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린 (문서 편집) [include(틀:명사)] {{{+1 陳璘}}} (Chén Lín, 천린) 1543년 ~ 1607년 [목차] [clearfix] == 개요 == [[명나라]]의 장수. 자는 조작(朝爵). 호는 용애(龍厓). 시호는 충강(忠康). 전공은 뛰어났으나 탐욕스러운 인물로 뒷말이 많았다. 한국에서는 [[정유재란]] 당시 [[조선]]에 원군으로 파견되어 [[이순신]]과 함께 싸운 인물로 유명하다. == 생애 == === 군복을 입고 공을 세우다 === 광동성 옹원현 사람으로 가정제 말에 지휘첨사가 되었으며, 영덕현의 도적을 토벌하는 데 참가하여 광동수비가 되었다. 도적 뇌원작을 평정하고 영동의 도적들을 물리쳤으며, 만력제 초에는 고요현의 도적 등승룡, 계양현의 도적 종월천 등을 평정했다. 문무를 겸비한 유능한 무장으로, 특히 남방 평정에서 많은 공훈을 세웠다. 여러 차례 승진해 도지휘첨사, 첨서광동도사에 임명되었으며, 이성립이 도적을 평정하기 위해 제양보를 공격했지만 패하자 그의 뒤를 이어 참전, 도적을 평정하고 조경 유격 장군, 고주 참장이 되었다. 남방의 묘족을 정벌해 부총병으로 옮겨 동안첨장사가 되었지만 그 곳에서 살아남은 자가 백성을 살해한 일이 일어나 책망을 받아 죄를 얻었으며, 주문달과 함께 석우, 청수의 여러 망루를 깨뜨려 36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용서를 받았다. 동안현이 평정되자 토목 공사를 일으켜 영채, 관성, 사당 등을 지었는데, 재물을 반출하는 것도 금지해 병졸들이 반란을 일으켜 주현을 약탈하자 나응학에게 탄핵받아 관직이 박탈되었다가 적을 사로잡으면서 죄가 사해져 낭산 부총병이 되었다. 모략이 있어 병사를 잘 부렸지만 탐욕이 심해 다시 탄핵을 받고 관직을 빼앗겼으며, 조정의 선비들은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겼지만 천거하지는 않았다. 탐욕이 심했다는 평가는 최근에 중국 측과의 사료 검토 결과 그가 시행했던 토목공사 등의 사업들은 전몰한 군사들과 백성들을 위한 기간시설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는 상반된 평가가 나오고 있다. 다른 기록에서도 조선에 참전했을 때 왕실에서 보내준 선물들을 대부분 거절하고 종이 정도만 받았다고 한다. 전략적 차원이기는 하지만 소극적으로 일관한 다른 명나라 장수들과 달리 진린은 왜적을 토벌하겠다는 의지가 아주 강력했고, 그로 인해 이순신도 그를 믿고 함께 작전에 나갈 수 있었다. 진린이 국내에서 이토록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은 것은 진린이 다른 명나라 장수들과 달리 이순신을 명나라에 천거까지 원했을 정도로 경애했기 때문에 그동안 이순신을 의심하고 시기했던 서인들의 행적들이 무안해지기 때문에 일부러 진린을 깎아내려 기술했다는 주장도 있다. === [[정유년]], 조선으로 === 1592년에 적에게 패한 일이 참작되어 관직이 회복되어 광동의 병사 5천명을 이끌고 조선을 구원했으며, 1593년 2월에 어왜총병관이 되어 마귀, 유정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병사 3천여 명, 전함 수백 척을 나누어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해구에 포진시켰다. 어위 도총관 겸 전군도독부도독(前軍都督府都督)이 되어 수군 5천 명을 이끌고 [[명량해전]] 이후 [[이순신]] 함대에 합류하였다. [[징비록]]에 의하면 [[류성룡]]을 비롯한 많은 조정의 대신들이 '충무공이 진린의 횡포[* 충무공을 만나기 이전에는 조선 관리를 폭행하고 그의 목에 밧줄을 묶고 말에 매달아 질질 끌고가서 거의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가 있다.]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고, 분명 명나라 군대와 갈등이 생길테니 패하지 않을 수 없을것이다'라며 우려를 표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이순신은 진린이 온다는 말에 즉각 군대를 동원해 고기와 생선 등을 푸짐하게 차리고[* 충무공의 군대는 조정의 지원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국빈급 인사임에도 스스로 챙겨야만 했던 것.] 