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경자 (문서 편집)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bae48, #af873b, #bbae48)" '''{{{+2 천경자}}}[br]{{{-1 千鏡子 | Chun Kyungja}}}'''}}}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ombudsmannews.com/data/newsThumb/1482188045ADD_thumb580.jpg|width=100%]]}}} || || '''본명''' ||천옥자(千玉子) || ||<|2> '''출생''' ||[[1924년]] [[11월 11일]] ||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 옥하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6232149005&code=620114|#]]] || ||<|2> '''사망''' ||[[2015년]] [[8월 6일]] (향년 90세) || ||[[미국]] [[뉴욕주]] [[뉴욕시]]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본관''' ||[[영양 천씨]] (潁陽 千氏) || || '''직업''' ||[[화가]], [[수필가]] || || '''학력'''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현 [[전남여자고등학교]]][br][[여자미술대학|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현 [[여자미술대학]]] 미술학 || || '''배우자''' ||초혼: 이철식[br]재혼: 김남중 || || '''가족''' ||아버지 천성욱, 어머니 박운아, 1남 2녀중 장녀[br]자녀 2남 2녀(이혜선, 이남훈 / 김정희, 김종우) || || '''링크''' ||[[http://www.chunkyungja.org|[[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width=23]]]] || [목차] [clearfix] == 개요 == >'''내 온몸 구석구석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 있나 봐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아요.''' >---- >- 천경자 환상적인 세계관을 결합시킨 짙은 색채의 채색화로 전통적인 한국화를 벗어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으며 덕분에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많은 수의 수필집들도 집필하여 생전부터 큰 대중적 인지도를 얻은 [[화가]]다. ||<-2> '''{{{#fff 주요 작품}}}'''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천경자-미모사향기.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천경자-여인의초상.jpg|width=100%]]}}} || || '''[[미모사]] 향기, [[1977년]]''' || '''여인의 초상, [[1977년]]''' || == 생애 == 공립[[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미술교사]]로부터 그림을 배웠고, [[1941년]] 일본의 [[여자미술대학|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해 뎃생이나 채색법에 대해 배웠다. 이후 [[1944년]]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파리 아카데미 고에쓰에서 공부한 뒤 귀국해서 [[1955년]] 대한미술협회전에 작품을 출품해 대통령상을 받으면서 화단에 존재를 알리게 되었다. 그후 [[홍익대학교]]에서 동양화 학과장을 지내기도 했다. 한편으로 수필가로도 활동했는데 [[1950년대]]부터 발표한 [[수필]]을 모아 1955년 첫 수필집 "여인소묘"를 출판하기도 했고 [[남태평양]]을 다니면서 경험한 것을 자신의 데셍 삽화와 함께 출판한 "천경자 남태평양에 가다"를 출판하기도 했다. 평생 발표한 저서만 10권이 넘을 정도로, 지금은 대부분 절판됐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또한 [[한말숙]], [[박경리]] 등 문인들하고도 각별히 교류하였다. 그녀는 동양화가이면서도 대담하게 밝은 색채를 사용했는데 이 때문에 [[일본]]에서 공부해서 지나치게 왜색물이 들었다고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했다. 이런 그녀의 시대를 앞선 스타일은 그녀를 해방 이후 한국 미술에서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꽃]]과 [[여성]]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는 점도 독특한 부분이다. 여성들에게 보수적인 시대였음에도 상당히 개방적인 여성이었다, 수십 년 전에 세계일주를 했을 정도이니. 또한 상당한 [[애연가]]였다고 한다. 그녀의 작품에도 [[담배]]가 자주 소재로 등장할 정도. 