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다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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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왕국 제2대 국왕
알렉산다르 1세
Александар 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ralj_aleksandar1.jpg
출생
1888년 12월 16일
몬테네그로 공국 체티네
사망
1934년 10월 9일 (향년 45세)
프랑스 마르세유
재위기간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국왕
1921년 8월 16일 ~ 1929년 10월 3일
유고슬라비아 국왕
1929년 10월 3일 ~ 1934년 10월 9일
서명
파일:알렉산다르 1세(유고슬라비아)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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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카라조르제비치 가문
아버지
페타르 1세
어머니
몬테네그로의 조르카[1]
배우자
루마니아의 마리아 (1922년 결혼)
자녀
페타르 2세, 토미슬라브, 안드레이

1. 개요
2. 생애
3. 기타
3.1. 자녀



1. 개요[편집]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제2대 국왕.

남슬라브 민족을 통합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세운 공로로 통일왕 알렉산다르(Александар Ујединитељ)라는 별명이 있다.


2. 생애[편집]


카라조르제비치 왕조 출신이다. 부왕 페타르 1세오브레노비치 왕조에 밀려 망명객이던 시절인 1888년몬테네그로 공국 체티네에서 태어났다. 2살 때 몬테네그로 공주이던 모친을 잃고, 아버지에 의해 스위스러시아에서 교육을 받았다.

본래는 차남이라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낮았으나, 원래 왕태자였던 형 조르제가 부왕과 의견 대립이 심한데다 정신질환 때문에 폭력적인 성격이었고 결정적으로 시종을 죽이는 바람에 폐태자당하자[1][2], 1909년에 대신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다.

왕위 계승자로 지명된 이후 1912~13년의 두 차례의 발칸 전쟁 때는 세르비아군의 주요 지휘관으로서 오스만 제국불가리아 왕국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어 세르비아가 영토를 크게 확장할 수 있게 공을 세웠다. 1914년부터는 노령의 아버지 페타르 1세를 대신해 섭정을 시작했는데 같은 해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졌을 때에는 세르비아군 총사령관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침공을 격퇴했고 독일 제국과 불가리아의 개입으로 전 국토가 동맹국에 점령당한 이후에도 항복을 거부하고 그리스 왕국 코르푸 섬에서 망명 정부를 이끌며 항전을 진두지휘했다.

전쟁이 끝나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왕국[3], 그리고 합스부르크 치하의 모든 남슬라브 민족을 하나로 통합한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 출범하자 왕태자가 되었고 1921년 아버지가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으나, 1928년 6월 20일 크로아티아 농민당 당수 스체판 라디치가 총격을 당해[4] 8월 8일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다.

알렉산다르 1세는 라디치 암살로 시작된 정치 혼란과 불안정한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1929년 이른바 '1월 6일 체제'[5]라는 전제군주제로 체제를 전환했으나 의회와 갈등이 심했다. 전제군주정이라니 언제적 시대 이야기를 하냐 싶기도 하지만 20세기 초까지 세계 각지에서 전제군주제 국가는 상당히 많았다. 거의 전제군주정이나 다름없던 독재국가들도 즐비했고. 같은 해 10월 3일에는 정식으로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선포하고 1931년 9월 3일 신헌법을 반포했다. 1920년대 유고 정치판이 워낙 혼란스러웠던지라 처음에는 그럭저럭 지지를 받았으나 세계 대공황을 타고 불만이 높아져 1932년 들어 민주주의로 복귀하라는 요구가 강해졌고, 알렉산다르 1세 본인도 민주 체제로 복귀를 진지하게 고려했으나 뭔가 하기도 전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1934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프랑스 외무장관 장 루이 바르투(Jean Louis Barthou, 1862 ~ 1934, 한때 프랑스 총리를 역임)과 회담하던 중 불가리아인 블라도 체르노젬스키[6]에게 암살당한다.[7] 유럽의 군주 가운데 암살당한 최후의 국왕이다.

프랑스 외무장관과의 만남 필름을 찍다가 암살당했기에 아직도 암살 당시의 필름이 남아 있다.


암살이 촬영된 영상. 58초 쯤에 등장해서 1분 10초 쯤에 국왕 옆에 앉은 인물이 루이 바르투. 그는 총에 맞고 차에서 내려 병원에 옮겨졌지만 1시간 후에 죽었다.


3. 기타[편집]


한때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차녀인 타티아나 여대공과의 결혼에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으로 폐위된 니콜라이 2세 일가가 모두 총살당하면서 이 혼담은 무산되었다. 알렉산다르 1세도 그 소식을 듣고 꽤 충격받았다는 모양. 본래 타티아나 여대공은 러시아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미인이어서 유럽의 내로라하는 왕국에서 많은 혼담이 오가는 촉망받는 신붓감이었는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까지도 알렉산다르와 타티아나가 서로 편지를 교류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둘의 혼담은 제법 진척도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22년루마니아 왕국의 공주 마리야[8]와 결혼해서 3명의 아들을 두었고, 알렉산다르 1세가 프랑스에서 살해당한 이후 그의 장남 페타르가 페타르 2세로 즉위하였다.

여담으로 가슴에 독수리 문신이 있었으나#, 그 사실은 비밀로 유지되었다.


3.1.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페타르 2세
(Petar II)
1923년 9월 6일
1970년 11월 3일
그리스 왕국의 알렉산드라
슬하 1남
2남
토미슬라프
(Tomislav)
1928년 1월 19일
2000년 7월 12일
바덴의 마르가리타
슬하 1남 1녀

린다 메리 보니
슬하 2남
3남
안드레이
(Andrej)
1929년 6월 28일
1990년 5월 7일
헤센의 크리스티나 마르그레테
슬하 1남 1녀

라이닝겐의 키라 멜리타
슬하 2남 1녀

에바 마리아 안젤코비치
자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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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처음에는 왕실차원에서 사실을 은폐하려 했으나 이런 사실이 언론에 유출되었고, 여론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왕태자 자리를 내려놓았다. 이후 여러 번 폐태자 처분을 번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2]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람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영국에 망명 중인 조카 페타르 2세 전 왕을 비롯한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의 직계 왕족들을 모두 국적박탈(2015년 세르비아 대법원에 의해 불법 무효로 판시됨), 입국금지를 시켰을 때 일부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의 방계 일족들과 함께 유고슬라비아에 남았고 천수를 누리다 1972년에 사망했다.[3] 이때 몬테네그로 국왕 니콜라 1세는 알렉산다르 1세의 외할아버지였다. 사위에게 쫓겨났다.[4] 그것도 대낮에 국회의사당 안에서 다른 의원의 권총에 맞았다고 한다.[5] 1921년 헌법 폐지[6] 1897 ~ 1934. 마케도니아를 불가리아의 영토라 주장하던 과격파이자 우스타샤와 깊은 연관이 있는 단체 IMRO(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의 회원이다. 그는 당시 회담을 하던 프랑스의 루이 바르투 외무장관도 함께 죽였으며, 암살 직후 분노한 프랑스 군중에게 맞아죽었다.[7] 이때 알렉산다르 1세는 나름대로 자국의 권위와 힘을 보이기 위해 자국 해군의 기함인 구축함 두브로브니크 호를 타고 프랑스로 갔다. 물론 왕이 가서 암살당하는 바람에 권위는 나발이고 함상에 있는 해군 장교와 수병들이 책임을 물을 것을 두려워해 난리였다고.(결국 유해를 싣고 오게 되었다.)[8] 1900~1961, 페르디난드 1세에든버러의 마리 사이의 3남 3녀 중 차녀(셋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