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7폭동 (문단 편집) == 결과 == 이 같은 사건사고는 영국령 홍콩 당국이 더 이상 사회문제를 방치할 수 없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971년]] 홍콩의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는 25대 [[총독]] 크리포드 [[머레이 맥클레호스]][* 1982년까지 재임했다.]가 부임하고, [[1973년]] 피터 고드버라는 영국계 [[홍콩 경찰]]이 430만 [[홍콩 달러]]를 전횡하고 출국금지도 어긴 채 영국 본국으로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염정공서]]가 창설되었다. 한편 경찰훈련학교, 소방훈련학교가 설립되고 전문적인 폭동진압 기동경찰 PTU대, SDU 대테러 경찰특공대가 설립되고 부패 [[경찰관]] 전원 해고, 젊은 신임 경찰관 대거 채용 등 홍콩 경찰과 [[홍콩 소방처]]의 문제점이 해소된 것도 이 때다. 그리고 [[1976년]] 크로스하버 터널이, [[1979년]] [[MTR 쿤통선]][* 지금과는 달리 [[쿤통역]] ~ [[섹깁메이역]] ~ [[몽콕역]](당시 명칭 아가일역) ~ [[침사추이역]] ~ [[센트럴역(홍콩)|센트럴역]](당시 명칭 차터역)을 잇는 노선이었다.]이 개통하며 홍콩 섬과 구룡반도간 [[교통]]이 개선되고, 영국 본토에서 반부패 전문가 초빙, 공중위생을 높이는 클린 홍콩 운동 등을 벌이며 [[1980년대]] 이후 홍콩은 지금과 같은 선진도시로 자리잡게 된다. 다만 [[1985년]] [[중영공동선언]] 발표 후 [[1997년]] [[홍콩 반환]] 후 중국 본토인들이 대거 유입되며 다시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비리가 벌어지고 있다. 그 후 이 사건과 완전히 반대의 성격을 가진 [[2014년]] 홍콩 [[우산혁명]]과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면서 이 사건이 재조명 받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