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스, 죠피 숄 남매 (문서 편집) [include(틀:ZDF 선정 위대한 독일인)] [목차] == 개요 == ||<:> [[파일:attachment/하얀 장미/Hans_scholl.jpg|width=100%]] ||<:> [[파일:attachment/하얀 장미/Sophie_scholl.jpg|width=100%]] ||<:> [[파일:attachment/하얀 장미/48003.jpg|width=100%]] ||||<:> [[파일:attachment/하얀 장미/Kurt-Hubert.jpg|width=100%]] || ||<:> '''한스 숄[br][[1918년]] [[9월 22일]] ~ [[1943년]] [[2월 22일]]''' ||<:> '''조피 숄[br][[1921년]] [[5월 9일]] ~ [[1943년]] [[2월 22일]]''' ||<:> '''크리스토프 프롭스트[br][[1918년]] [[11월 6일]] ~ [[1943년]] [[2월 22일]]''' ||<:> '''쿠르트 후버 교수[br][[1893년]] [[10월 24일]] ~ [[1943년]] [[7월 13일]]''' || 나치에 저항하는 비폭력 단체인 [[하얀 장미]]를 이끌었던 사람들이다. == 생애 == === [[하얀 장미]] 결성전까지 === [[오빠]] 한스 프리츠 숄(Hans Fritz Scholl)은 1918년 9월 22일에 독일 남부에서 태어났고 3살 [[터울]]의 [[여동생]] 조피아 막달레나 숄(Sophia Magdalena Scholl, 애칭 조피)은 1921년 5월 9일에 태어났다. 1940년대 나치는 [[우생학]]에 경도되어 [[장애인]]을 비롯한 '열등 유전자'를 말살하는 [[T4 작전]]을 벌여 강제로 [[안락사]]와 불임 수술 등을 자행하고 있었다. 한스와 조피는 [[독일 제국]] 가톨릭 [[추기경]] 클레멘스 아우구스티누스 에마뉘엘 요제프 피우스 안토니우스 후베르투스 마리 그라프 폰 갈렌(Clemens Augustinus Emmanuel Joseph Pius Anthonius Hubertus Marie Graf von Galen, 1898~1946)[* 풀네임이 엄청나게 긴 것은 [[귀족]]이기 때문이다. [[백작]] 출신이었다. 2005년에 [[베네딕토 16세]]가 성인으로 [[시성]]했다.]의 강론을 듣고 경악하여 [[하얀 장미]]를 결성했다. === 활동 === 그들은 아우구스트 폰 갈렌 주교의 강론 전문을 복사하여 [[뮌헨 대학교]]에 살포했다. 그리고 급우 알렉산더 슈모렐(1917~1943), 빌리 그라프(1918~1943), 크리스토프 프롭스트(1918~1943) 등과 그들의 대학교수였던 쿠르트 후버(1893~1943)가 입단했다. 이들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나치가 곧 망한다고 주장하고 1943년 2월까지 나치 지지세가 강했던 독일 남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 최후 === 이들은 6번째 전단지를 1943년 2월 18일 뮌헨 대학교의 수업 종료에 맞춰 공개적으로 배포하던 중 나치당원인 뮌헨 대학의 경비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악질 나치 [[부역자]] 판사인 [[롤란트 프라이슬러]]에게 재판을 받게 된 남매는 당당하고 용감하게 신념을 발언하였으나[* 다만 훗날 공개된 기록에 따르면 완전한 증거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조피는 자신과 오빠의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고 한다. 그러나 증거가 드러나자 솔직하게 인정한 뒤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고.] [[사형]]을 선고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유언]]은 '''"자유여 영원하리"'''와 '''"태양은 아직도 빛난다"'''이다. 다른 [[하얀 장미]] 구성원들도 첫번째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하거나 2번째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쿠르트 후버와 빌리 그라프, 알렉산더 슈모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치는 이 단체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심지어 전단을 인쇄하는 것을 도왔나 멤버 중 한 명인 크리스토프 프롭스트의 부인과 아이들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까지 체포해 6개월에서 1년의 실형을 선고할 정도로 하얀 장미에 대한 나치의 탄압은 극심했다. 나치의 [[연좌제]]식 탄압에 숄 집안은 그야말로 [[멸문지화]]를 당했으나 맏딸 잉에 숄(Inge Aicher-Scholl, 1917~1988)은 나치 패망 후까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녀는 나중에 "하얀 장미(Die Weiße Rose)"라는 책을 썼다. 한국에서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1970년대 말 최초 출간되었으며 당시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던 대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2010년 재출간된 버전(미네르바 문고 시리즈 제4권)으로 구할 수 있는데 '''아동 도서'''로 분류되어 있다. == 기타 == 상술한 잉에 숄의 '하얀 장미'는 1982년 독일(당시는 [[서독]])에서 영화화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Die_Wei%C3%9Fe_Rose_(film)|#위키피디아]][[https://www.imdb.com/title/tt0084897/|#IMDB]] 2003년에는 독일 역사의 위인들을 부조로 만들어 기리는 레겐스부르크[* Regensburg. 뮌헨에서 기차 타고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도시.]의 [[발할라]] 기념사원에 반나치 운동가로는 최초로 조피 숄이 헌액되었다. [[분류:제3제국/인물]][[분류:민주운동가]][[분류:학생운동가]][[분류:1918년 출생]][[분류:1921년 출생]][[분류:1943년 사망]][[분류:참수된 인물]][[분류: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출신 인물]][[분류:여러명인 문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