐는 논란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해 경인지역 시민단체와 언론단체는 "SBS는 비수도권 지역 네트워크를 활용해 전국을 커버하는[1] 제3의 전국구 대형 민방이 됐고 키스테이션이 있는 서울특별시의 목소리만을 담는데 그쳤다"며[2] 경인지역 민방의 추가 설립 당위성을 강조했다.

결국 공보처는 경인지역 지상파 민영방송의 설립 자체를 강력히 반대했던[3] SBS의 우려에도 1996년 인천·경기지역을 가시청권으로 두는 새로운 지상파 민영방송의 설립을 허가하게 된다. 다만 다른 지역 민영방송과 달리 SBS 방송을 송신하지 않고 모든 프로그램을 100% 자체 제작 및 편성하겠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경인지역 새 민영방송의 대주주는 인천광역시에 사업장을 두면서[4] 인천지역에서 학교법인[5] 등을 운영하던 동양화학공업으로 선정됐고 1997년 10월 11일 iTV 인천방송이 개국하였다. 이 때 함께 개국한 SBS 네트워크 방송국인 울산방송, 전주방송, 청주방송과 같이 2차 지역 민영방송으로 분류되었다.

2. 1997년[편집]



2.1. 편성 분야별 성과[편집]



2.1.1. 보도·시사[편집]


개국 당시 iTV는 인천광역시 전체만을 커버할 수 있는 방송국[6]으로 승인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 밀착 보도를 극대화하고 생활뉴스 중심의 뉴스 포맷을 개발해, 내용과 형식의 철저한 로컬리즘 추구를 통해서 지역 방송의 서비스 시대를 구축해야만 했다.[7] 그래서 방송 권역이 겹치는 SBS와의 경쟁 목적으로 8시에 메인뉴스를 편성했고, 시청자의 뉴스 정보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 10분 뉴스를 아침, 낮, 밤 시간대로 나눠서 2시간 마다 반복 편성해 기동성, 속보성을 강화했다. iTV 월드 뉴스, 기상센터, 교통정보[8]를 매일 아침, 저녁 2차례 편성해 21세기 정보화, 세계화 시대를 선도하는데 앞장섰다.

또한, 신속한 정보 전달과 지역 현안에 중점을 둔 심층 취재, 기획물을 통해 올바른 여론 형성과 건전한 지역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노력했다. 인천시에서 일어나는 각종 문제를 기자와 PD가 함께 제작하는 주간 보도 기획물 〈월요기획〉, 고발형 기동 취재 코너인 〈출동8080〉을 통해 지역 시청자들과 함께 호흡하며, 방송의 비판, 감시 기능을 수행 하는데 힘썼다. 또한, 생방송 와이드 정보 시간대를 설정해, 〈생방송 모닝데이트〉,〈지금은 메트로 시대〉와 같은 생활 정보 프로그램을 적극 편성해 지역민들의 정보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힘썼다.

2.1.2. 스포츠[편집]


iTV는 개국 초기부터 스포츠 분야에서도 발군의 역량을 보였다. 지역 스포츠를 활성화하고 독자적인 스포츠 문화를 창출하기 위한 최적의 시간대를 확보함과 동시에 다양하고 참신한 중계 기법, 비인기, 매니아층 사로잡을 해외 스포츠 프로그램을 통해서 새로운 스포츠 문화의 이정표를 제시했다. 섹션 매거진 형식의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을 한 축의 띠로 묶어서 평일 밤 11시대에 편성했고, 주말 낮·오후 시간대에는 프로농구[9], 프로축구, 프로야구 등 프로 스포츠의 주요 경기와 권투, 볼링, 아이스하키 같은 각종 스포츠 이벤트를 수시로 생중계하기도 했다.

2.1.3. 르포·다큐[편집]


개국과 동시에 iTV가 제일 먼저 시도한 분야는 르포 다큐멘터리로, 섹션 형식의 르포 프로그램인 리얼 TV를 선보이게 되는데, 이는 한국 방송 역사상 최초 시도한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6mm 카메라를 전면적으로 내세워 촬영의 기동성과 현장성을 높이기도 했다. 그 결과,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는 새롭고 참신한 장르를 개척했으며, 지속적인 개발과 연구를 통한 다양하고 신선한 포맷을 개발해 iTV를 정직한 방송, 젊고 생생한 방송이라는 다양한 이미지를 형성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살인사건, 조직폭력, 마약사범을 추적하는 강력반 형사들의 이야기를 그린 <경찰 24시>[10]와 리얼리티와 휴머니티를 접목시켜 청소년 문제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 <나쁜 아이들> 시리즈(대표적으로 무전여행기 시리즈), 한국 방송사 최초의 의학 다큐멘터리로 화제를 모았던 <생명전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 생활 곳곳에 숨겨진 사건과 현장을 취재하는 <밀착! 현장 르포>, 인천이 중국과 인접해 있다는 지리적 특성과 교역이 빈번하다는 특성 등을 고려해 중국에 관련된 문화 정보 전달을 위한 중국 문화 전문 프로그램인 <차이나 스페셜>[11]이 있다.