배우 [[윤여정]]은 천경자가 맞담배를 허용해줬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사실 과거에는 [[회충]]을 잡아야 한다는 이유로 여성들에게 담배를 허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의 여성 흡연에 대한 터부는 오히려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없었고, 해방 후 서양 문화가 유입되면서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인지 천경자 집안에는 대대로 애연가가 많았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도 애연가였으며, 천경자의 딸 또한 애연가였고, 모녀 간에 맞담배를 즐겼다 한다.[[http://blog.naver.com/callmebosol?Redirect=Log&logNo=40026889272|#]] 참고로 천경자는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장녀 이혜선, 장남 이남훈, 차녀 김정희, 막내 김종우[* 2007년 작고. 前 세공문고 대표. 이 인연으로 후에 세종문고는 천경자의 화집(1995년판)도 출간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종군화가단의 일원으로 참가해서 기록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http://www.casasia.org/exec/file/download.asp?filepath=/file/digest&filename=3(4).pdf|한국미술연구소의 천경자 종군화가단 활동 자료]] 위작시비에 대해 천경자에게 동정적인 기사에서 성격을 묘사하기를, 다른 사람에게 매우 잘해주면서 동시에 두려움과 의심을 갖고 대한다고 했다. [[1991년]] 일어난 [[천경자 미인도 위작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녀의 창작활동은 파탄을 맞게 된다. 그녀 자신이 그린 적이 없는 그림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절필을 선언하고 잠시 미국으로 요양차 떠나 있었으나, 얼마 뒤 귀국해 다시 붓을 잡기 시작하였고[*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절필은 일시적인 것이였다.] [[1995년]] 호암갤러리[* 과거 중앙일보 지하에 위치해 있었다. 용인에 위치한 호암미술관(삼성미술관 [[리움]]의 전신)의 별관이였으나, [[2004년]] 삼성미술관 리움이 개관하면서 이곳을 중앙일보에 되돌려 줌에 따라 폐관되었다.]에서 첫 번째 회고전(11.1~11.30)을 개최한다. 당시 회고전은 굉장한 화제가 되어서 전시장 매표소에서 시작된 줄이 호암갤러리 밖 서소문 거리에까지 이어졌을 정도였고, 1달 동안 8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다녀갔으며, 마지막 주말에는 하루 5,000명까지 입장하였다고 한다.[* 이는 당시 회고전을 기획했던 前 호암미술관 큐레이터인 최광진의 저서 "천경자 평전"에서 언급되는 내용이다.][* 이러한 흥행은 작가의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것도 이유이지만, 당시 천경자가 전시장에 거의 매일 직접 나와서 관람객을 맞고 사인을 해 주기도 한 것도 어느정도 작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역시 최광진이 집필한 "천경자 평전"에 언급된다.] 그러나 [[1998년]] [[9월]] 건강이 나빠져 결국 한국 생활을 접고 큰딸이 머물고 있는 미국 뉴욕으로 떠났고, [[11월]]에 일시 귀국하여 그동한 가지고 있던 채색화와 드로잉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다.[* 이것을 토대로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는 따로 "천경자실"이 마련되어 천경자의 기증작품들이 연중 상설전 형태로 전시되고 있다.] === 미국으로 떠난 이후 ===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으로 떠난 뒤 그녀의 작품 가격이 치솟아서 [[2023년]] 현재도 그녀의 작품은 미술시장에서 가격이 가장 치솟은 작가로 꼽힌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당연한게, 공급은 끊겼는데 수요는 이슈화되면서 올라갔으니 가격이 오를 수 밖에 없다. 사실 상당수 작가들이 죽어서 뜨는 경우가 많다. 재주는 예술가가 부리고 돈은 콜렉터들이 버는 경우도 많다.] 2003년에 호당 1,000만원대이던 그녀의 작품은 2023년 현재는 호당 4,000만원대를 호가한다는 것.[* 하지만 이는 해외 예술시장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 없다. 해외에서야 1,000억원이 넘는 작품도 경매에서 나오니. 전반적으로 한국예술시장은 규모가 초라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해외 예술시장이 그만큼 투기 열풍에 휩싸였다 봐야겠지만.] 그녀가 [[1998년]] 미국으로 떠난 뒤 공개적인 작품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고가는 계속 될 거라고 한다. 