진린뿐 아니라 모든 명군의 장병들까지 배부르고 취하게 하여 인심을 샀고, 섬에 왜구가 왔다는 말에 그들을 격퇴한 후 수급 40개를 진린에게 모두 바쳐 더욱 관계를 돈독히 했다고 한다.[* 당시 조선에서 왜구의 수급은 돈으로도 보상을 얻을 수 있을 뿐더러, 일정 이상 되면 노비조차 양반까지 될 수 있으며 장수의 경우 전공의 증거가 되어 승진에 도움이 되는 엄청난 물건이었다. 괜히 조선인 시체의 수급으로 구라치려다 귀고리 자국 때문에 들통났다는 이야기가 나오는게 아니다. 평소 충무공이 수급을 얻으려다 적을 놓친다며 수급 얻으려 하는 걸 말렸다는 이야기가 있고, 또 바다 전투의 특성상 수급을 구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진린의 마음을 사고자 단단히 준비했다고 볼 수 있다. 이순신이 마냥 꼿꼿하기만 한 꼰대가 아니라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발휘할 수 있는 [[처세술]]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그걸 자기 보신 같은 데는 전혀 안 쓰고 오로지 더 많은 일본군을 죽이고 더 확실한 승리를 가져오기 위해서만 발휘한 괴인이었음을 증명하는 일화다. 이순신의 경우 과거 덕수 이씨 종친이자 무관 인사권을 갖고 있던 병조판서 율곡 이이가 자신을 보자고 하는데도, 사적으로 만나면 인사 청탁으로 보일 수 있으니 만남을 거부했다는 일화나, 감독관인 서익이 동헌 내 목재를 요구하는데도 규정을 들어 반대했다가 인사 불이익을 당한 일화 등이 있다. 결국, 이순신은 그냥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 심리에 정통하고 처세술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이를 오직 국가와 공익을 위해서만 쓰고 개인적 이익에는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명확하다. 충무공은 역시 단군 이래 다시 없을 진정한 괴인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이순신 장군과 만나기 전에 능력이 뛰어났지만 탐욕을 일삼는 장수였으며, 이순신 장군이 처음에 명 해군의 행패를 핑계로 본진에서 백성들과 함께 떠나려는 척을 해서 그에게서 명 해군의 지휘권까지 넘겨받는가 하면, 이후 진린에게 자신이 세운 공로를 전부 넘겨주는 식의 '채찍과 당근'을 병용하여 그를 마음으로 감복시켜 진심으로 존경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바로 옆에서 이순신의 지휘력과 인품을 직접 겪어서인지 처음 안하무인의 모습을 보이던 진린이지만 점차 이순신에게 감복해나간다.[* 그가 탐욕스러웠단는 평가는 최근의 연구를 통해 상반된 해석이 나오고 있으므로 좀 더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개인의 능력으로 출세한 인물이라 사람을 평가하는 눈이 더 엄격했을 것이다. 진린은 이순신과 특히 많은 교분을 쌓은 인물로 이순신을 [[제갈량]]에 비유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라는 최고의 찬사를 하는가 하면 조선군 장수를 당시 깔보고 무시하던 다른 명군과 달리 이순신 장군을 이야(李爺) 혹은 노야(老爺)[* 손윗사람을 표현할때 라오예(老爺)라고 한다. 우리식으로 따지면 '어르신' 정도로 높여 부른 것이다. 이보다 높은 존칭은 尊,賢이 들어가는 존칭이 많으나, 사실 진린이 이순신보다 2살 많은데 저런 표현했다는 자체가 충분히 높여준 것이며, 진린의 성정과 공적을 보았을 때 그 정도 예를 보였다는 점에서 대단한 호의라 할 수 있다. ]라는 호칭으로 불렀으며, 자신이 탄 가마가 감히 이순신이 탄 가마보다 먼저 나가는 일이 없도록 했을 정도이다.