2.1.4. 엔터테인먼트[편집]


케이블TV 전용 프로그램 재판매의 이점을 활용해 다양한 애니메이션과 외화를 선보였다.

2.1.4.1. 애니메이션[편집]

iTV가 초창기에 방송했던 애니메이션은 꾸러기 수비대, 몬타나 존스, 나디아, 그리고 투니버스에서 방송한 아따아따를 내보내게 된다. 하지만 방송구역이 좁았고, UHF 안테나를 달아야지만 볼 수 있는 취약한 시청조건과 이미 오래전에 지상파와 유선방송을 통해서 시청한 사람들이 많아서 크게 히트하지는 못했다.[12]

3. 1998년[편집]



3.1. 편성 분야별 성과[편집]



3.1.1. 보도·시사[편집]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심화에 따른 프로그램 편성시간 축소에 따라, 1998년 4월부터 그 해 말까지 1시간 30분 늦은 9시 30분에 메인뉴스를 방송했다. 그런데 시청률은 같은 시간의 S본부의 레전설 시트콤 때문에(...)

3.1.2. 스포츠[편집]


1998년 4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경기 중계권을 독점 취득해 박찬호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선발 등판 경기를 독점 생중계했다.[13] 하지만, 지상파 방송3사는 한국에서 벌어지는 프로 스포츠 중계방송을 소홀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반응과 함께, 모두가 힘든 시기를 보내는 와중에 무분별한 외화를 낭비해 오직 돈만 노리고 국익을 저버린 채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는 비난을 피할수는 없었다. 메이저리그 중계권을 독점 취득한 이후, 스포츠 중계방송의 비중이 주 3~4회에서 주 5~6회로 증가하였으며 수도권 연고팀[14]의 홈 경기와 타 지역 원정경기를 프라임 타임 시간대에 생중계한 것은 물론, iTV의 방송 권역이 아닌 지역에서 벌어지는 다른 구단의 경기까지 전부다 편성해 경기·인천지역 시청자들과 iTV가 나오지 않는 타 지역 시청자들까지 모두 흡수하는 놀라운 결과[15]를 만들어 냈고, 다른 방송사에 비해 30분 더 많이 방송 시간이 잡혔던 덕에 경기 막판에 중계가 끊기는 일이 드물어 정규방송 관계로 스포츠 중계를 중단합니다라는 코멘트에 질려 있던 스포츠 매니아들의 호평을 이끌어냈다.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치러지는 중계 방송의 경우 새벽·아침 시간대에 경기가 치러지는 점을 감안해, 프로 스포츠 중계방송이 잡혀 있지 않은 날, iTV에서 방영하는 정규 프로그램[16]의 회차가 많이 남아 있거나 빨리 끝나는 시기를 활용해 저녁, 심야 시간대에 재방송하기도 하였고, 포스트 시즌을 포함한 프로스포츠 전 경기를 수도권 연고팀의 포스트 시즌 진출 여부와 상관없이 승자가 결정될 때까지 중계방송해 많은 스포츠 팬들과 광고주들의 놀라움을 사기도 했다.[17]

1998년 9월, 토요일 밤 시간대에 해외의 유수한 프로레슬링 경기를 엮어서 하이라이트 형식으로 방송한 토요 프로레슬링[18]이 첫 선을 보여 레슬링 팬들의 호평을 이끌어내면서 제2의 프로레슬링 붐을 일으키게 된다.

3.1.3. 르포·다큐[편집]


1998년 봄철 프로그램 개편으로 아마추어 전문 VJ들이 촬영한 영상을 통해 우리 사회 구석 구석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VJ 리포트> 를 신설하였다.

3.1.4. 엔터테인먼트[편집]



3.1.4.1. 콘서트[편집]

1998년 메가데스 내한공연을 시작으로 외국 음악 아티스트들의 콘서트 방송도 상당히 많이 해주었다.[19]

3.1.4.2. 게임[편집]

게임 분야도 지역민방 중 가장 신경을 많이 썼으며, 투니버스의 <예측! 사이버 월드컵>[20]을 여기서도 재방송해주었으며 일부 투니버스의 게임방송도 재송출한 것으로 여겨진다.

