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다 조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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真田穣一郎(1897년 11월 21일~1957년 8월 3일)
1. 개요
2. 생애
3. 상세


1. 개요[편집]


일본 제국군인.

2. 생애[편집]


홋카이도 비바이(美唄) 출신으로 아버지도 군인(둔전병)이었다. 1927년에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육군대신 비서관(1938), 중일전쟁 당시 보병 86연대장(1939), 중국파견군 작전과장(1940), 군무국 군무과장(1941) 등을 거쳐 1942년에 참모본부(대본영) 작전과장이 되어 과달카날 전투의 철수를 결정하고 지휘하기도 했다. 이듬 해에는 소장으로 진급했고 제1부장, 군무국장을 지냈다. 패전 당시에는 제2군 참모부장으로 있었다. 1945년 12월에 전역하였고, 이후 조용히 살다가 1957년에 사망했다. 사후 1984년에 그의 일기를 바탕으로 쓰여진 전기 "사나다 조이치로 장군을 그리워함(真田穣一郎将軍を偲ぶ)"[1]이 간행되었다.


3. 상세[편집]


이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삼간사우 중 '사우'의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라는 것. 하지만 대본영 작전과장으로 재직 중 무타구치 렌야임팔 작전 계획안을 "엉망진창인 작전구상이다."라면서 열심히 반박하고, "비행기도 자동차도 없는 상황에서는 절대 반대다. 작전 수행을 위해서는 도로건설을 위한 1년의 기간이 필요하고 이것이 불가능하면 해로수송을 위한 해군의 협조라도 있어야 한다."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당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구도를 생각하면, 단순히 '타군의 협조가 필요할 정도로 어려운 작전'이라는 실무적인 지적이 아니었다. "아니, 선배님! 이 작전을 그나마 해 보려면 저 웬수 같은 해군 놈들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할 판인데 지금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이게?"라고 대놓고 대든 격이다.

심지어 무타구치 렌야는 사나다의 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 선배(10년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항변한 것이다. 파벌, 연줄과 연공서열을 아주 심하게 따지는 구 일본군에서 10년 후배가 이 정도로 반응할 정도로 작전안이 형편없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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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소노 츠토무(細野勉)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