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나다 조이치로 (문서 편집) [[분류:일본 제국의 군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1897년 출생]][[분류:1957년 사망]][[분류:비바이시 출신 인물]] [INCLUDE(틀:일본군 삼간사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50px-JoichiroSanada.jpg]] '''真田穣一郎'''([[1897년]] [[11월 21일]]~[[1957년]] [[8월 3일]]) [목차] == 개요 == [[일본 제국]]의 [[군인]]. == 생애 == [[홋카이도]] [[비바이시|비바이]](美唄) 출신으로 아버지도 군인([[둔전]]병)이었다. 1927년에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육군대신 비서관(1938), [[중일전쟁]] 당시 보병 86연대장(1939), 중국파견군 작전과장(1940), 군무국 군무과장(1941) 등을 거쳐 1942년에 참모본부([[대본영]]) 작전과장이 되어 [[과달카날 해전|과달카날 전투]]의 철수를 결정하고 지휘하기도 했다. 이듬 해에는 [[소장(계급)|소장]]으로 진급했고 제1부장, 군무국장을 지냈다. 패전 당시에는 제2군 참모부장으로 있었다. 1945년 12월에 전역하였고, 이후 조용히 살다가 [[1957년]]에 사망했다. 사후 [[1984년]]에 그의 일기를 바탕으로 쓰여진 전기 "사나다 조이치로 장군을 그리워함(真田穣一郎将軍を偲ぶ)"[* 호소노 츠토무(細野勉) 저]이 간행되었다. == 상세 == 이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삼간사우]]''' 중 '사우'의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라는 것. 하지만 [[대본영]] 작전과장으로 재직 중 [[무타구치 렌야]]의 [[임팔 전투|임팔 작전]] 계획안을 "엉망진창인 작전구상이다."라면서 열심히 반박하고, "비행기도 자동차도 없는 상황에서는 절대 반대다. 작전 수행을 위해서는 도로건설을 위한 1년의 기간이 필요하고 이것이 불가능하면 해로수송을 위한 해군의 협조라도 있어야 한다."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당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구도를 생각하면, 단순히 '타군의 협조가 필요할 정도로 어려운 작전'이라는 실무적인 지적이 아니었다. "'''[[팩트폭력|아니, 선배님! 이 작전을 그나마 해 보려면 저 웬수 같은 해군 놈들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할 판인데 지금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이게?]]'''"라고 대놓고 대든 격이다. 심지어 무타구치 렌야는 사나다의 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 선배(10년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항변한 것이다. 파벌, 연줄과 [[연공서열]]을 아주 심하게 따지는 구 일본군에서 '''10년 후배'''가 이 정도로 반응할 정도로 작전안이 형편없었다는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