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문서 편집) [[분류:1973년/사건사고]][[분류:제4공화국/사건사고]][[분류:고문 사건]][[분류:대한민국의 미제사건]][[분류:서울대학교/사건사고]][[분류:1931년 출생]][[분류:1973년 사망]] [include(틀:사건사고)] ||<-2> {{{+1 '''최종길'''}}}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www.kdemo.or.kr/file_1987061082616.jpg|width=100%]]}}} || ||<-2> '''최종길 교수의 생전 모습.''' || || '''출생''' ||[[1931년]] [[4월 28일]] || || '''사망''' ||[[1973년]] [[10월 19일]] (향년 42세)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 '''직업''' ||[[교수]] || [목차] [clearfix] == 개요 == [youtube(d9cocnsCvpo)] [youtube(rpuxREfq-Lw)] [[1973년]] [[10월 19일]]에 일어난 [[의문사]] 사건. [[장준하]]의 의문사와 더불어 [[박정희]] 정권 치하 [[10월 유신|유신 체제]]의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으로 꼽힌다. == 투신자살한 교수? == 최종길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는 서울대 법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쾰른 대학교]](박사)로 [[유학]] 가서 독일의 대표적 [[민법]]과 국제사법 전문 법학자인 게르하르트 케겔 밑에서 수학했으며 [[하버드]] 법대 교수 제롬 코헨, 에드윈 라이샤워 등의 세계적인 석학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수 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1962년]]에 귀국한 후 [[1965년]]에 모교인 서울대 법학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최 교수는 [[1969년]] 4월 [[중앙정보부]]에서 조작해서 벌어진 [[유럽 간첩단 조작 사건]]의 참고인으로 수사에 협조하고자 [[1973년]] 10월 16일 [[중앙정보부]] 감찰실 직원 최종선[* 최종길 교수의 막내동생. 1978~1981년까지 경기지부에서 노사담당관으로서 노사 문제 업무도 맡았다.]과 함께 웃으며 [[중앙정보부]]에 자진출두하였으나 그로부터 3일 뒤인 10월 19일 [[중앙정보부]]는 최 교수가 [[유럽]] 간첩단 소속 간첩인 걸 고백하고 중정 본부 7층에서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유가족들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스승인 게르하르트 케겔 교수와 친구 제롬 코헨 교수 등이 최종길 교수는 [[고문]]을 받고 살해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당시 [[국가정보원장|중앙정보부장]]은 [[이후락]]이었으나 [[윤필용 사건]]과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인해 모든 실권을 상실한 채 연금 상태에 있었는 데다 남산에서 부재 상태였고, 최종길의 관련 혐의인 [[유럽 간첩단 조작 사건]]은 [[김형욱]]이 [[국가정보원장|중앙정보부장]]이었던 시절인 1969년 봄에 발생한 사건이며 당시 국내 담당 차장이었던 검사 출신 [[김치열]]과 5국(대공수사) 국장이었던 검사 출신 안경상의 주도 하에 [[간첩]]으로 조작되고 고문치사를 당하였음에도 간첩임을 자백하고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7층 화장실에서 투신자살했다고 허위 조작하였다. == 사후 명예회복과 추모 == [[신경림]] 시인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심문을 받을 때 중정 요원이 그를 끌고 창가로 가서 '''"야 이 새끼야, 여기가 어딘지 알아? 여기가 최종길이가 떨어져 죽은 데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결국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이 사건을 조사한 끝에 "최종길 교수는 중정의 고문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간첩이라는 자백 강요를 끝까지 거부했다"고 인정한다고 밝혔다. 적극적으로 투쟁한 것이 아니더라도 권력의 강요를 끝까지 거부한 소극적인 저항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표였다. 이후 최종길 교수의 유족들은 국가 권력의 고문과 [[가혹행위]]로 최 교수가 사망했다고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2006년]] 대법원은 "국가 권력이 나서서 서류를 조작하는 등의 방법으로 조직적으로 사실을 은폐하고 고문 피해자를 오히려 국가에 대한 범죄자로 만든 사건에서 국가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하여 국가는 최 교수의 유족에게 18억 6천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의 판결은 최 교수가 살해된 것을 법적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최 교수가 간첩으로 몰려 고문을 받고 사망한 이유에 대해서는 박정희 정권이 [[19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하면서 서울대 학생들이 유신 반대 데모를 하다가 붙잡히자 최 교수가 "'''서울대 총장을 보내 항의하고 박정희의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발언한 것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아주 당연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유신 시대는 '''당연한 말도 죽을 이유가 되는''' 시대였으니... 안타깝게도 최 교수를 건물 밖으로 집어던져 살해했음이 유력한 것으로 보이는 당시 중정 요원들은 처벌 받지도 않고 잘 살았다. 중정 직원 김상원은 최종길 교수가 사망할 당시 함께 있었으나 침묵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며, 이후 의문사위 조사관이 증언을 들으러 미국의 집을 방문하자 주거침입으로 조사관을 경찰에 신고하여 회피하였고 기자에게는 진실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다고 했단다. 자세한 내용은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48600.html|기사]]를 참조. [[파일:external/dimg.donga.com/6905554.1.jpg]] [[2003년]]에는 그가 졸업하고 교수로 재직했던 서울대학교에서 근대법학교육 백주년 기념관 1층 강의실을 그를 추모하는 의미로 최종길 기념홀이라고 명명하여 헌정하고 그의 부조를 세웠다. 원래는 최종길 홀 밖에 붙어 있었으나 백주년 기념관이 리뉴얼되면서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리모델링 과정에서 최종길 교수의 부조가 건물 바닥에 임시로 아무렇게나 놓여진 채 보관된 사진이 퍼지면서 [[스누라이프]]를 중심으로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혹시 철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었으나 다행히 번듯한 자리를 찾아갔다.] 그런데 한편으로 서울대는 이 사건의 원흉으로 의심 받는 [[신직수]]와 사돈인 [[홍진기]]의 호를 딴 유민홀을 짓는 모순된 행적을 보이기도 했다. == 여담 == [[파일:external/www.newshankuk.com/nh_20060223_soc_ds1.jpg]] 아들인 최광준 교수는 [[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부자가 모두 [[민법]]학자로, 그는 어머니 백경자 여사의 유지에 따라 최종길 교수의 사망으로 받은 보상금을 전액 [[서울대학교]]에 기부하였다.[* 최광준 교수는 부친이 박사 학위를 취득한 [[독일]] [[쾰른대학교]]에서 학·석·박사를 취득하여 서울대학교와는 [[https://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692740.html#cb|직접적인 연고는 없다]].] 위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20회에서 다뤄졌다. == 둘러보기 == [include(틀:문서가 있는 대한민국의 사망 및 실종 사건사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