4. 1999년[편집]



4.1. 편성 분야별 성과[편집]



4.1.1. 보도·시사[편집]


iTV는 개국 초기의 부진을 딛고, 방송 3사의 뉴스 시간대의 차별화를 선언, 천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해부터 틈새시장을 노리고 이와 반대인 밤 10시에 메인뉴스를 방송했다. 보통 일반적인 메인 뉴스 시간대는 9시였고 개국 초기의 iTV 메인뉴스와 SBS의 경우, 1시간 앞당겨서 8시에 방송하는 것이 일반적인 뉴스 시청 시간대였다.[21]

4.1.2. 스포츠[편집]


1999년 1월, iTV는 새로운 스포츠 중계방송을 선보이게 되는데, 프로레슬링의 경우, 매니아층이 PC통신을 통해 형성되면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함에 따라 WCW 프로레슬링[22]을 독립 프로그램으로 발전시키게 되는데, 초창기 방송시간은 50분이었으나, 레슬링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이면서 방송시간이 70분으로 증가하였다.

4.1.3. 엔터테인먼트[편집]



4.1.3.1. 외화[편집]

인천에 차이나타운이 있다 보니 중국 드라마를 많이 해줬다. 특히 황제의 딸은 iTV를 통해 크게 알려졌다.

5. 2000년[편집]


2000년 3월 20일에 방송권역이 경기도까지 확대되자 사명을 경인방송으로 변경했으며, 같은 해 10월, 용인 광교산에 중계소를 설치하면서 TV방송 권역화를 완성해 500만 가구수를 확보, VHF 안테나를 통해서 iTV를 편하게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방송위원회는 해당 방송사의 방송 권역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 케이블TV, 중계 유선방송을 통해 역외 재송신을 금지하는 법안을 준비하게 된다. 만약 역외 재송신 금지 법안이 통과되면 방송 권역이 협소한 iTV가 사실상 큰 타격을 입어 재정상의 어려움을 빨리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시청자의 볼 권리를 크게 제약하는 방송위원회의 잘못된 정책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고, 방송위원회에 항의 서한 발송 및 행정 소송을 통한 법적 대응을 준비했다.

5.1. 편성 분야별 성과[편집]



5.1.1. 스포츠[편집]


2000년 1월, 잉글랜드 워딩턴 컵, 영국 프리미어리그 등 해외 축구 경기를 자체 편성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간혹 지상파에서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와 같은 클럽 간 큰 경기를 가끔 내보내긴 했지만, 정규대회를 중계해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프리미어리그에 한국 선수라고는 누구도 없던 시절에, 해외축구에 대한 관심이 NBA보다도 적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iTV는 지역민방으로 출범했기 때문에 FIFA 월드컵, 올림픽 같은 대형 스포츠 빅 이벤트를 총괄하는 주관 방송사가 아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중계권 확보로 인한 iTV의 시청 권역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독립형 지역민방사 최초로 시드니 올림픽 특별 취재팀을 구성해 2000 시드니 올림픽의 현지 상황을 생생히 전달했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방송 환경의 격량 속에서 이번 해를 마지막으로 메이저리그 중계권 계약이 만료될 위기에 처하자 MLBI의 협상 시기 선정을 즈음해서 메이저리그 중계권 재협상에 들어갔다. 다행히 시청자, 시민단체들의 항의와 반대 시위가 점차 거세지자 방송위원회의 측의 정책 유보로 다른 지역에서 iTV를 계속 시청할 수 있게 되었고 MLBI와의 협상이 원만하게 풀리면서 메이저리그 중계권 연장 계약의 최종 승인을 앞두고 있었지만.... 지상파 메이저 방송사인 MBC가 중계권 연장 협상 막판에 더 높은 가격과 더 많은 계약 기간을 불러내면서 iTV가 확보했던 메이저리그 중계권을 새롭게 가져가게 된다.

결국 예상치 못한 메이저 방송사의 끼어들기로 인해 메이저리그 중계권을 재확보하는데에 실패하게 되면서, 미국의 NBA 엔터테인먼트로부터 2년간의 독점 중계권을 확보해 정규시즌, 올스타전, 플레이오프 등 NBA의 모든 경기를 생중계하게 된다.[23] 또한 NBA의 다양한 소식과 이모저모를 담은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을 방송했으며, 미국 현지로 제작진을 파견해 트레이닝 캠프에서 치러지는 전지 훈련 현장을 독점 취재했고, 심지어 2000-2001시즌 챔피언 결정전에는 미국의 NBA 대표 경기장에 중계부스를 설치해 생생하고 박진감 넘치는 현장감을 구현해 NBA 팬들의 호평을 받았다.[24]

5.1.2. 엔터테인먼트[편집]



5.1.2.1. 콘서트[편집]

2000년대 초반, 미스터 빅 내한[25]과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엔싱크 등의 콘서트에, 일본대중문화가 막 개방된 시기에 아무로 나미에의 콘서트도 방송해 주었다.

