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해태 타이거즈 항명사건 (문서 편집) [include(틀:사건사고)] [목차] == 개요 == 1996년 시즌 전 [[하와이]] 전지훈련장에서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이 [[김응용]] 감독과 코치진에게 집단으로 항명한 사건. == 배경 == 1996년 초반의 해태는 전년인 1995년 시즌 후에 [[김성한]]이 당해 시즌을 끝으로 은퇴 수순을 밟고, [[선동열]]은 [[주니치 드래곤즈]]에 임대선수로 이적하는 등 여러모로 전력 유출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건배 구단주는 선동열의 이적 협상을 문제삼아 노주관 사장과 이상국[* 광주 [[살레시오고등학교|사레지오고등학교]] 육상선수 출신으로, 1975년 [[해태제과]]에 입사하여 곧바로 판매왕에 오를 만큼 영업 수완이 뛰어났다고 한다.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과 함께 야구단으로 자리를 옮겼고 여러 요직을 거쳐 단장까지 올랐다. 2000년부터는 6년간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사무총장을 지냈다.] 단장을 해임시키고 마의웅 사장을 임명한다. 2013년 당시 [[SBS 스포츠]]의 프로그램이었던 야구본색의 타이거즈 왕조편에 자세히 나오지만 이상국 단장은 선수단 연봉 협상과 조율에 도가 튼 사람이였다. 주무기는 음주(?)였으며, 선수들과 연봉 협상을 하면서 꼭 [[술]]을 먹였고, 선수들이 얼큰하게 취했을 때 회사 측에 유리한 계약서를 내밀어 도장을 찍게 했다. 물론 대부분 깨고 나서 후회했지만, 워낙 친화력도 좋고 같이 술 먹고 밥 먹으면서 정도 붙은 터라 불평 하나 못 할 정도였다. 이런 사람을 잘랐으니 구단의 분노가 제법 컸다는 뜻이고, 역으로 선수단의 동요 또한 컸을 것이다. 이렇게 프런트가 통으로 물갈이 되는 상황인지라 구단 내부에서는 흔들렸다. [[김응용]] 감독은 인터뷰에서는 "어떻게 이런 팀으로 우승을 해, 올해 기대는 접어둬."라고 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당시 해태는 [[방위병]]이었던 [[이종범]], [[이대진]]이 복무가 끝날 예정인지라 전력상에서는 꿇리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나름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2월부터 [[하와이]] [[호놀룰루]]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수직적이고 강압적인 코치진은 선수들에게 잦은 폭언과 폭행'''은 물론 [[빨래]]까지 맡기는 '''쌍팔년도 군대식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결국 훈련 중 선수들의 분노는 쌓여만 가는데....[* 당시 코치진은 김응룡 감독을 비롯해 [[김일권]], 조충렬, [[정현발]], 장채근, [[이상윤(야구선수)|이상윤]], 유남호, [[신용균]], 김종윤, [[김종모]], [[차영화]]였다.] == 사건 == * 새벽 1시 30분 1996년 2월 25일 새벽 1시 30분, 주장인 [[이순철]]의 방에 전화가 걸려왔다. 이순철은 늦은 밤에 걸려온 전화에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았는데, 전화를 건 사람은 [[장채근]] 배터리 코치였다. 당시 코치 중에서 막내인 장 코치는[* 막내일 뿐만 아니라 선수 시절 이순철과 호형호제했던 [[광주동성고등학교 야구부|광주상고]] 선,후배 관계였다. 나이도 이순철이 두 살이나 더 많으며 입단 시기도 이순철이 1985년으로 1년 빨랐다. 장채근은 1995시즌을 끝으로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해태 코치로 합류하였다.] 김응용 감독의 '''"선수들 밖에 못 나가게 잘 감시해라"''' 라는 명령을 받고서 선수들에게 전화를 걸어 부재를 확인했던 것. 이순철은 전화를 받고서, '''"아니 지금이 몇 시인데, 전화해서 감시 하냐."''' 라면서 짜증스럽게 받고 끊었다. 가뜩이나 주장을 맡으면서 후배 선수들을 다독거리느라 힘든 판에 미칠 노릇이었다. * 아침 6시 짜증내면서 아침 산책을 나가려는 이순철은 감독과 코치진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다. 결국 화를 참으며 아침 산책[* 김응용 감독은 아침 일찍 선수들을 불러내서 강제로 산책을 시켰는데, 전날 밤에 음주 유무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자주 걸리던 게 [[이병훈(야구)|이병훈]]... 결국 이 일로 인해 이병훈은 김응용 감독과의 관계가 나빠져서 1996년 시즌 중 [[동봉철]]을 상대로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되었다.]