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기룡 (문서 편집) [[분류:임진왜란/군인]][[분류:조선의 무관]][[분류:하동군 출신 인물]][[분류:진주 정씨]][[분류:1562년 출생]][[분류:1622년 사망]]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의 소설, rd1=정기룡(소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doopedia.co.kr/121109018069220_thumb_400.jpg|width=100%]]}}} || ||<-2> '''정기룡 동상''' || {{{+1 鄭起龍}}} [[1562년]]([[명종(조선)|명종]] 17) [[5월 26일]] ~ [[1622년]]([[광해군]] 14) [[4월 8일]] (향년 59세) [목차] == 소개 == [[임진왜란]]에 활약했던 [[조선]]의 장수. 본관은 [[진주 정씨|진주]](晉州)로 훗날 곤양 정씨(昆陽 鄭氏)[* 2000년 [[인구조사]]에서 450가구 1,416명으로 나타난 희귀 본관이다.]의 시조가 된다. 자는 경운(景雲) , 호는 매헌(梅軒), 초명은 정무수(鄭茂壽). 후에 [[영조]] 대에 와서 충의공(忠毅公)으로 격상되었다. == 생애 == 1562년 5월 26일 [[경상도]] [[사천시|곤양현]] 금양면 중평리(현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하동)|금남면]] 중평리)[* 인근의 대송리·대치리·덕천리와 함께 [[진주 정씨]] 집성촌이다.]의 몰락한 양반가[* 진주 정씨 자체가 [[계유정난]]과 [[갑자사화]]에 박살난 가문이다.]에서 정호(鄭浩)의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는 정철석(鄭哲碩), 조부는 정의걸(鄭義傑)인데, 정기룡이 출세한 이후 3대가 각각 [[호조(조선)|호조]] [[참판]](종2품), [[호조판서]](정2품), [[의정부]] [[좌찬성]](종1품)에 추증되었다. 몰락한 양반가의 자제로 태어나긴 했지만 그의 아내 [[예천 권씨]][* 권홍계(權弘啓)의 딸이다.]가 그의 관상과 됨됨이를 보고 그를 성심껏 내조했다고 한다. 25세 되던 1586년([[선조(조선)|선조]] 19), 그가 무과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갈 때 [[선조(조선)|선조]]가 자다가 꿈에서 종각에서 자는 [[용]]을 보았고, 다음날 종각에 가서 있는 사람을 데려오라 했더니 정기룡이 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별시 무과에 병과 4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U_6JOb_1586_323004|급제하자]], 선조가 친히 정기룡이란 이름을 하사했다고 한다. === [[임진왜란]]에서의 활약 === 실록에 따르면 [[명나라]]의 장수 [[마귀(명나라)|마귀]]는 [[이순신]], 정기룡, [[한명련]], [[권율]]을 [[조선]]에서 제일의 장수로 꼽았다. 기준이 딱 나뉘는데 이순신과 권율은 바다와 육지에서 일군을 이끄는 원숙한 지휘관이고 한명련과 정기룡은 저돌적인 용맹으로 출세한 30대 젊은 장수들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손꼽히는 용장은 개전 초에 전사한 [[신립]]을 제외하고, [[황진]], [[장윤]], [[이종인]] 등이 들어가는데, 정기룡도 이들 못지 않은 혁혁한 무용을 보여주었다. 세간에 알려진 약력에 의하면 상관인 우방어사 조경을 따라 종군, 첫 전투인 [[거창]]에서 [[기병]] 수십기를 거느리고 왜군 500여명을 격파하고 [[금산 전투]]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단기 필마로 구출한 뒤 1592년 9월에 곤양의 수성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정기룡은 "[[조운|조자룡]]"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실제 공식적인 기록에서 정기룡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이보다 4개월이나 빠른 1592년 5월. 참패로 유명한 [[용인 전투]] 초기에 극소수밖에 참가하지 못한 경상도 병력 중에서 유일하게 전과를 올린 군관이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2일 ~ 3일 전 단신으로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중 소규모 일본군과 마주치자 이를 '''단신!'''으로 공격해서 격파한 것이다. 당시 경상 감영 아전으로 감사 김수를 수행하던 아전이 남긴 기록 <정만록>에 실린 경상 감사의 장계 사본[* 실록에는 접수 사실만 보고되고 내용이 기록되지 않았는데, 같은 실록에서 원균의 적전 도주 이야기가 언급됐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에서 처음 나온다. 훗날 우방어사 조경을 따라 [[금산 전투]]에 참가하게 된 것도 이때의 공훈이 인정된 결과였다. 이 전과에 자극받은 타도 감사들이 세력도 약한 경상 감영만 공훈을 세우게 내버려둘 수 없다며 진격을 서두르다가 용인에서 크게 패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파일:external/photo-media.hanmail.net/20051130100812.384.3.jpg]] 감사군(敢死軍)이라는 부대를 이끌었으며 [[명나라]]에서 들어온 [[편곤]]을 무기로 마상에서 편곤을 휘두르며 60전 전승이라는 기록을 만들었다. === 전후 === 1601년 울산부사를 역임했고 1610년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었다. 일본과의 외교는 재개되었지만 임진왜란의 여파가 워낙 엄청났던지라 정기룡은 일본이 다시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보직되었다. == 기타 == * [[광해군]] 때 통제사에 자리에 오르지만 [[후궁]]들에게 뇌물을 써서 승진했다는 소리도 있고 반역에 가담했다는 소리가 있으나 무죄로 판명되었다. * 관련 유적은 [[경상남도]] [[하동군]]과 [[경상북도]] [[상주시]]에 있다.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현재도 [[정(성씨)|진주 정씨]] 집성촌이다.]는 정기룡 장군의 고향으로, 그의 탄신지에는 생가와 사당인 경충사(景忠祠) 및 관련 문화재 세 점이 전해지고 있다. 상주시에는 정기룡의 묘소와 사당인 충의사(忠毅祠)가 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2&aid=0000754858|관련 기사]] 상주시에서는 정기룡 장군을 소재로 뮤지컬을 제작한 적도 있다. * 은근히 대한민국 육군에서 밀었던 인물인 거 같은데, 해군이 이순신이라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으니 그런 거 같다. 실제로 2010년대 초반에 육군에 비치된 책자에서 정기룡을 이순신과 동급인 조선의 수호신인 것마냥 설명하는 글이 실린 적이 있다. 이 항목만 잘 읽어봐도 알 수 있듯이 무리수인 주장이라서 별 호응은 없었던 거 같지만... [youtube(-SoUTNaOyjc)] * [[조선왕조 오백년]]에도 5부 임진왜란에서 출연. 담당배우는 '''[[이인성(성우)|이인성]]'''. --하도 연기자의 목소리가 튀다 보니 '''[[뚱이|도저히]] [[커리지|진지한]] [[내레이터(개구리 중사 케로로)|분위기로]] [[괴짜가족|감상하기]] [[고길동|힘들다는]] [[보거스|사람]]'''도 많은 듯 하다....-- * 2020년 그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 전기역사소설 [[정기룡(소설)|정기룡]]이 출간되었다. == 같이보기 == * [[정기룡(소설)]] * [[김덕령]] [include(틀:포크됨2, title=정기룡, d=2023-01-18 05:43:27)]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