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다르 1세 (문서 편집)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유고슬라비아 출범 이전 세르비아 국왕, rd1=알렉산다르 1세(세르비아))] [include(틀:역대 유고슬라비아 왕국 국왕)]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e0000, #df0000 20%, #df0000 80%, #8e0000)" '''{{{#fff 유고슬라비아 왕국 제2대 국왕[br]{{{+1 알렉산다르 1세}}}[br]Александар I}}}'''}}}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ralj_aleksandar1.jpg|width=100%]]}}} || ||<|2> '''출생''' ||[[1888년]] [[12월 16일]]|| ||[[몬테네그로 공국]] [[체티네]]|| ||<|2> '''사망''' ||[[1934년]] [[10월 9일]] (향년 45세)||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 [[마르세유]]|| ||<|4> '''재위기간''' ||'''{{{#fff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국왕}}}''' || ||[[1921년]] [[8월 16일]] ~ [[1929년]] [[10월 3일]]|| ||'''{{{#fff 유고슬라비아 국왕}}}''' || ||[[1929년]] [[10월 3일]] ~ [[1934년]] [[10월 9일]]|| || '''서명''' ||[[파일:알렉산다르 1세(유고슬라비아) 서명.svg|width=100px&bgcolor=#fff]]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가문'''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카라조르제비치 가문]] || || '''아버지''' ||[[페타르 1세]] || || '''어머니''' ||[[몬테네그로 공국|몬테네그로]]의 조르카[* 몬테네그로 국왕인 [[니콜라 1세]]의 딸.] || || '''배우자''' ||[[루마니아 왕국|루마니아]]의 마리아 ,,(1922년 결혼),, || || '''자녀''' ||[[페타르 2세]], 토미슬라브, 안드레이 ||}}}}}}}}} || [목차] [clearfix] == 개요 ==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제2대 국왕. 남슬라브 민족을 통합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세운 공로로 통일왕 알렉산다르(Александар Ујединитељ)라는 별명이 있다. == 생애 == [[카라조르제비치 왕조]] 출신이다. 부왕 [[페타르 1세]]가 [[오브레노비치 왕조]]에 밀려 망명객이던 시절인 [[1888년]]에 [[몬테네그로 공국]] [[체티네]]에서 태어났다. 2살 때 몬테네그로 공주이던 모친을 잃고, 아버지에 의해 [[스위스]]와 [[러시아]]에서 교육을 받았다. 본래는 차남이라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낮았으나, 원래 왕태자였던 형 조르제가 부왕과 의견 대립이 심한데다 정신질환 때문에 폭력적인 성격이었고 결정적으로 시종을 죽이는 바람에 폐태자당하자[* 처음에는 왕실차원에서 사실을 은폐하려 했으나 이런 사실이 언론에 유출되었고, 여론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왕태자 자리를 내려놓았다. 이후 여러 번 폐태자 처분을 번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람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영국에 망명 중인 조카 페타르 2세 전 왕을 비롯한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의 직계 왕족들을 모두 [[국적박탈]](2015년 세르비아 대법원에 의해 불법 무효로 판시됨), 입국금지를 시켰을 때 일부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의 방계 일족들과 함께 유고슬라비아에 남았고 천수를 누리다 1972년에 사망했다.], 1909년에 대신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다. 왕위 계승자로 지명된 이후 1912~13년의 두 차례의 [[발칸 전쟁]] 때는 세르비아군의 주요 지휘관으로서 [[오스만 제국]]과 [[불가리아 왕국]]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어 세르비아가 영토를 크게 확장할 수 있게 공을 세웠다. [[1914년]]부터는 노령의 아버지 [[페타르 1세]]를 대신해 섭정을 시작했는데 같은 해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졌을 때에는 세르비아군 총사령관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침공을 격퇴했고 [[독일 제국]]과 불가리아의 개입으로 전 국토가 [[동맹국]]에 점령당한 이후에도 항복을 거부하고 [[그리스 왕국]] [[코르푸]] 섬에서 망명 정부를 이끌며 항전을 진두지휘했다. 전쟁이 끝나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왕국]][* 이때 몬테네그로 국왕 [[니콜라 1세]]는 알렉산다르 1세의 외할아버지였다. ~~[[페타르 1세|사위]]에게 쫓겨났다.