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 타이거즈 항명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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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사건
4. 사건 이후
5.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1996년 시즌 전 하와이 전지훈련장에서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이 김응용 감독과 코치진에게 집단으로 항명한 사건.


2. 배경[편집]


1996년 초반의 해태는 전년인 1995년 시즌 후에 김성한이 당해 시즌을 끝으로 은퇴 수순을 밟고, 선동열주니치 드래곤즈에 임대선수로 이적하는 등 여러모로 전력 유출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건배 구단주는 선동열의 이적 협상을 문제삼아 노주관 사장과 이상국[1] 단장을 해임시키고 마의웅 사장을 임명한다. 2013년 당시 SBS 스포츠의 프로그램이었던 야구본색의 타이거즈 왕조편에 자세히 나오지만 이상국 단장은 선수단 연봉 협상과 조율에 도가 튼 사람이였다. 주무기는 음주(?)였으며, 선수들과 연봉 협상을 하면서 꼭 을 먹였고, 선수들이 얼큰하게 취했을 때 회사 측에 유리한 계약서를 내밀어 도장을 찍게 했다. 물론 대부분 깨고 나서 후회했지만, 워낙 친화력도 좋고 같이 술 먹고 밥 먹으면서 정도 붙은 터라 불평 하나 못 할 정도였다. 이런 사람을 잘랐으니 구단의 분노가 제법 컸다는 뜻이고, 역으로 선수단의 동요 또한 컸을 것이다.

이렇게 프런트가 통으로 물갈이 되는 상황인지라 구단 내부에서는 흔들렸다. 김응용 감독은 인터뷰에서는 "어떻게 이런 팀으로 우승을 해, 올해 기대는 접어둬."라고 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당시 해태는 방위병이었던 이종범, 이대진이 복무가 끝날 예정인지라 전력상에서는 꿇리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나름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2월부터 하와이 호놀룰루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수직적이고 강압적인 코치진은 선수들에게 잦은 폭언과 폭행은 물론 빨래까지 맡기는 쌍팔년도 군대식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결국 훈련 중 선수들의 분노는 쌓여만 가는데....[2]


3. 사건[편집]


  • 새벽 1시 30분
1996년 2월 25일 새벽 1시 30분, 주장인 이순철의 방에 전화가 걸려왔다. 이순철은 늦은 밤에 걸려온 전화에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았는데, 전화를 건 사람은 장채근 배터리 코치였다. 당시 코치 중에서 막내인 장 코치는[3] 김응용 감독의 "선수들 밖에 못 나가게 잘 감시해라" 라는 명령을 받고서 선수들에게 전화를 걸어 부재를 확인했던 것. 이순철은 전화를 받고서, "아니 지금이 몇 시인데, 전화해서 감시 하냐." 라면서 짜증스럽게 받고 끊었다. 가뜩이나 주장을 맡으면서 후배 선수들을 다독거리느라 힘든 판에 미칠 노릇이었다.

  • 아침 6시
짜증내면서 아침 산책을 나가려는 이순철은 감독과 코치진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다. 결국 화를 참으며 아침 산책[4]을 나가려는데 옆에 있던 유남호 수석 코치가, "이 자식 뭘 그거 갖고 성질내냐" 라고 하면서 계속 옆구리를 찌르자, 짜증이 폭발한 나머지 엉겁결에 주먹질을 했는데 유 코치가 뺨을 정통으로 맞았다. 선수들과 코치진들이 뜯어 말렸고 결국 이순철은 산책길의 정 반대로 씩씩거리면서 나갔고 선수들이 이를 따렀다.

  • 아침 8시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간 선수들은 잔뜩 열 받은 상황이었다. 아예 "코치진의 버릇을 고치겠다"라는 생각으로 "훈련 거부하고 귀국하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윤기두[5] 매니저에게 "코치들이랑 같이 못 있겠으니 여권을 내놓으십시오"라고 따진다. 이 소식을 들은 김응용 감독은 직접 식당에 나와서 "이렇게 썩어 있을 줄은 몰랐다. 지금은 나가고 싶어도 비행기 표가 없으니 참아달라. 나 1년 만 더 하자.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 라면서 선수들에게 눈물로 읍소한다. 당시 최윤범 운영 팀장과 윤기두 매니저의 설득에 선수들은 " 그래도 훈련은 하자." 라며 온건하게 대응한다.

  • 오후 1시
선수단의 분위기는 개판이었지만, 기자들의 눈치도 보여서 훈련을 했다. 그러나 코치들이 "이 따위 놈들과는 훈련 할 생각 없다."라는 말을 하면서 훈련을 거부했고 결국 김응용 감독이 직접 펑고를 쳐주었다고 한다. 청백전의 선발은 강태원으로 정해졌으나, 강태원은 팔꿈치가 아프다고 하여 청백전은 이뤄지지 않았고, 선수들은 식사를 위해서 식당으로 이동했다. 이 때부터 기자들은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챘다고 한다.