일각에서는 이런 탓에 그녀의 작품의 다른 위작이 나오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그러다 [[2003년]] 초 [[뇌일혈]]을 일으켜 거동은 커녕 말하는 것조차도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고, 결국 작품활동은 중단되었다. 이후 [[2006년]] 갤러리 현대[* [[1973년]], [[1974년]], [[1978년]], [[1980년]]에 1번씩 천경자의 개인전을 개최한 이력이 있다.]에서 장녀 이혜선의 협조로 전국 각지에 흩어진 채색화와 드로잉, 미완성 작품 등을 모은 대규모 개인전이 열렸고, [[2007년]]에는 새로운 화집 "천경자-그 생애 아름다운 찬가"가 발간되었다.[* 다만 비매품이다.] 한편으로 그녀는 고향 고흥군에 [[2007년]] 드로잉과 판화 66점을 기증하고 고흥군은 이를 고흥군 종합문화회관내에 천경자 전시실을 설치해 전시했으나 고흥군의 무성의한 작품 보존 행태에 분노한 그녀는 [[2010년]] 작품 반환을 요구했다. 작품에 손상을 가하는 [[할로젠 원소|할로겐]] 전구를 전시실 조명으로 쓰는가 하면 심지어는 청소용구를 보관하는 창고에 작품을 보관하는 등의 행태를 듣고 분노한 그녀[* 정확히는 그녀의 장녀인 이혜선. 2003년 천경자가 뇌일혈로 병상에 누운 뒤부터 작고할 때까지 사실상 천경자의 대리인 행세를 했다.]가 작품 반환을 요구하게 된 것. 고흥군은 결국 [[2012년]] [[3월]]에야 반환을 결정했지만, [[12월]]까지 미루고 미루다가 작품의 상태에 대해서 또다시 문제가 밝혀지고 천경자 측과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결국 반환했다. 헌데 [[2014년]]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 천경자의 딸 이혜선 씨가 일부러 천경자의 죽음을 숨기고 계속 예술원 수당을 지급받고 있다는 것. 2014년 천경자는 외부와 접촉을 끊은 채 살고 있는 상태. [[공예가]]인 딸 이씨의 증언에 따르면 "거동은 어렵지만 의식은 있는 상태"라고는 하는데, 예술원은 수당 지급 문제로 천경자의 근황을 확인하려고 지난해부터 이씨에게 공문을 보내 천경자의 의료기록 등을 요구했다. 이씨는 이 같은 요구가 천경자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며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따라 예술원은 지난 2월부터 수당 지급을 중단했고, 이씨는 회원 탈퇴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예술원은 천경자 본인의 의사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탈퇴 처리는 하지 않은 상태다.[[http://joongang.joins.com/article/aid/2014/06/12/14514048.html|#]] 천경자의 딸 이씨의 경우 고흥에 기증했던 작품들도 관리를 허술히 했다는 이유로 천경자미술관 건립을 무산시켰고,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된 작품도 반환을 요구하였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79291.html|당시 기사]] 이에 대한 장녀 [[http://www.nocutnews.co.kr/news/4314209|이혜선의 해명]].] [[2014년]] [[6월 27일]], [[MBC]]의 '[[리얼스토리 눈]]'에서 이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 그런데 천경자가 [[2015년]] [[8월]]에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나 유족들[* 정확히는 장녀 이혜선을 제외한 나머지 유족들. [[http://www.ilyosisa.co.kr/news/articleView.html?idxno=89151|기사]]에 따르면 나머지 유족들은 어머니의 은행 통장 해지 전화를 받고 나서야 어머니의 죽음을 알았다고 한다. ]은 천경자의 유골의 위치를 모른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장녀 이혜선 때문이라고 한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0/27/2015102702718.html|#]]. 후에 장녀는 어머니의 유골을 [[허드슨 강]]에 뿌렸다고 밝혔다[[http://news.donga.com/3/all/20151110/74685946/1|#]] . [[2016년]]에는 작고 1주기를 맞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기증작품을 중심으로 한 추모전이 개최되었고, 같은 해 미술평론가 최광진[* 前 호암미술관 큐레이터. 1995년 천경자 회고전을 기획했다.]이 집필한 "천경자 평전-찬란한 고독, 한의 미학"이 간행되었다. [[2019년]]에는 천경자화백 큰며느리 유인숙이 쓴 "미완의 환상여행"(이봄-문학동네)이 간행되었다. 저자는 결혼 첫해인 1979년부터 1998년 천화백이 미국으로 이주하기까지 곁에서 일상을 함께했다. 1990년대 일상이 담긴 천화백의 수필은 그동안 찾아볼 수 없었다. 유인숙 저자는 천화백의 전성기였던 1979년 서교동시절부터 압구정한양아파트에서 살기까지의 일상을 묘사한다. 천화백은 가족을 모델로 작품을 그려왔는데, 1979년 이후에 자식들이 유학 혹은 해외 출장을 간 후 큰며느리가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모델을 한 작품은 ‘노오란 산책길’, ‘황금의 비’ 포함한 여러 작품이 있다고 한다.