~~], 그리고 합스부르크 치하의 모든 남슬라브 민족을 하나로 통합한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 출범하자 왕태자가 되었고 [[1921년]] 아버지가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으나, 1928년 6월 20일 크로아티아 농민당 당수 [[스체판 라디치]]가 총격을 당해[* 그것도 대낮에 국회의사당 안에서 다른 의원의 권총에 맞았다고 한다.] 8월 8일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다. 알렉산다르 1세는 라디치 암살로 시작된 정치 혼란과 불안정한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1929년 이른바 '1월 6일 체제'[* 1921년 헌법 폐지]라는 [[전제군주제]]로 체제를 전환했으나 의회와 갈등이 심했다. 전제군주정이라니 언제적 시대 이야기를 하냐 싶기도 하지만 20세기 초까지 세계 각지에서 [[전제군주제]] 국가는 상당히 많았다. 거의 전제군주정이나 다름없던 [[독재]]국가들도 즐비했고. 같은 해 10월 3일에는 정식으로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선포하고 1931년 9월 3일 신헌법을 반포했다. 1920년대 유고 정치판이 워낙 혼란스러웠던지라 처음에는 그럭저럭 지지를 받았으나 [[세계 대공황]]을 타고 불만이 높아져 1932년 들어 민주주의로 복귀하라는 요구가 강해졌고, 알렉산다르 1세 본인도 민주 체제로 복귀를 진지하게 고려했으나 뭔가 하기도 전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1934년]]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프랑스 외무장관 장 루이 바르투(Jean Louis Barthou, 1862 ~ 1934, 한때 프랑스 총리를 역임)과 회담하던 중 [[불가리아인]] 블라도 체르노젬스키[* 1897 ~ 1934. [[마케도니아]]를 불가리아의 영토라 주장하던 과격파이자 [[우스타샤]]와 깊은 연관이 있는 단체 IMRO([[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의 회원이다. 그는 당시 회담을 하던 프랑스의 루이 바르투 외무장관도 함께 죽였으며, 암살 직후 분노한 프랑스 군중에게 맞아죽었다.]에게 [[암살]]당한다.[* 이때 알렉산다르 1세는 나름대로 자국의 권위와 힘을 보이기 위해 자국 해군의 기함인 [[구축함]] [[두브로브니크(구축함)|두브로브니크 호]]를 타고 프랑스로 갔다. 물론 왕이 가서 암살당하는 바람에 권위는 나발이고 함상에 있는 해군 장교와 수병들이 책임을 물을 것을 두려워해 난리였다고.(결국 유해를 싣고 오게 되었다.)] [[유럽]]의 군주 가운데 암살당한 최후의 국왕이다. 프랑스 외무장관과의 만남 필름을 찍다가 암살당했기에 아직도 암살 당시의 필름이 남아 있다. [youtube(6R3dVZdFxxo)] 암살이 촬영된 영상. 58초 쯤에 등장해서 1분 10초 쯤에 국왕 옆에 앉은 인물이 루이 바르투. 그는 총에 맞고 차에서 내려 병원에 옮겨졌지만 1시간 후에 죽었다. == 기타 == 한때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차녀인 [[타티아나 니콜라예브나 여대공|타티아나 여대공]]과의 결혼에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으로 폐위된 니콜라이 2세 일가가 모두 총살당하면서 이 혼담은 무산되었다. 알렉산다르 1세도 그 소식을 듣고 꽤 충격받았다는 모양. 본래 타티아나 여대공은 러시아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미인이어서 유럽의 내로라하는 왕국에서 많은 혼담이 오가는 촉망받는 신붓감이었는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까지도 알렉산다르와 타티아나가 서로 편지를 교류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둘의 혼담은 제법 진척도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22년]]에 [[루마니아 왕국]]의 공주 마리야[* 1900~1961, [[페르디난드 1세]]와 [[마리 알렉산드라 빅토리아|에든버러의 마리]] 사이의 3남 3녀 중 차녀(셋째)]와 결혼해서 3명의 아들을 두었고, 알렉산다르 1세가 프랑스에서 살해당한 이후 그의 장남 페타르가 [[페타르 2세]]로 즉위하였다. 여담으로 가슴에 독수리 [[문신]]이 있었으나[[http://www.blic.rs/vesti/reportaza/kralj-aleksandar-imao-tetovazu-velikog-orla/2z3r1v9|#]], 그 사실은 비밀로 유지되었다. === 자녀 ===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 '''1남''' || [[페타르 2세]][br]{{{-2 (Petar II)}}} || [[1923년]] [[9월 6일]] || [[1970년]] [[11월 3일]] || [[그리스 왕국]]의 알렉산드라[br]슬하 1남 || || '''2남''' || 토미슬라프[br]{{{-2 (Tomislav)}}} || [[1928년]] [[1월 19일]] || [[2000년]] [[7월 12일]] || [[바덴]]의 마르가리타[br]슬하 1남 1녀[br][br]린다 메리 보니[br]슬하 2남 || || '''3남''' || 안드레이[br]{{{-2 (Andrej)}}} || [[1929년]] [[6월 28일]] || [[1990년]] [[5월 7일]] || [[헤센 방백국|헤센]]의 크리스티나 마르그레테[br]슬하 1남 1녀[br][br]라이닝겐의 키라 멜리타[br]슬하 2남 1녀[br][br]에바 마리아 안젤코비치[br]자녀 없음 || [[분류:유고슬라비아 국왕]][[분류:암살된 인물]][[분류:객사한 인물]][[분류:카라조르제비치 가문]][[분류:1888년 출생]][[분류:1934년 사망]][[분류:체티네 출신 인물]][[분류:오플렌추 교회 안장자]][[분류:레지옹 도뇌르 훈장/그랑크루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