[* 이것은 조선왕조실록에 전할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로 진린이 이순신에게 얼마나 존경을 표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건 당시 [[동아시아]] 정치 관계 상 엄청난 일이다. 뭘 해도 [[제국|황제국]]인 [[명나라]]고 [[조선]]은 명시적으로 [[사대주의]], 즉 명나라의 제후국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명나라]] [[황제]]의 대리인 자격으로 참전한 진린이 제후국 [[조선]]의 [[이순신]]한테 '''[[의전]] 선순위를 내준 것'''인데, 진린이 진심으로 이순신한테 감복해서 가능했던 일이다.] 이에 그치지않고 진린은 이순신에게 조선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살 바에, 함께 명국으로 가서 황상을 모시며 부귀를 누려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이순신 장군에게 푹 빠져있던 명나라 사람 중 하나였다.[* 당시 명군은 조선을 제후국이라 하여 신하들은 물론 왕인 선조까지 무시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의 명성과 업적이 임진년부터 자자했고, 특히나 조선수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명량 해전|울돌목에서 기적의 승리를 일구었으니]] 이순신에 대한 명군의 평가는 칭찬 일색이었다. 경리 양호를 비롯하여, 군문 형개와 같은 고위직은 물론 진린과 같은 일선에서 싸우는 명군 장수들에게도 이순신은 [[선조(조선)|누구와 달리]] 인정을 받았고, 이 점이 더더욱 [[선조(조선)|이 누군가가]] 이순신을 질투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현대 기준으로 봐도 외교 결례다. 미해군 [[제7함대]] 사령관이 한국 대통령을 쌩까고 한국군 해군 장성한테 두 손으로 공손히 악수하고 '''Sir'''라고 높여 부르며 시민권 추천과 함께 미해군으로 스카웃하려고 시도한 모양새이니. 선조가 현대의 대통령이었다고 해도 꼬투리를 잡아서 보직해임하고 싶었을 것이다. 말만 안 했을뿐 일국의 국가원수더러 사실상 "좆까"라고 선언한거나 마찬가지였으며, 명나라 본국에서도 진린이 이순신의 공적을 상세히 보고하며 칭찬하는 상황이어서 '''아무도 의전관계 막나가는 진린을 제지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이런 의전관계 결례도 그 상대가 [[이순신]]이었다는 점 하나만으로 용납된것. 또 선조가 명국한테 찍힌 것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선조는 이순신과 한편이었던 진린까지 깎아내리는 옹졸함까지 보였다.] 게다가 조선 수군의 공적을 가로챘다고 하지만 이순신 입장에선 명성을 마구마구 쌓았다가 선조에게 죽을 뻔[* 당시 선조는 이순신이 난세의 영웅이나 구국의 명장으로 추앙받는 걸 극도로 경계했기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징계나 편애 등을 자주 했다.]한 이후로 오히려 공을 드러내길 꺼리게 됐기에 부담없이 자기 공적을 진린에게 퍼주다시피 넘겨주곤 했었다.[* 물론 이것과는 별개로 자기 부하들의 공훈은 꼬박꼬박 챙겨줬다.] 그래도 만일을 위해 이순신은 장계를 올릴 때 아예 진린의 공을 적은 거짓 장계와 실제 공로를 적은 진짜 장계 두 개를 올려서 조정에서도 상황은 다 파악하고 있었고, 나중에 명나라에서 진린이 조선군의 전과를 뺏었다는 소문을 듣고 진상 조사를 할 때 진린이 공을 세운 내용의 가짜 장계를 보여주어 넘어갔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3110004_005|#]] 일설에는 선조와 이순신 간의 사이가 안 좋은 것을 알고 이순신은 진린의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기에 [[위악자|의도적으로 이순신의 공적을 깎아]] 이순신을 선조의 질투로부터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보호하고 자신은 실리를 챙겼다고도 한다. 반면 명나라에는 이순신의 공적을 상세히 잘 보고했다고 한다. 