5.1.2.2. 게임[편집]

투니버스-OGN과 달리 독자적으로 스타크래프트 대회인 iTV 스타리그는 초창기 스타판에서 온게임넷, MBC GAME에 밀리지 않는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홍진호가 여기서 우승한 적 있으나, 타이틀은 아무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TV 방송 폐국 이후 이벤트전으로 자동 격하되는 안타까운 사례로 남고 말았다. 이외에도 상술했듯 온미디어에 힘입어 여러 게임 프로그램을 방영했으며, 스타크래프트 이외에도 당대 최고의 국민게임이었던 포트리스2 등 여러 게임을 다뤘다.

5.1.2.3. 애니메이션[편집]

그동안 재정능력이 불안정해 안정화를 되찾을때까지 초창기에 방영된 애니메이션을 재탕할 수 밖에 없었는데, 다행히도 안정적으로 2개의 애니메이션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2월달에 방송된 원탁의 삼총사와 그 후속작인 캡틴 테일러가 바로 그것. 하지만 10월말에 첫 선을 보인 신나는 TV 팡팡이라는 어린이 프로그램이 만화영화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한 동안 애니메이션 편성을 하지 않았다.

6. 2001년[편집]



6.1. 편성 분야별 성과[편집]



6.1.1. 스포츠[편집]


2001년 7월에 WWF 프로레슬링, 2002년 10월에 WWE 히트, 스맥다운을 연이어 런칭하면서 레슬링 팬들의 갈증을 해소시켰다.[26]

6.1.2. 엔터테인먼트[편집]



6.1.2.1. 애니메이션[편집]

재정적인 문제로 한 동안 애니메이션 편성하지 않았던 iTV는, 여름 시즌을 기점으로 다시 애니메이션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여름 시장의 처음으로 선보인 애니메이션은 형사 가제트[27]로 사상 처음으로 자체적으로 더빙한 애니메이션이다. 그 후, 투니버스에서 방영했던 우주에서 온 모자코로 이어진다.

7. 2002년[편집]



7.1. 편성 분야별 성과[편집]



7.1.1. 스포츠[편집]


2002 한일 월드컵 주간에는 월드컵의 생생한 현장, 이모저모 담은 월드컵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을 아침, 심야, 주말 오후 시간대에 편성해, 한일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를 이끌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노력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는 한·일 월드컵에서 4강 진출이라는 최고의 업적을 달성하게 되었고, 국가대표라는 유니폼을 입었던 자랑스러운 태극전사들이 유럽 진출을 선언하면서 유럽 축구에 대한 관심이 증폭돼 설기현이 소속된 벨기에의 안더레흐트, 송종국이 활약한 네덜란드의 페예노르트, 김남일이 소속된 엑셀시오르, 이영표가 소속된 PSV 에인트호번, 그리고 이천수가 소속된 스페인의 레알 소시에다드 등 한국인이 소속된 유럽 축구 경기를 태극 전사가 있는 곳이라면 밤·낮 가릴 것 없이 위성 생중계했다.

7.1.2. 엔터테인먼트[편집]



7.1.2.1. 애니메이션[편집]

작년 여름에 이어진 애니메이션 편성을 재개한 iTV는 타 지상파 채널에서 방송했던 부메랑 파이터, 빨간망토 차차를 상반기에 선보였는데, 두 애니메이션 모두, 크나큰 히트를 하지 못했다.[28] 그리고... 최고의 빅 이벤트인 여름 성수기가 다가왔고, iTV는 한국 애니메이션 방송 사상 최초로 심야 시간대에 파격적인 편성을 단행하게 되는데, 바로! 초능력을 다룬 매니악한 애니메이션인 사이파이 해리다. 현지에서는 2년전에 방영했으나 미지근한 반응으로 큰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국내 판권 확보에 성공하면서 iTV가 두 번째로 자체적으로 더빙하는 놀라운 일을 해내기도 하였다.[29] 그 후, 아침 시간대에 투니버스에서 방송되었던 로봇전사 감마, 후속작인 명탐정 코난의 2연속 흥행가도를 달리면서 사실상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강자로 등극하게된다.