을 나가려는데 옆에 있던 [[유남호]] 수석 코치가, '''"이 자식 뭘 그거 갖고 성질내냐"''' 라고 하면서 계속 옆구리를 찌르자, 짜증이 폭발한 나머지 엉겁결에 주먹질을 했는데 유 코치가 뺨을 정통으로 맞았다. 선수들과 코치진들이 뜯어 말렸고 결국 이순철은 산책길의 정 반대로 씩씩거리면서 나갔고 선수들이 이를 따렀다. * 아침 8시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간 선수들은 잔뜩 열 받은 상황이었다. 아예 '''"코치진의 버릇을 고치겠다"'''라는 생각으로 '''"훈련 거부하고 귀국하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윤기두[* 현재 KIA 타이거즈로 바뀐 뒤에 운영 실장을 맡고 있으며 전 외야수 윤민섭의 아버지.] 매니저에게 "'''코치들이랑 같이 못 있겠으니 여권을 내놓으십시오'''"라고 따진다. 이 소식을 들은 김응용 감독은 직접 식당에 나와서 "'''이렇게 썩어 있을 줄은 몰랐다. 지금은 나가고 싶어도 비행기 표가 없으니 참아달라. 나 1년 만 더 하자.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라면서 선수들에게 '''눈물로 읍소한다.''' 당시 최윤범 운영 팀장과 윤기두 매니저의 설득에 선수들은 " '''그래도 훈련은 하자.'''" 라며 온건하게 대응한다. * 오후 1시 선수단의 분위기는 개판이었지만, 기자들의 눈치도 보여서 훈련을 했다. 그러나 코치들이 '''"이 따위 놈들과는 훈련 할 생각 없다."'''라는 말을 하면서 훈련을 거부했고 결국 김응용 감독이 직접 펑고를 쳐주었다고 한다. 청백전의 선발은 [[강태원]]으로 정해졌으나, 강태원은 팔꿈치가 아프다고 하여 청백전은 이뤄지지 않았고, 선수들은 식사를 위해서 식당으로 이동했다. 이 때부터 기자들은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챘다고 한다. * 오후 3시 고참들은 비교적 매를 덜 맞았지만 후배들은 많이 맞았다. 이렇다 보니 젊은 선수들은 호텔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이순철은 자신의 저지른 사태가 확대되는 일이 생기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이는 이 사태를 대충 넘기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강경파인 김정수, 이건열, 조계현, 송유석, 이강철, 홍현우는 귀국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윤기두 과장이 나서 '''"팀이 이 사태로 분열되면 너희만 피해를 보게 되고 이 사건이 퍼지면 이순철은 야구계에서 영원히 매장될지도 모른다."''' 라면서 선수단을 설득했다. 결국 이 설득이 먹혀 고참 선수들은 이를 수용하게 되었고 모두 저녁에 숙소로 돌아갔다. == 사건 이후 == 선수와 코칭 스탭은 더 이상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훈련을 끝냈다. 김응용 감독은 선수들에게 강하게 원성을 사던 B 모 코치를 2군으로 내렸다. 어느 고참 선수는 '''"저도 처자가 있는 몸이니, 잘 좀 부탁 드린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1996년 해태는 [[1996년 한국시리즈|3년만의 우승으로 체면을 살렸지만]], [[뒤끝|1996년 시즌 이후 김응용 감독과 타이거즈의 프런트는 가담한 선수들을 끝까지 잊지 않았다.]] * [[이순철]] : 1996년 당시 해태의 주장이자 이 사건의 주동자였다.[* 다만 이순철 본인은 2020년 인터뷰에서 자신이 주동자는 아니지만 당시 선수단 내 최고참이라 총대를 맸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은 선수단과 코치진 사이의 갈등이지 김응용 감독과 직접 관련된 것은 없다고 말했다.[[https://youtu.be/khCTDRgfvkY|#]]] 1996년 시즌은 그래도 어찌어찌 주전 외야수 자리를 지켰고 6차전에서 결승득점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1997년에 2차 1라운드로 '''[[김창희(야구)|김창희]]'''가 입단하면서 급격히 자리를 잃었고, 결국 주장임에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는다. 이 일로 김응용 감독과 원수를 졌고 1998년을 끝으로 삼성에서 방출되면서 은퇴했다. 그 뒤 삼성코치로 2년간 있었다가 2000년 시즌 후 김응용이 부임하자, 2001년에 연대 선배인 이광은의 부름을 받고 LG 트윈스로 이적했으며, 코치를 거쳐 2004년에 [[이광환]]의 후임으로 LG 감독이 되지만 알다시피 [[6668587667]]을 이끌어냈다. 그 뒤 [[엠스플]]에서 1년간 해설을 했으며, [[키움 히어로즈|우리 히어로즈]] 수석코치로 1년간 재임했다. 다시 [[엠스플]]에서 2011년까지 해설을 하다가 2012년에 선동열을 따라서 15년만에 타이거즈에 수석코치로 돌아왔다. 