[[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2470666|#]] 2021년에는 작품 ‘노오란 산책길’을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했었다.(전시기간 2021.7.21.-2022.6.6.)[[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2553237|#]] == 사건사고 == === [[천경자 미인도 위작 사건]]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천경자 미인도 위작 사건)] == 활동 == === 작품 === * 1943년 - 노부 * 1943년 - 조부 * 1951년 - 생태 * 1952년 - 부활 * 1955년 - 정 * 1959년 - 전설 * 1962년 - 두 사람 * 1962년 - 환 * 1963년 - 원 * 1964년 - 여인들 * 1965년 - 찬가 * 1974년 - 4월 * 1976년 - 은전아 잘 있었니 * 1977년 - 6월의 신부 * 1977년 - 아열대 * 1977년 - 여인의 초상 * 1977년 -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 1977년 -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 1977년 - 미모사 향기 * 1977년 - 수녀 테레사 * 1977년 - 아열대2 * 1978년 - 탱고가 흐르는 황혼 * 1978년 - 초원 * 1978년 - 윤삼월 * 1978년 - 무제 * 1981년 - 미도파의 초상 * 1981년 - 장미와 여인 * 1982년 - 여인상 * 1983년 - 노오란 산책길 * 1984년 - 아는 여인의 시1 * 1985년 - 아는 여인의 시2 * 1985년 - 무제 * 1988년 - 누가 울어 * 1988년 - 무제 === 전시 === || '''년도''' || '''제목''' || '''장소''' || '''비고''' || || 2018년 3월 16일 ~ 2018년 7월 29일 || 피란수도 부산 : 절망 속에 핀 꽃 || 부산시립미술관 || || || 2018년 4월 4일 ~ 2018년 4월 10일 || 여인의 향기 || 갤러리일호 || || || 2018년 7월 13일 ~ 2018년 9월 2일 || 오늘의 여성미술 || 양평군립미술관 || || || 2018년 7월 14일 ~ 2018년 10월 3일 || 한국 근현대미술 걸작전 - 100년의 여행, 가나아트 컬렉션 || 제주도립미술관 || || || 2018년 7월 19일 ~ 2018년 9월 9일 || 책 속의 화가 || 성북구립미술관 || || === 저서 === || '''년도''' || '''제목''' || '''출판사''' || '''비고''' || || [[1974년]] || 남태평양에 가다 || 서문당 || || || [[1980년]] || 꿈과 바람의 세계 || 꿈과 바람의 세계 || || || [[1986년]] ||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 || 제삼기획 || || || [[1986년]] || 이 행복하고 한적한 매혹의 시간에 || 진화당 || || || [[1988년]] || 꽃과 색채와 바람 || 자유문학사 || || || [[1989년]] ||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 자유문학사 || || || [[1995년]] || 탱고가 흐르는 황혼 || 세종문고 || || || [[1995년]] || 천경자 화보집 || 세종문고 || || || [[2006년]] || 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 || 랜덤하우스코리아 || || || [[2006년]] ||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 랜덤하우스코리아 || || == 경력 == * 1981년 -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자문위원 * 1978년 -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 1976년 -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운영위원 * 1965년 -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 ~1974년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부교수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조교수 * 1954년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전임강사 * 1949 ~ 1952년 - [[조선대학교]] 미술학과 교수 == 수상 == * 1983년 - 은관문화훈장 * 1979년 - 대한민국예술원상 * 1971년 - 서울특별시 문화상 * 1955년 - 대한미술협회전 대통령상 [[분류:대한민국의 화가]][[분류:고흥군 출신 인물]][[분류:영양 천씨]][[분류:1924년 출생]][[분류:2015년 사망]][[분류:대한민국의 가톨릭 신자]][[분류:전남여자고등학교 출신]][[분류:여자미술대학 출신]][[분류:은관문화훈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