8. 2003년[편집]



8.1. 편성 분야별 성과[편집]



8.1.1. 엔터테인먼트[편집]



8.1.1.1. 애니메이션[편집]

작년에 선보였던 애니메이션이 쏠쏠한 재미를 보면서, 애니메이션 분야에 과감한 투자를 선보이게 되는데, 다!다!다!, 더 파이팅, 드래곤볼 Z, 선계전 봉신연의, 뿡야뿡야 왕바우, 맑음 때때로 뿌이뿌이, 달빛천사, 환상마전 최유기, 후르츠바스켓, 추리게임 뫼비우스의 띠투니버스애니원에서 방송했던 애니들을 가져와 아침부터 골고루 방영했다.[30][31]

9. 2004년[편집]


2004년 8월경부터 방송위가 자체편성이 50%를 넘는 TV 채널의 경우 역외 재송신이 가능하다는 규정을 신설하여 스카이라이프에 재전송을 한 적이 있었다. OBS도 마찬가지로 이 규정에 의거해서 역외 재전송을 순차적으로 시작했다.

2004년 말에 디지털 방송용 송신소를 계양산에다 설치할 준비하였으나 방송 3사에서 반발해서 우여곡절 끝에 전파월경을 차단한다는 조건으로 허가를 내줬다.

9.1. 편성 분야별 성과[편집]



9.1.1. 엔터테인먼트[편집]



9.1.1.1. 외화[편집]

그 이후 노조 파업으로 여기에서 방영된 대만 CTS의 드라마 러브 인 그리스(정정애금해)는 결국 iTV의 마지막 드라마가 되었다.

10. 재허가 심사 전 상황[편집]


iTV는 젊은방송 푸른방송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경찰 24시, 메이저리그[32], WCW, 황제의 딸, 스타크래프트, 해외축구 등 지상파 방송 3사와는 차별화된 포맷과 과감하고 새로운 시도를 통한 신선한 감각의 프로그램을 내세웠다. 다저스 경기 중계권 계약이 만료된 뒤에도 NBA, WWE, 영국로봇배틀 프로그램 등 수준 높은 콘텐츠를 방영하였다. 때문에 비 수도권의 유선방송사가 iTV를 송출하면서 방송위원회의 역외재송신 금지 조치로 인천·경기를 제외한 전국 모든 지역에 2003년 1월 21일부로 송출을 중단시키라는 명령을 내려지기 전까지 전국에서 시청할 수 있었다. 출처 재송신 금지조치 당시 전국의 모든 SO가 동시에 송출을 중단시키기에는 가입자들의 반발이 워낙 거세 지역별로 나눠서 순차적으로 방송 송출을 중단했다. 출처

하지만 방송 권역의 확대 사안에 관한 방송위원회와 지배구조 갈등에 따른 대주주와 사측의 첨예한 대립, 그리고 새로운 종목의 중계권을 따내기 위한 지상파 메이저 방송사간의 눈치 싸움이 점점 심해져도 iTV는 TV 방송 허가가 취소될 때까지 프로 스포츠 중계 횟수를 과감하게 확대했고, 한 종목에 많이 편중되지 않는 선에서 다양하지만 비인기적인 종목을 공평하게 편성해 한국 스포츠 발전에 선두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건전한 여가생활을 선용하고 스포츠 문화의 새 지평을 열였을 뿐만 아니라 현재 스포츠 전문채널에서 방영하는 인기 스포츠 경기 중 일부가 iTV에서 먼저 선을 보였을 정도로 최고의 스포츠 방송사로 찬사를 받았다.

특히 경찰 24시의 경우 시청률이 가장 높아 개국 초기부터 단 한 차례도 결방되지 않았으면서, iTV의 역사를 통틀어 처음와 끝을 함께 한 장수 프로그램이라는[33] 흔치 않은 대기록을 만들어냈다.

10.1. 재허가 추천 거부로 인한 TV 방송 중단[편집]



마지막 송출 당시 영상 오디오 녹음[34] 니코동

iTV는 방송위원회의 재허가

추천거부 결정으로 이시간 이후

방송을 전면 중단하게 됐습니다.

지난 7년여동안 저희 iTV를

사랑해준 시청자 여러분께 끝까지

좋은 방송을 보내드리지 못한점

머리숙여 사죄 드립니다.

iTV 경인방송 임직원 일동은

끝까지 힘이 되어주신 인천, 경기지역

시청자 여러분께 iTV 경인방송의

이름만은 영원하길 기대합니다.

그동안 보내주신 시청자 여러분의

사랑, 마음 속 깊이 새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04. 12. 31

iTV 경인방송 임직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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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마지막 날 당시 iTV 방송종료 고지


다른 지상파 TV 방송국과는 차별화된 방송으로 인기를 얻었지만, 2004년 12월 31일 오전 11시 10분 경에 방송전파가 끊겼다. 방송위원회(방송통신위원회)가 iTV의 TV방송 재허가 추천을 거부했기 때문.