이순신도 이런 진린의 의도를 잘 알았던 것 같다. 심지어 진린은 천문을 보고 이순신의 안위가 걱정되어 제갈무후의 고사를 따라 제단을 쌓아 명을 늘려보라고 간곡히 청하기도 했다. 물론 이순신은 자신의 재주와 충심이 무후만 못하니 아니함만 못하다고 주저하였다. 성현에 준하다고 평을 받는 제갈공명에 빗댈 정도이니 이순신에 대한 그의 존경심이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할만하다. [[노량 해전]]에서 명군은 왜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본토로 내쫓는다는 전략 목표를 달성했기에 전투 참여를 주저하였으나, 진린은 드물게 강경파에다가 그간 이순신에게 받은 것이 많았고 개인적인 존경심도 있었기에 왜군과 전투를 벌인다. 전면으로 돌격했기에 진린과 부장인 등자룡의 판옥선은 왜선에 포위되었고, 등자룡은 구출되기 전에 일본군이 공격해와 [[백병전]]에 휘말려서 싸우다가 전사한다. 적 왜선에 포위된 진린을 구하다가 이순신은 전사하게 되고 전투가 끝난 후 진린은 이에 사례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이순신은 전사하고 난 후였다. 이 때 이순신의 죽음을 알자 땅바닥에 주저앉아 "어른께서 오셔서 나를 구해주었는데 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라며 통곡했고, 육군과는 달리 이순신의 지휘 아래에서 꽤나 엄한 군율 때문에 곤욕을 치렀던 명나라 수군 장졸들도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순신의 시신을 수습하여 운구하여 고향 아산을 찾아가고, 그의 가족들에게도 깊은 위로를 전했다. === 명으로 돌아간 후 === 명에 돌아가서는 임진왜란 때의 공적으로 도독동지, 지휘첨사에 임명되고 광동백(廣東伯)에 봉해졌으며, 1년 전인 1597년에 양응룡이 파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1598년에 호광 총병관에 임명되어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했으며, 이어서 피림을 토벌했다. 1605년에는 신첨장관사로 옮겨 산묘를 토벌하는 것에 종군했으며, 광동성을 진무하고 관직을 마쳤다. 파주를 평정한 공으로 좌도독을 더하면서 지휘사에 임명되었으며, 1607년에 세상을 뜨자 묘족을 평정한 공으로 태자소보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강(忠康)을 받았다. 이순신이 조선의 태양과도 같은 성웅이었듯, 그와 뜻을 함께 한 진린도 망해가는 명을 온 몸으로 떠받치던 둘도 없는 충신이었다. == 자손들 == 그의 자손들 역시 충절을 지키며 외적과 끝까지 싸웠다. 진린의 아들 [[진구경]](陳九經)은 이후 나라의 국운을 두고 애산에서 청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그리고 진구경의 아들 진영소는 감국수위사(監國守衛使)로서 임하다가 애산의 비보에 이어 명나라가 멸망하자 [[불구대천|'원수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며 식솔들을 데리고 [[고금도]]를 거쳐 [[해남]]에 정착해 조선에 귀화했다. 그 후 후손들은 광동을 본관으로 하고 진린을 시조로 모시는 광동 진씨가 되었다. 즉, 진린의 직계 후손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이야기. 이런 식으로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현재 해남에 정착한 진씨의 집성촌을 황조리라 하며, 진린을 모시는 사당인 황조별묘(黃朝別廟)도 있다. 2013년 3월에 한국 후손이 광동으로 가서 중국에 남은 후손들과 같이 제례를 올리는 등의 교류가 이어저 오고 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진린과 이순신의 관계를 통해 [[진(성씨)#s-2.2|광동 진씨]]는 이순신의 가문인 [[덕수 이씨]]와의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 대중 문화에서 == ===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드라마)|임진왜란]] === [[국정환]]이 배역을 맡았다. ===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 === 배우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다른 매체들과 달리 (해당 작품의 다른 명나라 측 인물들도 마찬가지지만) 고증에 맞지 않게 청나라 관복에 가까운 형태의 복장으로 나온다. === [[불멸의 이순신]] === [[불멸의 이순신]]에서 등장하며, [[김하균]]이 배역을 맡았다. 왜교성 전투부터 시작하는 1~4화와 후반부의 내용이 미묘하게 다르다. 고니시의 수급 2천 두 제안을 받고 어차피 이긴 전쟁이니 길을 열어주자고 하지만 통제사는 거부. 그러자 진중에 돌아와서 이순신을 영웅이라 찬양하며 그가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한다. 등자룡은 어차피 조선이 이긴 전쟁이고 이순신의 공이 크니 무슨 걱정이냐 하지만 진린은 이순신이 왕과 조정의 음해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더니 전쟁이 끝나도 이순신이 난처한 입장이 될 것을 예견하고 그때 내가 이순신의 손을 잡아줄 거라 말한다. 이후 유정의 모함으로 선전관이 와서 수군 지휘권을 유정에게 넘기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 국왕이 이순신을 버리려 하니 그가 외롭겠다며 탐탁지 않아 하지만 결국 조선을 구하는 것은 이순신이 될 거라 믿는다. 노량 해전이 일어나는 부분도 후반부와는 다르다. 후반에는 노량에서 전투가 일어나게 판을 깔아주고 전투 때 나대용을 수로향도로 앞세워 참전한다. 여기서는 이순신이 이미 명 수군의 피해가 크다며 그냥 왜교로 유인만 해달라고 하지만 이순신을 마음에 들어하는 진린이 그냥 전장(관음포)으로 이동해 참전한다.[* 이때 이순신을 조선 최고의 장수로 띄워주면서 자기도 명나라 최고의 장수라며 자찬한다.] 극중 후반부에는 합류 이전 유정이 이순신을 극찬하자 못마땅해 했으며 합류하자마자 대명의 도독에게 무례하다며 접견나온 군관한테 --행동 대장(?) [[등자룡]]이 대신해서.-- 싸대기를 날리더니 환영회에서 이순신이 직접 따라준 술잔을 이순신 얼굴에다 뿌려버리는 등 온갖 진상과 갑질을 부리는데, 당연하지만 이건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게 너무나 과장된 태도다. 전술했듯 진린은 결코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인물이 아니라는 최근 조사결과도 나오고 있는 실정으며, 더군다나 그가 이순신을 욕보인 불량한 위인이라면 지금까지도 이순신의 덕수이씨 집안과 오랜 교분을 맺을 수 없을 것이다. 도리어 진린은 명나라 장수들 중 누구보다도 이순신을 인정했던 인물이다. 환영회를 끝내고 돌아와 등자룡에게 이순신이 보통 놈이 아니며 유정이 쩔쩔매는 것도 이해가 간다 말하며 12척 함대를 1년도 안 지나서 80척 함대로 만들어낸 것이 엄청난 일이라 환영회에 나온 음식들도 이순신으로서는 최대한 땡긴 것이란 걸 간파했다. 알면서 왜 그랬냐는 질문에는 이순신을 한번 떠보고 그래도 지휘권이 자신에게 있으니 기선 제압을 위해 그랬다고 한다.[* 등자룡은 이순신이 작정하고 진린을 능멸했다고 했지만 진린은 오히려 작정은 내가 했다고 한다.] 후일 절이도 해전에서는 이순신 함대가 왜군을 없애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왜교성 전투에서는 처음에 안 나가겠다고 뻐기다가 칼을 들이대는 이순신을 보고 유정에게 작전을 중지하자고 했는데 유정이 이를 거부하자 유정이 혼자 공을 세우는 것을 경계하여 결국 출전한다. 이후 일본군에게 매수된 유정이 작전을 어길 테니 뒤에서 지켜보라는 전서구를 보냈는데, 이를 유정 혼자서 공을 세우려는 것으로 오해하고서 이순신의 신호를 무시하고 개돌했다가 큰 피해(군사 2천+30척 전선)를 보고 조선 수군에 의해 구출된다. 