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각라봉 (문단 편집) == 비석 == [[파일:external/cfs7.blog.daum.net/download.blog?fhandle=MENPTlVAZnM3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YvNjM1LmpwZy50aHVtYg==&filename=635.jpg]] 남조덕화비 판본 [[파일:external/www.nlc.gov.cn/W020110629680467781591.jpg]] 남조덕화비 비각 그러나, 남조는 태화성에 남조덕화비(南诏德化碑)[* [[태화성유지]]에 존재하는 남조 문화재이다.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이 국가중점문물보호단위(国家重点文物保护单位)로 지정한 바 있다. 자세한 정보는 [[http://m.egloos.zum.com/blackace/v/5676021|#]] ]를 세워 본의아니게 당과 절교하게 되었음을 밝혔다.[* 비석이 세워진 시기는 766년으로 비정한다.] 그 일부가 [[신당서]]에서 나온다. >일찍이 말하기를, “나의 조상은 대대로 중국을 받들어, 누대로 책봉과 은상을 받았다. 후대에 다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한다. 만약 당에서 사자가 오면 이 비(碑)를 가리키면서 내 죄를 씻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br] 『신당서』 「남만전」 상 사료에 근거하여 아마도 각라봉은 장건타를 우발적으로 죽인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장건타가 평소 그에게 꾸지람을 많이해서 서로간의 화가 생겨 일어난 것이지 이것이 당에 대한 배반은 아니었던 셈이었다. 가령 선우중통이 남조의 반추를 알아주었다면 남조와 당의 관계는 완만히 해결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우중통이 이를 알아주지 않았으니 어쩔수 없이 전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어쨌든, 선우중통은 패전의 치욕을 갚기위해 당시 당의 실권자 [[양국충]](楊國忠)을 불러들였다. 754년, 양국충은 스스로 검남절도사를 겸하였고, 시어사 이복(李宓)으로 하여금 편성된 10만의 대군으로 남조를 정벌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태화성 공격 초기부터 [[역병]]으로 전세는 불리해졌고, 전쟁 수행 도중 이복이 남조군에게 붙잡혀 전사함으로써 사실상 패배했다. 또한, 전투 중 약 7만여명의 당군이 얼하이 호에 수장되었고, 남조인은 비록 적국의 사람이지만 딱하다고 여겨 이들 시체를 옮겨 장사를 지냈는데 그것이 바로 만인총(萬人塚)이었다. 이후에도 당은 남조를 공격했지만 그때마다 패배하였고, [[천보전쟁]]에서 죽은 자만 약 20만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755년, [[양귀비]]의 양자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다. 각라봉은 당의 혼란을 틈타 수주(嶲州)와 회동군(會同軍)을 공격해 함락시켰고, 서쪽으로 또 심전만(尋傳蠻)[* 심전만은 만족에서 가장 낙후된 민족으로 풍속이 없다. 가시밭을 지나가도 아파하지 않는다고 한다.]을 항복시켰다. 광덕(廣德) 초에 봉가이(鳳伽異)가 심전만이 거주하는 곳에 자동성(柘東城)을 축조했다. 일찍이 봉가이가 죽고, 779년, 각라봉이 붕어하자 그의 손자 [[이모심]](異牟尋)이 왕위를 이어갔다. [각주] [[분류:남조의 군주]][[분류:712년 출생]][[분류:779년 사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