재허가 추천이 거부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2003~2004년 사이의 경영 분쟁 때문이었다. 대주주인 동양제철화학(현 OCI) 측이 iTV에 출자를 해줘야 하는데 거부하면서 재정상태가 극도로 나빠졌다. 이어 간접광고 관련 조항 위반이 90회 적발되었고, 2004년에 이르러서는 박상은 사장이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위해 방송을 이용하려고 한다는 사실이 iTV 메인뉴스에 폭로되면서 사태가 더 악화되었다. iTV의 TV방송 중단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이 보도는 임원진의 부정을 직접적으로 비판했다는 점에서 거의 최초의 일로 언론의 자유 측면에서 파장이 컸다. 뒤이은 파업에 대응해 사측이 직장 폐쇄로 맞서는 등 노사간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그리고 방송으로 나온 이익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조건도 지키지 않았다.

결국 면허 심의를 하고 있던 구 방송위원회는 iTV가 방송국을 더 이상 운영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 해 12월 21일에 TV 방송 면허를 회수해 갔다. 재허가 추천 없이는 방송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열흘 뒤에 방송이 전면중단되고 말았다. 이는 1980년 언론통폐합 이후로 정부기관에 의해 방송을 중단시킨 최초의 사례이다.

2004년 12월 31일, 경인방송 텔레비전의 최후의 프로그램은 사랑릴레이 함께하는 세상이었다. 이 프로그램이 끝나고 난 후인 오전 11시 10분, 방송 종료 고지의 내용을 담은 위의 사과문[35]과 함께 애국가를 띄우면서 TV 방송 전파가 끊기고 말았다. 방송이 중단되는 그날에도 직장폐쇄가 된 상태였는지라 대부분의 직원들이 회사 바깥에서 이동 전광판으로 마지막 방송을 지켜보고 있었다. 애국가가 끝나자마자[36]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TV방송 전파가 끊어지자 결국 iTV 조합원 모두는 비통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당시 뉴스 보도 원래는 마지막 프로그램이 끝난 뒤 고별방송인 <iTV 고별방송 - 시청자 여러분 죄송합니다>라는 제목으로 기획했었으나 노사간의 충돌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취소했다. 종무식은 빈 스튜디오에서 임원들끼리만 약식으로 하고 넘어갔다.[37]

iTV의 TV 방송 재허가 추천 거부는 대한민국 방송업계에 경종을 울렸다. 특히 재정기반이 허약한 지역 민영방송이 바짝 긴장했는데, 방송위원회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해서 재허가 추천을 거부당한다면 자기들도 iTV와 비슷하게 폐쇄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MBC의 암니옴니[38]가 iTV의 재허가 추천 거부 문제를 다룬 적이 있었다.

10.1.1. TV방송 중단 이후[편집]


폐국 후 메이저리그 전문 캐스터로 활약했던 정지원 캐스터, 홍원기, 김준우 아나운서는 엑스포츠에서 활약했고, 프로레슬링, 프로 농구, NBA를 전담했던 김동연 캐스터는 J Golf로 이적해 지금까지도 프리랜서 신분으로 스포츠 중계를 계속하고 있다.

MBCCBS에서 인수를 검토한 적이 있다. CBS는 OBS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한편 이렇게 회수된 경인지역 민방 운영권과 DTV용 송신소는 같은 해에 개국한 OBS경인TV에게 넘어갔고, 그리고 iTV 방송자료의 운명은 2006년경 아이넷TV에 전량 매각처분한 상태이다.

2004년 12월 31일 오전 11시 10분에 전파가 끊긴 19년 후, 본사는 폐허가 된 것처럼 인적이 없는 공간이 되었다. 경인방송 간판은 모조리 철거되고 DCRE만 남아있고, iTV 안테나는 세월에 흔적이 남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경인방송 iFM 90.7은 밤이 되면 본사에 불빛이 들어온다.