이때 황세득이 자기 때문에 죽을 자리로 뛰어드는 걸 보고 등자룡과 함께 매우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후 유정이 패전의 책임을 이순신에게 떠넘기는 장계를 올렸다면서 얘기하자 닥치라는 강언까지 하면서 이순신은 끝까지 분전하였고 내 생명을 구했다며 커버하지만, 유정은 황제가 진린 때문에 피해본 걸 알면 또 다시 파직될 거라 협박하자 어쩔 수 없이 넘어간다. 이때 유정이 어차피 전쟁은 끝났고 길만 열어주면 철군하겠다는 일본군에게서 땡길 걸 땡기면서 본국에서 공을 크게 보이게 하자며 실리를 강조하자 매우 탐탁지 않아 하면서 처다본다. 이후로는 일본이 길을 열어달라며 수급과 보물들을 보내자 요시라가 이순신에게 말을 전할 기회를 열어주고서는 스스로도 이순신에게 좋게 끝내자는 식으로 길을 열라고 하지만 이순신은 계속 거부했고, 나중에는 일본이 수급 2,000두를 주기로 했는데 절반을 통제사에게 주겠다며 회유했지만 통제사가 끝까지 거부하자 연합함대의 장으로 길을 열라 명하지만 이것도 거절. 그러자 진린은 이순신을 아둔한 자가 아닌 장수 중의 장수로 생각하기로 하고[* 진린이 아둔한 자vs장수 중의 장수인가로 고민할 때 등자룡은 이순신이 과거 황제의 명마저 거부하고 왜를 공격+진린에게 칼을 들이댄 것을 얘기하며 무슨 장수 중의 장수냐 마음에 안 든다고 하는데도 이를 신경쓰지 않는다.] 받을 걸 이미 다 받아놓고서 고니시에게 길을 열어줄 수 없다고 통보한다. 이미 이순신에게 마음이 가는 와중에 이순신이 새로 뽑은 판옥선 2척을 주면서 잘해보자고 하자[* 전장에서 무기를 나누는 것의 의미(=목숨을 나누는 것)를 설파.] 이에 감복하여 이순신의 뜻대로 하기로 하였다. 유정에게 판옥선을 선물받았다고 밝혔다. 갑자기 사람이 바뀐 것처럼 판옥선까지 받은 마당에 뒤로 뺄 수 없으며 심기일전하여 왜군을 섬멸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선언하며 유정이 그 동안 뇌물로 받은 수급 등으로 전공을 위조한 것을 비꼬며[* 이때 유정이 지난 왜교성 전투에서 수급 2천두를 뇌물로 받고 공격하는 척만 하여 자신이 죽을 뻔했음을 언급하며 극딜을 넣는다.] 자신은 전장에서 떳떳하게 전공을 세우겠다며 훈련을 하러 간다. 진린이 마음가짐을 새로 한 것은 좋았는데 유정은 이 때문에 일본에게서 땡길 걸 못 땡기겠다고 생각했는지 조선 조정에 또 다시 이순신을 모함하여[* 이순신은 피해를 봤지만 그래도 적선 수십척을 부쉈다고 했는데 유정은 자기들이 졌다면서 이순신 탓을 했다.] 선전관이 내려오게 만든다. 노량해전이 일어나기 전 이순신이 찾아와 일본 함대를 끌어들이기 위한 거짓정보를 흘려달라고[* 이순신이 일본군 사자와 자주 만난 것을 알고 있다고 하자 뻘쭘해한다.] 부탁하며 판옥선을 주며 설파한 의미를 주지시키자 한번 해보자고 하며 정보를 흘려[* 이때 리얼하게 행동하는 양 보이기 위해서 수급 1,000 두를 주면 전투에서 빠져주겠다고 하여 수급을 받는다.] 노량에서 전투가 일어나도록 판을 깔아준다. 이때 이순신의 계획을 듣고 유정의 협조 없이 우리끼리만 싸우는 거냐며 자기는 당연히 참전한다는 투로 굴었다. 노량에서는 선물받은 판옥선에 부관(수로향도)으로 나대용을[* 무려 나대용에게 수로향도가 되어 안내해달라고 부탁을 한다.] 끼고 나와서 이순신과 목숨을 나눌 것이라 선언하고서 관음포로 출격한다. 이순신과 본대가 일본함대를 관음포로 몰고오자 위엄 있게 등장하여 전투한다. 할 거 하다가 이순신이 쓰러지자 걱정하는 듯 좋지 못한 표정을 짓고서 극중에서 퇴장.[* 위에는 노량에서 진린이 포위되어 이를 구하다가 이순신이 전사했다고 되있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 드라마에서는 명군이 부정적으로 묘사되면서 진린 또한 그런 기조가 있지만 작중 내용을 보면 적어도 사리분별은 하고 사건의 전개를 파악하는 능력은 있다. 갈수록 이순신에 대한 태도는 호의적으로 변하고 유정처럼 자기랑 반대되는 행동을 했다고 음해하지도 않는다. 이순신이 자기에게 칼을 들이댔지만 자신을 구해주자 이순신탓으로 하자는 유정에게 분노하면서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 그냥 넘어간 것/수급은 받았지만 길은 안 열어준 것/판옥선을 받은 후 해달라는 걸 다 해주는 것/하급 군관인 나대용에게 외관상이나마 부탁을 한 것 등을 보면 양면성이 공존하지만 결국 이순신의 사람이 되는 인물이다. 