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제프 크라머 (문서 편집) || [[파일:크리머.jpg|width=100%]] || || '''요제프 크라머 (Josef Kramer)''' || [목차] == 개요 == [[독일]]의 [[군인]]. 1907년 11월 10일에 태어나 1945년 12월 13일 숨졌다. [[슈츠슈타펠]] [[대위]]이자 여러 강제수용소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 초기 행적 == [[뮌헨]] 출신인 크라머는 [[1931년]]에 [[나치당]]에 입당하여 [[1932년]]에 친위대 대원이 되었다. [[1934년]]에 다하우 강제수용소의 간수가 된 후 급속히 승진하여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 및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의 부소장으로 취임했다. == 강제수용소에서의 행적 == [[1940년]]에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루돌프 회스]] 소장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1941년]] [[4월]]에 나쉬바일러 슈트르호프 강제수용소의 소장으로 취임한 크라머는 [[1942년]]에 친위대 대위로 승진하여 [[1944년]] [[5월]]부터 [[1944년]] [[12월]]까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 관리자로 일했다. [[1944년]] [[12월]]부터는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의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베르겐-벨젠 수용소는 매우 위생상태가 나빴는데 이곳에 수용된 사람들은 대부분이 티푸스 등의 감염 및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안네의 일기]]로 잘 알려진 [[안네 프랑크]]도 그 희생자 중의 하나다. 전후 베르겐-벨젠에서 해방된 수용자들이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나갈 방법은 이 굴뚝 외엔 없다>라고 소각로를 가리킨 말은 매우 유명하다. == 전후 재판과 최후 == 벨젠의 야수로 칭해졌던 크라머는 종전 후 영국군에 의해 체포되어 다른 44명의 수용소 반원들과 함께 유죄를 인정받아 영국군사법정에서 [[1945년]] [[11월]]에 사형선고를 받고 [[12월 13일]], 하멜른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분류:1907년 출생]][[분류:1945년 사망]][[분류:뮌헨 출신 인물]][[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나치당원]][[분류:친위대(나치 독일)/인물]][[분류:교수형된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