11. 여담[편집]



  • 2019년, 한국농구연맹네이버가 협력하여 초창기 KBL 중계방송 영상을 복원하고 있고, 그 중 상당수가 iTV 중계이다. 대부분의 영상자료가 VHS 녹화본이긴 하지만, 2000-2001 시즌 중계 영상 중 일부는 아이넷TV에 양해를 구하고 영상을 복사해왔는지 원본 영상 그대로 서비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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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BS는 1991년 최초 개국할 당시는 수도권으로 가시청권이 한정돼 있었으나 1995년 개국한 부산방송, 대구방송, 광주방송, 대전방송 등 1차 지역 민영방송 네트워크를 통해 사실상의 전국방송으로 진화했다.[2] SBS의 원래 명칭은 '서울방송'이었다.[3] 인천과 서울은 매우 가까운 이웃도시이기에 지상파 채널의 출력 반경을 고려한다면 서울에서도 충분히 경인지역 민방을 시청할 수 있었다. 만약 새 민방의 콘텐츠가 신선하다면 SBS를 즐겨보던 시청자들이 경인지역 채널로 충분히 갈아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SBS가 경인지역 채널의 설립을 강력 반대한 것이다. 이 논란만 없었더라면 1차 지역민방 개국일인 1995년부터 경인지역 민방도 설립되었을 것이다.[4] 인천 학익동에 매우 큰 규모의 종합화학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iTV 연주소도 학익동에 있기는 했으나 동양화학공업 공장은 연수구 옥련동에 가까운 학익동이었고 iTV 연주소 건물은 중구 신흥동에 가까운 학익동이었다.[5] 송도중학교송도고등학교의 운영법인인 학교법인 송도학원을 소유하고 있다.[6] 운이 좋으면 경기도 서부, 서울특별시 강서구까지 시청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화질까지 완벽하게 끌어올리기에는 역부족.[7] 정치 뉴스, 국제 뉴스 등 전국 뉴스 아이템은 YTN으로부터 영상을 사와서 방송했다. 하지만 2004년부터는 YTN과의 보도 공급 계약을 해지하고 독자적으로 전국 뉴스를 제작했다.[8] 생방송 모닝데이트, 지금은 메트로 시대 안에 고정 편성[9] 해설위원 중에 유영주의 은사 심욱규 前 인성여자고등학교 감독이 있었으나, 2001년 6월 5일에 작고했다.[10] 폐국 후, OBS에서 스핀오프 작인 《경찰 25시》를 방송하고 있었으나 2015년 종영되었다.[11] 자체제작 형식으로 편성되었던 차이나 스페셜은 1998년 4월분까지 방송하다가 잠시 동안 휴식기를 가졌다가, 1999년 1월, 중국의 충칭위성TV와 프로그램 전략적 제휴 및 한.중 방송교류를 위한 우호협정을 체결해 중국의 문화.예술 소식을 전달하는 시사 프로그램으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제휴사의 계약 만료로 인해 2002년 10월까지 방송했다.[12] 일단 투니버스에서 방영했던 작품들 중에서 1990년대 방영한 작품들은 아직 케이블 방송 보급률이 2000년대만큼 활발하지 않던 시기여서 iTV를 통해서야 비로소 과거 작품들을 시청한 경우가 많았다.[13] 중계진은 한국스포츠TV 출신의 정지원 캐스터를 중심으로 과거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코치연수를 받은 이광환LG 트윈스 감독을 비롯하여, 역시 미국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은 바 있는 이때는 지극히 정상이었던 박노준, 그리고 비선수 출신으로 메이저리그 전문가였던 미국 소식을 전달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맡고 있는 스포츠서울의 문상열 기자, 송재우 등 다양한 스포츠 전문가들이 메이저리그만 전담해 전문적인 분석과 한국파 메이저리거들의 해설을 맡았다.[14] 현대 유니콘스, 대우 제우스 등[15] 메이저리그 독점 중계에 따른 시청률 증가로 중계유선과 케이블TV를 통해서 iTV의 전국방송화가 시작된것도 스포츠 분야에서의 성과 덕분이었다.[16] 외화·영화, 드라마·시트콤, 연예·오락 등[17] 다만, 모든 스포츠 경기가 그렇듯 승자가 결정될 때까지 끝까지 중계방송을 할 때도 있고 정규방송 시간이 임박해 중계를 중단해야 되는 안타까운 상황도 있다.[18] 1990년대 후반 WWF, WWE RAW를 방영했던 위성방송 스타 스포츠와 더불어 프로 레슬링 방송을 지상파 최초로 방송하게 된다.[19] 2010년대 후반~2020년대 기준 엠넷 등의 케이블 채널에서조차 잘 안 해주는 걸 생각하면 놀라울 따름이다.