  • 오후 3시
고참들은 비교적 매를 덜 맞았지만 후배들은 많이 맞았다. 이렇다 보니 젊은 선수들은 호텔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이순철은 자신의 저지른 사태가 확대되는 일이 생기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이는 이 사태를 대충 넘기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강경파인 김정수, 이건열, 조계현, 송유석, 이강철, 홍현우는 귀국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윤기두 과장이 나서 "팀이 이 사태로 분열되면 너희만 피해를 보게 되고 이 사건이 퍼지면 이순철은 야구계에서 영원히 매장될지도 모른다." 라면서 선수단을 설득했다. 결국 이 설득이 먹혀 고참 선수들은 이를 수용하게 되었고 모두 저녁에 숙소로 돌아갔다.


4. 사건 이후[편집]


선수와 코칭 스탭은 더 이상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훈련을 끝냈다. 김응용 감독은 선수들에게 강하게 원성을 사던 B 모 코치를 2군으로 내렸다.

어느 고참 선수는 "저도 처자가 있는 몸이니, 잘 좀 부탁 드린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1996년 해태는 3년만의 우승으로 체면을 살렸지만, 1996년 시즌 이후 김응용 감독과 타이거즈의 프런트는 가담한 선수들을 끝까지 잊지 않았다.

  • 이순철 : 1996년 당시 해태의 주장이자 이 사건의 주동자였다.[6] 1996년 시즌은 그래도 어찌어찌 주전 외야수 자리를 지켰고 6차전에서 결승득점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1997년에 2차 1라운드로 김창희가 입단하면서 급격히 자리를 잃었고, 결국 주장임에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는다. 이 일로 김응용 감독과 원수를 졌고 1998년을 끝으로 삼성에서 방출되면서 은퇴했다. 그 뒤 삼성코치로 2년간 있었다가 2000년 시즌 후 김응용이 부임하자, 2001년에 연대 선배인 이광은의 부름을 받고 LG 트윈스로 이적했으며, 코치를 거쳐 2004년에 이광환의 후임으로 LG 감독이 되지만 알다시피 6668587667을 이끌어냈다. 그 뒤 엠스플에서 1년간 해설을 했으며, 우리 히어로즈 수석코치로 1년간 재임했다. 다시 엠스플에서 2011년까지 해설을 하다가 2012년에 선동열을 따라서 15년만에 타이거즈에 수석코치로 돌아왔다. 그러나 알다시피 2013년에 타어강이라는 역대급 DTD가 터졌고 결국 2년 만에 해임되었다. 2014년부터 SBS 스포츠에서 해설을 하고있다. 물론 이후에는 이런 일들에 대해 모두 화해를 했고 자주 식사도 하며 다시 깍듯이 모시고 있다.

  • 송유석 : 1996년에 출전기회를 잡지 못했다. 대신 그 무렵부터 마당쇠로 굴려지던 임창용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된다. 결국 1996년 11월에 LG로 트레이드했다. LG 구단에서도 불펜투수로 뛰면서 좋은 모습을 보였고, 1999년에는 주장이 되었으나 시즌 후 구단과의 FA 협상에서의 이견ᆞ선수협 문제 등으로 LG 구단의 눈 밖에 나 버렸다. 결국 2001년 한화에서 조용하게 은퇴했으며, 이후로는 야구계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 이건열 : 1996년은 한국시리즈에 나가서 우승반지를 얻었지만, 1997년은 김응용 감독이 떠오르는 2년차 신인인 장성호를 주전 1루수로 밀어주면서 은퇴를 종용했다. 1997년에 방출되어서 은퇴했으며 2000년에 SK에서 2군코치를했으며 2001년 고교 선배인 김성한 감독이 취임하자 타격코치로 부임했다. 이후 2004년에 팀 선배였던 이순철을 따라서 LG로 갔으며, 2006년까지 외야수비코치를 맡았다. 다시 2007년에 기아로 돌아오나, 서정환의 라인을 쳐 낼때 잘린다. 2008~2009 시즌은 화순고 감독을 맡았으며 2010년 ~ 2012년 시즌은 다시 기아에서 공무원 타격코치를 맡으면서 팬들에게 대차게 까였다. 2013년부터 동국대 감독으로 재임하면서 나름 괜찮은 지도력을 보이고 있다.타이거즈에 해준건 김호령을 추천 해준 것밖에 없다.