사족으로 굳이 아쉬운 점을 꼽자면 유정과 대등한, 양호 바로 다음 급의 천장인 진린이 조정에서 내려온 선전관을 황제의 권위를 업고 있는 천장의 권위로 찍어눌렀다면 선전관이나 조정이 어찌하지 못하였을 텐데 극 전개를 위해서인지 그런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진린이 조선의 선전관을 어찌하지 못한 건 고증에 맞는게 당시 명나라 조정은 파견장수들에게 조선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기에 그런 점이 있으며 선전관 파견은 엄밀히 말하면 조선의 내정으로 진린이 천장의 권위로 선전관을 찍어내린다면 이건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게 되는 것으로 실제로 명나라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한 건 경리 양호가 선조에게 이순신의 품계를 올려달라는 압박이 유일했다. 유정이 도움이라고는 안 되면서 초치고 음해만 해대고, 양호는 개념인이지만 비중이 극히 적고 마귀 등은 나오지도 않기 때문에 이 드라마에서 가장 크게 도움이 된 개념 있는 명나라 장수라 할 수 있다. === [[칼의 노래]] === [[칼의 노래]]에서는 부패한 명 수군 제독으로 등장하는데,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거대한 체구의 인물로 묘사된다. 주연에서 사슴 다리를 통째로 뜯어먹으며 생마늘을 으득으득 씹어먹고 공훈을 세우는 것에 집착하여 전투 중 바다에 떨어진 수급에 욕심을 부리는 면모를 보인다. 충무공과의 첫 만남에서도 천병(天兵)이 천자의 곡식을 먹는 것은 민망한 일이라며 조선 수군에게 군량을 부담시키고 싣고 온 곡식은 횡령하려는 모습을 보이나 충무공이 여러 방면으로 잘 어르고 달래가며 길들인 이후에는 충무공을 중국에서 높은 벼슬을 하며 큰 판을 주물러야 할 사람이라며 치켜세우고 크고 작은 일들에 대체적으로 원만히 협력을 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만 노량해전 때에 왜군들에게 뇌물을 받아 활로를 터준 것으로 묘사되고 이것 때문에 충무공이 베어버릴까 고민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 [[임진록2]] === [[임진록2]]에서는 명의 화승총 영웅으로 나온다. 이는 수군 영웅들이 모두 원거리 무기를 쓰기 때문. 다른 장수들마냥 그냥저냥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다만 성능은 딱 거기까지만이고 종합적인 능력은 별거 없다. 나중에 이순신이 조선의 반격에서 멋진 스킬까지 들고나온 반면 이 양반은 그런것도 없었다. 그 외에 조반에서 추가된 기술 기공신포는 본래 진린이 사용하던 기술이었으나, 정식 버전으로 오면서 이순신의 기술로 변경했다. 그리고 시나리오 진행시 임진록 2 조선 시나리오 8장에서 잠깐 언급된 것을 빼면 직접 스토리 진행(브리핑)에 나온 적이 없다. === 기타 === * 1962년 영화 <[[성웅 이순신(1962)|성웅 이순신]]>에서는 배우 [[고설봉]]이 연기했다. * 1971년 영화 <[[성웅 이순신(1971)|성웅 이순신]]>에서는 배우 겸 코미디언 [[양훈(동명이인)#s-2|양훈]]이 연기했다. * 1978년 영화 <[[난중일기(영화)|난중일기]]>에서는 배우 [[장동휘]]가 연기했다. * 2015년 드라마 <[[징비록(드라마)|징비록]]>에서는 배우 [[배도환]]이 연기했다. * 2023년 개봉 예정인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 중 대미를 장식할 <[[노량: 죽음의 바다]]>에선 배우 [[정재영]]이 진린역으로 캐스팅되었다. * 마늘을 무척 좋아했다. 이는 기록에서 이순신과 조선군 장수들이 진린과 명나라 장수들을 대접하는 연회에서 알수 있는데 마늘을 좋아하여 구운 통마늘을 한번에 함줌씩 먹었다고 한다. [각주] [[분류:1543년 출생]][[분류:1607년 사망]][[분류:사오관시 출신 인물]][[분류:명나라의 인물]][[분류:임진왜란/군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