[20] 투니버스측에서 EA 스포츠의 FIFA 스핀오프 <월드컵 98>을 가지고 월드컵 대진표의 시뮬레이터를 한 것(간단히 말해서 당시 고증이 괜찮았던 선수 데이터 가지고 컴끼리 붙인 거)이라고 보면 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 e-sports의 빅뱅이 된 방송.[21] 다만, 주말시간대의 메인 뉴스 시간대가 상당히 특이했는데 주말 시청자들의 시청패턴을 고려해 1998년 4월부터 2001년 2월까지 방송 3사의 기본적인 메인 뉴스시간과 일정하게, 1시간을 앞당기거나 1시간 더 늦게 편성했다.[22] 당시 프로레슬링 중계진은 전용준-천창욱-김기남 체제로 방송되었다.[23] 2000년대 이전까지는 SBS에서 녹화방송을 통해 하이라이트 형식으로 내보내는 프로그램이 있었으나 심야 프로그램인데다가 농구 매니아층을 겨냥한 프로그램인 관계로 IMF 시대와 함께 사라졌다. 그 당시 캐스터는 한명재, 김동연, 현 점프볼 편집장 손대범이 해설위원이었다.[24] 하지만, 2001-2002 시즌 중계를 끝으로 MBC ESPN으로 중계권이 넘어갔고, 그 후 SUPER ACTION, SBS SPORTS로 중계권이 이어졌다가, 현재 SPOTV에서 NBA를 중계한다.[25] 곡 설명은 잘해주는 편이나 IN MY DARKEST HOUR의 곡설명을 잘못 적기도 했다.[26] 전용준 아나운서의 퇴사 이후 한명재-천창욱. 이상우-천창욱. 김동연-천창욱. 김준우-천창욱 순으로 중계진이 이어졌다. 김동연-천창욱 콤비는 이후 KBS N 스포츠에서 잠시 스맥다운을 중계하는 것으로 보이기 했는데, 이것은 실제 KBS N에서 중계를 한 것은 아니고 iTV 촬영분으로 KBS N이 재송출하는 형식이었다.[27] iTV 방영 이전 MBC에서 방영된 적이 있으며, 비디오판으로도 출시된 적이 있다.[28] 부메랑 파이터의 경우에는 명탐정 코난, 드래곤볼에 밀려 빛을 보지 못했으며, 빨간망토 차차는 첫 방영했던 1997년에 큰 인기를 끌었으나 모험용 애니메이션에 관련된 상품들의 대 히트로 이미 시장에서 뒤로 밀린 상태였다.[29] 그러나 결국 이 작품은 대한민국 지상파 방송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방영된 심야 애니메이션이 되었다.[30] 그 중 최유기와 스파이럴(뫼비우스의 띠의 원제)은 여기서 방송을 탄 덕분에 당시 초~중학교에 인지도를 쌓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최유기는 기존엔 여성층에게만 주목받다가 이 이후로 남자 초중딩 중에도 아는 사람이 꽤 늘어났다. 물론 대부분 날아라 슈퍼보드를 보고 자란 세대라 괴리감이 커서 싫어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31] 애니원에서 방영했던 대부분의 작품들은 애니원이라는 방송국 자체가 2004년 1월에 처음 케이블 방송에 진출하기 전까지는 스카이라이프를 통해서만 송출이 되었기 때문에 보급률이 굉장히 낮아서 iTV를 통해 과거 작품들을 시청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32] 1998년 계약 당시 LA 다저스 소속의 박찬호 출전 경기를 MLB International과 독점 계약하여 화제가 되었다.[33] TBC-TV를 통해 방영됐던 정통 TV 쇼 프로그램 쇼쇼쇼는 TBC-TV 개국 시점인 1964년 12월부터 언론통폐합 시점인 1980년 11월 29일까지 꾸준히 방영됐다. 심지어 TBC 폐국 이후 KBS로 넘어가서도 3년간 더 방영됐다가 폐지됐다.[34] 앞부분 함께하는 세상 프로그램 방영 부분이 추가로 포함되어 있다. 특히 마지막 멘트에서 "내년도에는 더 멋진 프로그램 만들기 위해서 더 노력하겠습니다. 더 많이 사랑 부탁드립니다."라고 언급하였지만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마지막 방송이었는데도 이러한 언급을 했었던 이유는 재허가 추천거부 발표 전에 이미 사전녹화를 했었기 때문이다. 말은 즉슨 당시 폐국까지 올거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던 것... [35] 전문 성우 더빙조차 하지 않고 BGM도 없이 조용히 자막만 나왔다.[36] 애국가 마지막 소절인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가 나가자마자 전파를 끊었다.[37] 참고로 빈 스튜디오는 'iTV 고별방송 - 시청자 여러분 죄송합니다' 프로그램 촬영 장소였다.[38] 2005.2.18. ~ 2006.5.11. 2003년 방영된 '신강균의 뉴스서비스 사실은'이라는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후신이다. 이는 '뉴스후'를 거쳐 '후+'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방송되었다. 이후 김재철 사장 취임과 동시에 종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