  • 조계현 : 1996년 시즌은 16승 + 2점대 초반의 방어율로 호성적을 올린다. 그러나 1997시즌은 3점대 후반의 방어율 + 8승으로 전년대비 부진했다. 결국 4억원에 삼성에 팔려갔다. 거기서 불만 지르다가 방출되었고, 김인식 두산 감독의 부름을 받아 두산으로 이적했다. 2000~2001시즌은 두산에서 팀의 베테랑으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었으며, 2002년은 KBS 해설, 2003년 ~ 2005년 시즌은 기아로 돌아와 투수코치를 했지만 투수진 발굴에 실패했으며 해임되었고 2006년 ~ 2009년 시즌에 선동열의 부름을 받아 삼성 투수코치로 갔으나 알다시피 조원수박차를 만들고 역시나 해임. 두산 베어스에서도 무능했다는 평을 받았지만 2012년 ~ 2014년에 LG 수석코치로서는 나름 괜찮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2015년부터 수석코치가 되어 다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다. 이 기간 모두 김기태 감독의 수석코치, 이후 KIA 타이거즈의 단장에 오른다.

  • 정회열 : 1996년 어느 정도 부상에서 회복되며 당시 주전이었던 최해식의 백업 역할을 수행했으나 이순철 송유석 이건열 조계현 등과 함께 1996년 당시 항명사건의 주범으로 찍혀서 다음 해인 1997년에는 고작 11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결국 그 해 시즌 후 해태에서 방출된 뒤 삼성으로 이적했지만 1999년 시즌 후 은퇴했다.그리고 아들이 KIA에 1차 지명을 받으며 입단한다.

  • 김정수 : 1996년은 선동열의 후임 마무리로 뛰면서 잘했지만, 1997년 ~ 1999년 시즌은 4점대 방어율을 찍으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김정수를 빼면 좌완투수가 강태원 밖에 없었기에 계속해서 기용되었다. 한편, 1996년 항명사건의 주동자들 중 송유석, 이순철, 조계현, 정회열, 이건열이 1996년~1997년 사이 타 팀으로 이적하거나 쓸쓸히 은퇴했지만 김정수는 어느 정도 사건 수습을 했었던 이유 때문에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다[7]. 그 뒤 1999년에 FA를 신청했으나 구단에서 FA를 거부해, 울며 겨자먹기로 재계약했다가 SK로 트레이드 되었고 SK에서 방출되어 한화 이글스로 갔으며, 좌완 불펜으로서 잘해 주었다. 2003년에 다시 SK로 와서 은퇴했으며, 그 뒤 2004년 ~ 2005년은 한화의 2군 투수코치, 그리고 2006년 이래로 계속 기아에서 코치를 하고 있다. 다만 키운 투수도 없고, 1군 코치시절의 삽질도 있는지라 철밥통 취급이다.


5. 같이 보기[편집]




[1] 광주 사레지오고등학교 육상선수 출신으로, 1975년 해태제과에 입사하여 곧바로 판매왕에 오를 만큼 영업 수완이 뛰어났다고 한다. 1982년 해태 타이거즈 창단과 함께 야구단으로 자리를 옮겼고 여러 요직을 거쳐 단장까지 올랐다. 2000년부터는 6년간 KBO에서 사무총장을 지냈다.[2] 당시 코치진은 김응룡 감독을 비롯해 김일권, 조충렬, 정현발, 장채근, 이상윤, 유남호, 신용균, 김종윤, 김종모, 차영화였다.[3] 막내일 뿐만 아니라 선수 시절 이순철과 호형호제했던 광주상고 선,후배 관계였다. 나이도 이순철이 두 살이나 더 많으며 입단 시기도 이순철이 1985년으로 1년 빨랐다. 장채근은 1995시즌을 끝으로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해태 코치로 합류하였다.[4] 김응용 감독은 아침 일찍 선수들을 불러내서 강제로 산책을 시켰는데, 전날 밤에 음주 유무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자주 걸리던 게 이병훈... 결국 이 일로 인해 이병훈은 김응용 감독과의 관계가 나빠져서 1996년 시즌 중 동봉철을 상대로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되었다.[5] 현재 KIA 타이거즈로 바뀐 뒤에 운영 실장을 맡고 있으며 전 외야수 윤민섭의 아버지.[6] 다만 이순철 본인은 2020년 인터뷰에서 자신이 주동자는 아니지만 당시 선수단 내 최고참이라 총대를 맸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은 선수단과 코치진 사이의 갈등이지 김응용 감독과 직접 관련된 것은 없다고 말했다.#[7] 그 덕인지 2000년 김응용 감독의 추천을 통해 SK 유니폼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