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량규사 (문서 편집) ||<-2> [[파일:staff_ryang.jpg|width=320]] || ||<-2><#1d2468> '''{{{#ffffff 파지아노 오카야마 코치}}}''' || ||<-2> '''{{{#ffffff 량규사 [br] 梁圭史 / Ryang Kyusa}}}'''[* 일본어 음독의 로마자표기인 '료 케이시(Ryo Keishi)'가 아닌 한국어/조선어 로마자표기로, 영어 공식명칭은 이쪽이 맞다.] || ||<#1d2468> '''{{{#ffffff 생년월일}}}''' || [[1978년]] [[7월 3일]] ([age(1978-07-03)]세) || ||<#1d2468> '''{{{#ffffff 국적}}}''' || [[조선적]]/[[북한]] || ||<#1d2468> '''{{{#ffffff 국가대표팀}}}''' || [[파일:북한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width=20]][[북한 축구 국가대표팀]] 6경기 3골 || ||<#1d2468> '''{{{#ffffff 출신지}}}''' || [[일본]] [[오카야마현]] [[쿠라시키시]] || ||<#1d2468> '''{{{#ffffff 신체조건}}}''' || 178cm || ||<#1d2468> '''{{{#ffffff 포지션}}}''' || [[공격수#s-2.2.2|스트라이커]] || ||<#1d2468> '''{{{#ffffff 프로 클럽}}}''' || [[도쿄 베르디|베르디 가와사키]] (2000) [br] [[울산 현대|울산 현대 호랑이]] (2001) [br] [[자스파구사츠 군마]] (2003) [br] [[파지아노 오카야마]] (2005~2006) || ||<#1d2468> '''{{{#FFFFFF 지도자 생활}}}''' || [[파지아노 오카야마]] (2007~현재) || [목차] == 소개 == 량규사는 [[일본]] 태생의 [[북한]] 국적 축구 선수로 포지션은 공격수이다. [[https://ja.wikipedia.org/wiki/%E6%A2%81%E5%9C%AD%E5%8F%B2|일본 위키피디아 문서]] == 클럽 경력 == 히로시마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http://www.rfa.org/korean/in_focus/36986-20000724.html|재일 조선 축구단에서 활약]]했다. 2000년 3월 북한 국가대표로 아시안컵 축구대회 예선전에 차출되었고, 대만과의 경기에서 2골을 기록해 맹활약했다. 그 후 2000년 [[도쿄 베르디|베르디 가와사키]]에 입단해 프로 데뷔를 하는데, 그 당시 베르디 가와사키에는 총감독 이국수를 비롯해, [[장외룡]] 감독이 스태프로 있었으며, [[울산 현대]]의 레전드 [[김현석(축구)|김현석]]과 [[전남 드래곤즈]]의 레전드 [[김도근(축구)|김도근]]이 선수로 뛰고 있었다. 후에 베르디 가와사키가 [[울산 현대]]와 가진 교류전에서 교체 출전하게 되고 이를 눈여겨 본 [[김정남(축구인)|김정남]] 감독에 의해 [[K리그]]로의 이적을 추진하게 된다. 관련 법을 개정해서 이적이 가능해진 량규사는 결국 [[울산 현대]]로 [[http://www.rfa.org/korean/in_focus/53960-20010408.html|이적]]하게 되었다. 다만, 울산에 합류한 직후 [[http://news.hankyung.com/article/2001033059091|북한 대표팀의 독일 전지훈련에 차출]]되었다. 그리고 한동안 소식이 없다 싶었는데... [[http://nk.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85|1경기도 뛰지 못하고 퇴출]]되었다고 한다. 이후에는 [[일본]]으로 돌아가 선수 생활을 한 뒤 은퇴했다. 은퇴 직후인 2007년부터 마지막 소속팀이자 고향팀인 [[파지아노 오카야마]]의 코치로 오랜 기간 활동을 하고 있다. 유스팀과 1군팀을 오고가며 코치생활을 장기간 하는 것으로 봐서는 팀에서도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2020년부터는 클럽 1군팀의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 여담 == * 사안이 사안이었던지라 이적 과정이 좀 복잡했다. 일본 내 조총련의 영향하에 있던 [[재일조선인 축구단]]의 [[김광호]] 단장이 "남북 화합 차원에서 공문을 보내면 이적을 협조하겠다."라는 말을 했었고, 결국 이적이 이루어졌다. 계약은 7,500만원에 연봉은 3,500만원. 그 당시 관여한 기관들이 제법 된다. [[문화관광부]]를 필두로 하여 [[국가정보원]], [[대한민국 외교부|외교부]], [[대한민국 법무부|법무부]]가 이 문제에 대한 유권해석에 관여했다.[* [[대한민국 헌법]]상 제3조 영토와 제4조 평화통일 조항에 따라 북한 국적 및 조선적 동포들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볼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북한이라는 반드시 수복해야 하는 영토 내 불법정부 국적 하의 국민이라는 점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무국적자 포함) 외국인으로도 볼 수 있는 법적 충돌이 있다. 안보와 국가 간의 관계는 국가정보원과 외교부가, 국적 문제는 법무부가 담당하는 업무인지라 이들 행정기관의 조율이 필수적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남한방문증서라는 증서를 발급받으면 [[K리그]]에서 활동이 가능하게 되며 이 법 개정이 후일 [[안영학]]과 [[정대세]] 등이 [[K리그]]에 뛰는 데 일조한다.[* 다만, 정대세의 경우 북한 국가대표팀을 선택한 것과는 상관없이, 대한민국 국적자인 재일동포로서 K리그에서 외국선수가 아닌 한국선수임을 규정한 이른바 '[[박강조]]룰'(2000)을 적용받을 수도 있는 매우 특이한 사례였다.] 현재 이 규정은 2021년 확대되어 '''북한 태생의 인물'''도 남한방문증명서를 받게 되면 북한 클럽에서의 이적 형식으로도 K리그에 데뷔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해졌다. *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는 북한의 한국어표기 정서법상 '량규사'가 맞긴 하지만, 한국에서는 두음법칙 적용으로 '양규사'로 불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본인이 '량규사'라고 불러주길 희망했다.[* 량규사의 성(姓)으로 쓰인 '량'은 대들보 량(梁) 자로, 상량식의 그 '량' 맞다. 애초에 '량'이기 때문에 두음법칙에 따라 표기법이 달라질 수 있다.] == 관련 문서 == * [[외국인 선수/역대 프로축구]][* 단, 상기에 설명했듯, 량규사는 외국인선수가 아닌 단지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에 소속되어 뛰었기에 해당 문서에 기재가 됐다.] [[분류:1978년 출생]][[분류:쿠라시키시 출신 인물]][[분류:북한의 축구선수]][[분류:도쿄 베르디/은퇴, 이적]][[분류:울산 현대/은퇴, 이적]][[분류:더스파구사쓰 군마/은퇴, 이적]][[분류:파지아노 오카야마/은퇴, 이적]][[분류:재일교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