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흥 (문서 편집) [목차] == [[전라남도]] [[고흥군]]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고흥군)] == 백제 시대 역사적 인물 == '''高興''' (생몰년도 미상) [[백제]] [[근초고왕]] 때의 [[학자]], [[관료]]. 알려진 [[관직]]은 박사(博士). 375년 백제 [[역사]]를 [[문자]]로 기록한 백제 최초의 역사서인 [[서기(백제)|서기]]를 편찬하였다. 이 기록을 제외한 고흥의 행적은 지극히 짧고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고흥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서도 기록이 적어 알 수 없다고 자인할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물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백제 역사를 정리한 서기를 편찬하였기 때문이다. 서기의 편찬은 고대 [[국가]]의 완성 및 백제 국력과 [[왕권]]의 위대함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서기는 후대의 기록인 [[일본서기]]에서 인용하는 [[백제삼서]] 중 [[백제기]]의 원형을 제시한 역사서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모두 현전하지 않는다는 것.[* [[이도학]]은 書記를 [[한자]] 그대로 해석해 고흥의 기사에 서기가 사서가 아니고 역사를 기술했다라는 것이라 해석하기도 했다. 고흥이 백제 역사 정리 과업을 수행한 것은 사실이다.] 고흥에 대해서는 남은 기록이 없어 행적은 알 수 없으나 출신에 대해서는 [[한사군]]계의 인물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이는 [[낙랑]] 유적에서 발굴된 전돌 등의 유물에 고씨, 왕씨, 장씨 등의 성씨가 보이기 때문인데 한사군 몰락 전후로 상당수 인재들이 백제 등지로 [[망명]]해서 백제 문한기구에 인재들로 기용되었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근초고왕 시기 이들은 [[교육]]보다는 왕의 [[정치]] 자문단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 대중매체 === KBS 대하사극 [[근초고왕(드라마)|근초고왕]]에서 등장한다. 배우는 [[안석환]] 역사적 기록과는 조금 다른 출생을갖고 있는데 바로 [[부여]]인이자 부여 출신 유학자로 나온다.[* 덕분에 [[아직기|아지카이]]가 그의 문하에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부여출신 유학자이기 때문에 [[현왕(부여)|현왕]]의 신하로 나오며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는 예맥의 상징적 부여의 옥쇄를 들고 주인을 찾아 떠나며 결국 근초고왕에게 그것을 넘기게 된다. 작중에서 말버릇으로는.. >그러니 네가 유학을 잘 못 배웠다밖에.. 이다. 매번 [[아직기|아지카이]](아직기)를 타박할때 항시 쓰는 멘트이다. 요서시절에는 군사 역할을 백제로 귀환하고는 역사대로 박사로 인재양성을 해간다. [각주] [[분류:몰년 미상]][[분류:한국의 역사가]][[분류:백제의 인물]][[분류:동음이의어]]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