그러나 알다시피 2013년에 [[타어강]]이라는 역대급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DTD]]가 터졌고 결국 2년 만에 해임되었다. 2014년부터 [[SBS 스포츠]]에서 해설을 하고있다. 물론 이후에는 이런 일들에 대해 모두 화해를 했고 자주 식사도 하며 다시 깍듯이 모시고 있다. * [[송유석]] : 1996년에 출전기회를 잡지 못했다. 대신 그 무렵부터 마당쇠로 굴려지던 [[임창용]]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된다. 결국 1996년 11월에 LG로 트레이드했다. LG 구단에서도 불펜투수로 뛰면서 좋은 모습을 보였고, 1999년에는 주장이 되었으나 시즌 후 구단과의 FA 협상에서의 이견ᆞ선수협 문제 등으로 LG 구단의 눈 밖에 나 버렸다. 결국 2001년 한화에서 조용하게 은퇴했으며, 이후로는 야구계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 [[이건열]] : 1996년은 한국시리즈에 나가서 우승반지를 얻었지만, 1997년은 김응용 감독이 떠오르는 2년차 신인인 [[장성호]]를 주전 1루수로 밀어주면서 은퇴를 종용했다. 1997년에 방출되어서 은퇴했으며 2000년에 SK에서 2군코치를했으며 2001년 고교 선배인 김성한 감독이 취임하자 타격코치로 부임했다. 이후 2004년에 팀 선배였던 이순철을 따라서 LG로 갔으며, 2006년까지 외야수비코치를 맡았다. 다시 2007년에 기아로 돌아오나, 서정환의 라인을 쳐 낼때 잘린다. 2008~2009 시즌은 화순고 감독을 맡았으며 2010년 ~ 2012년 시즌은 다시 기아에서 ~~공무원~~ 타격코치를 맡으면서 팬들에게 대차게 까였다. 2013년부터 동국대 감독으로 재임하면서 나름 괜찮은 지도력을 보이고 있다.~~타이거즈에 해준건 [[김호령]]을 추천 해준 것밖에 없다.~~ * [[조계현]] : 1996년 시즌은 16승 + 2점대 초반의 방어율로 호성적을 올린다. 그러나 1997시즌은 3점대 후반의 방어율 + 8승으로 전년대비 부진했다. 결국 4억원에 삼성에 팔려갔다. 거기서 불만 지르다가 방출되었고, 김인식 두산 감독의 부름을 받아 두산으로 이적했다. 2000~2001시즌은 두산에서 팀의 베테랑으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었으며, 2002년은 KBS 해설, 2003년 ~ 2005년 시즌은 기아로 돌아와 투수코치를 했지만 투수진 발굴에 실패했으며 해임되었고 2006년 ~ 2009년 시즌에 선동열의 부름을 받아 삼성 투수코치로 갔으나 알다시피 [[조원수박차]]를 만들고 역시나 해임. 두산 베어스에서도 무능했다는 평을 받았지만 2012년 ~ 2014년에 LG 수석코치로서는 나름 괜찮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2015년부터 수석코치가 되어 다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다. 이 기간 모두 김기태 감독의 수석코치, 이후 KIA 타이거즈의 단장에 오른다. * [[정회열]] : 1996년 어느 정도 부상에서 회복되며 당시 주전이었던 [[최해식]]의 백업 역할을 수행했으나 이순철 송유석 이건열 조계현 등과 함께 1996년 당시 항명사건의 주범으로 찍혀서 다음 해인 1997년에는 고작 11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결국 그 해 시즌 후 해태에서 방출된 뒤 삼성으로 이적했지만 1999년 시즌 후 은퇴했다.그리고 [[정해영(야구선수)|아들]]이 KIA에 1차 지명을 받으며 입단한다. * [[김정수(1962)|김정수]] : 1996년은 선동열의 후임 마무리로 뛰면서 잘했지만, 1997년 ~ 1999년 시즌은 4점대 방어율을 찍으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김정수를 빼면 좌완투수가 [[강태원]] 밖에 없었기에 계속해서 기용되었다. 한편, 1996년 항명사건의 주동자들 중 송유석, 이순철, 조계현, 정회열, 이건열이 1996년~1997년 사이 타 팀으로 이적하거나 쓸쓸히 은퇴했지만 김정수는 어느 정도 사건 수습을 했었던 이유 때문에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덕인지 2000년 김응용 감독의 추천을 통해 SK 유니폼을 입었다]. 그 뒤 1999년에 FA를 신청했으나 구단에서 FA를 거부해, 울며 겨자먹기로 재계약했다가 SK로 트레이드 되었고 SK에서 방출되어 [[한화 이글스]]로 갔으며, 좌완 불펜으로서 잘해 주었다. 2003년에 다시 SK로 와서 은퇴했으며, 그 뒤 2004년 ~ 2005년은 한화의 2군 투수코치, 그리고 2006년 이래로 계속 기아에서 코치를 하고 있다. 다만 키운 투수도 없고, 1군 코치시절의 삽질도 있는지라 철밥통 취급이다. == 같이 보기 == * [[OB 베어스 항명파동]] * [[롯데 자이언츠 선수단 CCTV 사찰 사건]] [[분류:KIA 타이거즈]][[분류:KBO 리그/사건사고]][[분류:1996년/사건사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